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함정 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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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함정 25-16
  • 김선옥
  • 승인 2023.10.07 06:36
  • 기사수정 2023-10-07 0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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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joana(작가의 딸)
표지그림/joana(작가의 딸)

(#25-15에 이어) 심장병 환자의 수술을 어시스트하는 과정은 늘 힘들었다. 그녀는 어려운 수술이 끝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지나는 길목에는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카페가 있었다. 그녀는 가끔 베링거와 함께 그곳에 들러 차를 마시고 시간을 때우곤 했었다. 지나치다가 우연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베링거가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노란 머리칼의 잘 생긴 그는 혼자 앉아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가 반가웠다. 함께 커피를 마실까 생각하며 문으로 향할 때,어떤 여자가 손을 흔들며 그의 테이블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상대는 독일에서 시행된 어학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했던 한국인 간호사였다. 그녀가 잘 아는 그 여자는 베링거와 함께 돌아다니는 그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곤 했었다. 여자가 왜 그에게 다가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들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유리창을 통해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고 미소 짓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의 희망은 박살이 났다. 그녀는 또 다른 도둑을 보았다.도둑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어디서든 나타났다. 그녀의 희망을 앗아가려고 불현듯 나타난 도둑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눈앞에 확연하게 펼쳐진 사실이 잠들려던 그녀의 불신의 숲을 흔들어 깨웠다.

카페의 광경을 목격하고 잠시 아찔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노가 치솟았다. 뼈 속으로 깊이 스미는 배신감으로 메스꺼움이 생겼고, 토악질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극심한 배반의 느낌을 추스른 채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숙소에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찬 맥주를 꺼내 들이키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렀다. 그날은 정말 하염없이 울었다. 오래전부터 감정을 자제하는 법을 터득했던 그녀는 참담한 절망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었다.

베링거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이 청첩장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녀가 아는 여자, 카페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다른 여자와의 결혼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한 그의 선택은 잔인했다. 그녀와 넓은 피부색과 언어를 사용하는 여자와 결혼하므로 폐쇄된 그녀의 세계에 복수했다. 까닭 없이 수도를 주는 그녀에게 가까워지기 위하여 그는 더 이상 눈과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과거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서려고 노력해도 접근 금지의 팻말을 든 그녀와 더 이상 거리를 좁힐 수 없다고 느꼈거나, 설득이 힘들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던 그녀였음을 그가 조금만 이해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아주 조금만 더 인내했으면 두 사람의 관계에 분명 진전이 있었다. 발전이 가능한 그 시기를 그는 놓쳤다. 그가 참지 못한 것이 그녀는 못내 아쉬웠다. 사람들과의 진정한 관계를 다짐하며 애쓰던 시기에 모처럼 이어지던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그녀는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완전히 문을 닫았다. 불신의 켜가 한층 두꺼워진 것은 베링거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계속)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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