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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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⑧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1.30 07:54
  • 기사수정 2022-01-14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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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타이거즈 시절 승리를 자축하는 조계현 투수(사진 기아타이거즈)./사진=군산 야구 100년사
해태타이거즈 시절 승리를 자축하는 조계현 투수(사진 기아타이거즈)./사진=군산 야구 100년사

 

두 평 남짓의 마운드에서 인생 배워

싸움닭 조계현은 1989년 3월 5일 해태 타이거즈에 합류한다.

그해 4월 9일 광주구장(해태-빙그레) 개막전에서 빛나는 투구를 선보인다.

4월 20일 대구구장(해태-삼성) 경기에서 에이스 선동열이 7-0으로 크게 이기던 5회에 5실점을 당했으나 6회에 등판한 조계현의 깔끔한 마무리로 승리투수가 된다.

데뷔 첫해 성적은 7승 9패,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10월 한국시리즈 3차전(해태-빙그레)에서 승리투수(4-1)가 되면서 해태 우승을 견인한다.

선동열의 어깨 건초염과 롯데의 상승세에 밀려 1992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해태는 절치부심,1993시즌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선발이었던 선동열을 전문 마무리로 돌리고,조계현을 붙박이 선발로 기용한다.

시즌이 시작되자 조계현은 구단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17승을 거두고 1994년에는 자신의 최다승인 18승을 달성하면서 선발로 자리를 굳힌다.

1996년 8월 11일 광주구장(해태-롯데)경기에서 삼진 7개를 솎아내고 3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두며 12연승 기록을 세운다.

그해 성적은 27경기에 출전 16승(완투승 11개, 완봉승 3개) 7패 방어율 2.07을 마크한다.

그는 선동열, 김성한이 없는 해태가 프로야구 사상 한국시리즈 8번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그럼에도 1997년 시즌이 끝나고 이순철과 함께 삼성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다.

아래는 조 감독의 소회.

조계현 LG트윈스 2군 감독./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조계현 LG트윈스 2군 감독./사진=군산야구 100년사

“1997시즌이 끝나자 이강철과 저를 묶어서 엘지 이상훈과 트레이드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해 제 성적이 8승 9패이지만 이강철하고 저는 100승을 넘게 한 투수들이고 이상훈은 40~50승에 불과한데 묶어서 2대 1로 트레이드한다는 말에 열 받아서 제가 먼저 보내달라고 했죠."

|그때 해태를 떠나면서 제 야구인생도 ‘하향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하향길···.”

 

두 평 남짓의 마운드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싸움닭 조계현.

“투수는 투지와 배짱 자신감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선수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느냐고 묻자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옛날과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야구 지도도 옛날 방식으로는 선수들과 커뮤니티 형성이 어렵습니다."

"문제점을 발견해도 선수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찾아 긁어준 뒤 지적해야 공감하지,옛날처럼 군림하려고 하면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듣죠."

"다시 말해 지도자(감독)는 군림이 아니라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지도해야 합니다.그래야 성공한 지도자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마치고 ‘LG 챔피언스 파크’에서 나오는데 조계현 감독의 지도이념 중 “지도자는 군림이 아니라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지도해야 한다”는 대목이 귓가를 맴돌았다.

(조계현 편 끝)

 

※ 등장인물 나이와 소속은 2014년 6월 기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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