[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함정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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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함정 25-17
  • 김선옥
  • 승인 2023.10.08 08:11
  • 기사수정 2023-10-08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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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joana(작가의 딸)
표지그림/joana(작가의 딸)

(#22-16에 이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의 말을 건넸지만 속으론 치를 떨었다. 그래도 표정을 감추며 웃어야 했다. 예전의 기억들로 인해 그녀는 겉으론 항상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잠을 못 이룰 만큼 낭패감에 허덕거리며 종종 혼자서 울음을 삼키더라도 주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재수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후로 더욱 단단한 껍질 속에 숨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다시 굳게 닫았다. 겉은 상냥하지만 속은 냉담하게 예전의 웅크린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외로움에 지친 여자들이 뿌리내리기 위해 독일 남자들과 쉽게 어울리거나, 결혼을 결정한느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항상 냉정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매사에 비관적이 되었으며, 일들을 분명하게 처리했다. 그런 태도는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황급히 피해 버렸다. 멀리로 달아난 그녀는, 자신이 만든 작은 세계로 숨어 살았다. 

기숙사가 정면에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가면 예전의 모든 것들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부대끼며 살았던 방과 비좁은 세면장, 배식 때마다 복도로 길게 행렬을 이루었던 식당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매서운 사감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몰래 보던 흑백 텔레비전, 비 내리는 날 내려다보았던 정원의 잔디밭도 잇달아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잠자자 몇 번씩 불려나가 무릎을 꿇고 듣던 선배들의 길고 지루했던 훈시, 차디찬 바닥의 휴게실, 가끔씩 올라가던 옥상도 있었다. 슬프고 속상할 때 그녀는 옥상에 올라가 오랜 동안 하늘을 쳐다보곤 했었다. 리모트 콘트롤로 꺼져 있던 화면을 다시 살려 낸 것처럼 온갖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그녀는 아는 얼굴들 몇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그녀를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아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숙소로 정해진 여관에서 짐을 풀었을 때에야 비로소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친구들과의 불편함도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 들었고, 평정과 여유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현주 얘기 듣고 어땠니? 꼭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어. 미안하다."

자리를 펴고 누웠을 때, 물어보고 싶은 걸 내내 참고 있었다는 듯 윤이 그녀의 표정을 살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미안해할 건 없어 현주라면 몰라도.”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현주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죽음을 계획하는 순간에도 현주가 그녀를 떠올렸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친구들에게 보란 듯이 미소 지으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윤에게는 하지 않았다. 윤이그녀에게 죄인처럼 구는 것은 싫었다. 윤이 덕에 그나마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중이었다.

"현주는 역시 대단해. 여전하기도 하고.”

그녀의 어이없다는 표정에 윤도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지? 나도 현주의 한결같은 모습이 부럽더라니까."

“그때처럼 저답게 행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난 다 알 거 같거든. 근데 혹시 그 애 시는 읽어 봤니? 내용이 궁금하네."

현주가 어떤 시를 썼는지, 윤이 그 시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현주도 그녀처럼 숨어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막연히 힘에 겨워 쓰러졌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얼마나 견딜 수 없으면 목숨을 끊었을까 싶어서 안쓰럽기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론 죽음을 향한 현주의 고집이 부러웠지만 미워했던 지난 시간들을 진심으로 사과할 기분까지 들었던 터였다. 그러나 현주는 그녀의 생각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살다 갔다. 죽음 뒤에도 우뚝 선 시인이 되어 환한 조명을 받으며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어.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유고 시집이 있어?"

"서점에 나와 있어서 지난번에 일부러 한 권 샀었어. 오래된 거라 지금은 있을지 모르겠다. 필요하면 주문하지 뭐."(계속)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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