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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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⑦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1.27 10:31
  • 기사수정 2022-01-14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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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현 부상으로 군산상고가 8강 진출에 실패했다고 보도한(동아일보)기사 제목./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조계현 부상으로 군산상고가 8강 진출에 실패했다고 보도한(동아일보)기사 제목./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구수갑 감독에 대한 오해, 32년 만에 풀려

1982년.

그해 고교야구 2관왕과 함께 ‘역전의 명수’ 전통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조계현.

그는 휴식을 즐길 사이도 없이 일본 오사카(大阪) 구장에서 열리는 한·일 고교야구 올스타전(8월 27~29)에 출전한다.

그리고 3게임 연속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로 등판, 한국 선발팀(감독 구수갑) 승리(2승 1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국치일(國恥日)을 하루 앞둔 28일(2차전) 경기 때 한국은 7회까지 1-3으로 끌려가다가 8회 말 조계현이 2타점 우월 3루타를 날려 동점을 만든다.

그에 힘입어 한국은 집중 안타로 3점을 추가 6-3으로 역전승을 거둔다.

이때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애국자!’라며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그런가 하면 무리한 등판을 우려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9월이 되자 시민을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구수갑(당시 경북고 감독)이 계획적으로 조계현을 매게임 등판시켜 팔꿈치 부상을 당하게 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진 것.

‘일본 원정 게임에서 팔꿈치 균열로 투수 생명이 위험하다.’ ‘조계현 마운드 못 선 군상, 8강도 못 가 침몰’ 등 조계현 부상 관련 신문보도는 시민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조 감독은 사실과 다르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세 게임 등판은 맞지만, 구수갑 감독 의도가 아니라 제가 자원해서 던졌습니다."

"봉황대기 대회가 끝나고 피곤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워낙 지기 싫어하는 성미에 특히 일본이라서 위기 때마다 등판시켜달라고 말씀드렸죠."

"구수갑 감독이 나쁜 마음을 먹고 저를 혹사했다고 욕을 많이 얻어먹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시민들의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네요.”

 

조계현 감독의 당시 상황설명은 ‘혹사’당한 게 아니라 승부욕을 억제하지 못한 ‘자업자득’이었다는 것으로, 32년이 지나도록 기자의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오해까지 말끔히 풀어주었다.

 

가장 아쉬웠던 경기는 1985년 대륙간컵 결승전

팔꿈치 부상으로 미래가 불투명했던 조계현은 졸업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 동국대, 원광대 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감독과 백기성 코치는 학교까지 찾아왔다.

그럼에도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의 권유와 훌륭한 투수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84년 연세대에 입학한다.

그는 1984 춘계 대학야구연맹전 3일째 경기(연세대-경남대)에서 34타자를 상대로 삼진 7개를 빼앗으며 첫 완투승(4-1)을 기록한다.

1986년 대학야구 봄철리그에서는 우익수로 나서 2회와 8회 홈런을 날린다. 이날 경기는 6회 초 장호익의 만루 홈런까지 가세 고려대를 8-2로 꺾는다.

이날 조계현은 1-2로 뒤져있던 3회 1사 후부터 등판 무실점으로 막으며 호투했다.

이렇듯 그는 팔꿈치 상처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팔방미인’으로 통하였다.

1985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에서 한국이 준우승하는데 견인차 역할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 시절 야구를 제대로 못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대륙간컵 결승전(한국-쿠바)을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경기로 꼽았다. 당시 한국은 조계현의 호투로 5회까지 3-1로 앞섰으나 6회와 8회 수비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3-4로 분패했다.

어느 야구 전문가는 아마야구의 메카 백호기 야구대회 1988년 판도를 가늠하면서 “지난해까지 크게 활약했던 조계현·장호익 황금 콤비의 졸업으로 전력에 큰 구멍이 생긴 연세대는 중위권 진출도 힘겨운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는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연세대 시절 얼마나 비중 있는 선수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한야구협회는 1988년 9월 초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할 야구(시범종목) 한국대표팀 최종 엔트리 23명을 발표한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조계현과 손발을 맞춰온 장호익이 빠져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조계현이 야구협회를 찾아가 “장호익이 있어야 내가 공을 던질 수 있는데 왜 빼느냐, 장호익을 빼려면 나도 제외해달라”고 항의 합류시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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