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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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②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1.09 06:54
  • 기사수정 2022-01-14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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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초등학교 4학년 소풍 사진(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학생이 조계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남초등학교 4학년 소풍 사진(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학생이 조계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냇가에서 붕어 잡아 판 돈으로 야구장비 구입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趙啓顯).

그는 1964년 전북 군산시 장미동에서 3남 3녀 중 막내(늦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은 군산시청 말단 공무원.

워낙 박봉이어서 여덟 식구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는 밭농사도 짓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구정물을 받아다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워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

조계현 감독은 “끈기와 참을성은 보수적인 아버지 성격을, 두둑한 배짱과 승부근성의 싸움닭 기질은 억척스러울 만큼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며 옛 추억들을 떠올렸다.

 

“저는 늦둥이로 태어난 덕에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이북 출신으로 원래 황해도 송화군에 사셨다고 합니다. 자식은 모두 12남매 두었는데, 한국전쟁 때 둘째 누님을 고향에 남겨놓고 피난 내려오다가 5남매를 잃었다고 하더군요."

"가슴 아픈 사연인데요. 얼굴도 모르는 누님이 북에 계시니 저도 이산가족인 셈이죠."

"새마을운동(1970)이 시작되고 도시에서 돼지 사육을 할 수 없게 되자 양돈·양계가 가능한 오룡동 산동네로 이사했다고 합니다."

"가난뱅이 집단촌인 피난민촌이었죠."

"그곳도 북에서 내려온 아이가 많았어요."

"그들과 석전(石戰: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을 자주 했습니다."

|1971년 남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석전을 즐겼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돌팔매질이 손목과 어깨 단련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은데, 그때는 야구가 무슨 운동인지도 몰랐습니다. (웃음)"

"야구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시작했어요."

"한창 공부에 취미를 붙이던 3학년 2학기 같은 반 백인호(전 KIA 코치)가 추천하고 문철웅(체육부장) 선생님이 권해서 야구공과 인연을 맺었죠."

"송상복(스마일피처) 선배가 감독이었는데, 선수들이 고생 참 많이 했어요."

"고된 연습에도 일요일이면 고철과 폐품을 수집해서 고물상에 팔기도 하고, 냇가에서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아 식당에 팔아 야구 장비를 구입했거든요.”

 

그랬다.

모두가 가난했던 1970년대 중반.

그때는 군산에 초·중·고 야구팀 6개를 피라미드 형식으로 창단하여 운영비를 조달해주던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이 대형화재를 두 번이나 당하고 주식 50%가 선경(현 SK)으로 넘어간 시기여서 지원이 예전처럼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성숙한 리더십 보여줘

야구 인생을 FM, 즉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싸움닭 조계현.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체육부장에게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 모집 때 54명이던 야구부원이 14~15명으로 줄어들고, 운동화 한 켤레도 구매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는 동료들을 보며 뭔가 결심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5학년 때 송상복 감독님이 군대에 가고 투수이자 4번 타자였던 제가 감독 겸 주장을 맡았죠."

|작전도 세우고 선수들 관리도 했거든요. 그렇게 팀을 이끌다가 어느 날 체육부장에게 야구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소질도 있는 놈이 왜 그러느냐고 묻더군요."

"대뜸 육성회비(2400원) 면제를 요구했죠. 그 시절에 선생님과 딜(협상)을 했던 겁니다. (웃음) 체육부장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저 혼자가 아니고 야구부 전체라고 했더니 놀라더군요."

"결국, 교장 선생님과 상의 끝에 전원 면제 결정이 내려져 선수들이 연습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그렇게 육성회비 면제로 선수들 사기를 북돋워 주었고 선수들은 이듬해 봄 서울에서 개최된 제6회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 우승으로 화답했습니다."

"저도 무패행진을 이어갔죠."

"제가 미더웠던지 학교에서 (조계현 등 5명)붙잡는 바람에 서울 야구 명문의 스카우트 제의도 뿌리치고 중학교 진학을 1년 미뤘습니다."

"그리고 1977년 7회 대회도 우승, 2연패의 영광을 안았죠. 야구를 잘해서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을 두 번 다닌 것도 기록이라면 기록일 겁니다.(웃음)”

 

조계현 감독은 “주위에서는 군산 촌놈들이 서울까지 올라갔으니 한 게임만 이겨도 큰 수확이라고 했는데 우승까지 했고, 그 모두가 땀과 눈물의 결실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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