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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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역전의 싸움닭’ 조계현 ⑥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1.23 08:28
  • 기사수정 2022-01-14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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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현의 진면목 보여준 봉황대기 대회

제37회 청룡기대회 우승 후 군산상고 선수들이 백기성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1982년 6월 20일 ‘조선일보’)/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제37회 청룡기대회 우승 후 군산상고 선수들이 백기성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1982년 6월 20일 ‘조선일보’)/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조계현은 1982년 6월 개최된 제37회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군산상고 우승의 영광은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만큼 큰 역할을 해냈다.

결승전까지 다섯 차례 싸우는 동안 거의 완투, 실점을 최대한으로 막아낸 것. 당시 2년생으로 최우수선수상과 우수투수상을 받아 2관왕이 된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베스트를 다해 싸웠을 뿐’이라며 ‘우승은 연습의 결정체’임을 강조하였다.

그해(1982) 8월 17일 잠실구장에서 야간경기로 펼쳐진 제12회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준결승(군산상고-대구고)에서 조계현은 기록적인 삼진 18개를 빼앗으며 대구고 강타선을 산발 5안타로 잠재운다.

그리고 5회 초 3번 백인호가 결승 2점 홈런을 터뜨려 4-1로 승리한다. 군산상고는 이 대회 처음으로 8강 고지를 점령한다.

당시 어느 언론은 “키 1m 78cm에 몸무게 73kg의 체구를 모두 활용하는 힘찬 투구에 싱커와 슬라이더가 주 무기인 조계현은 과연 뛰어난 투수였다”며 “대구고 강타자들로부터 삼진을 무려 18개나 뺏으며 군산상고를 4강 고지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계현은 이날의 활약만으로도 고교 최고 투수라는 찬사를 받기에 족했다”고 평가했다.

그해 8월 2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결승전(군산상고-제일동포)에서 군산상고는 태풍의 눈이었던 제일동포를 4-1로 누르고 대망의 초록 봉황대기를 안았다.

이날 군산상고는 초반에 상대의 결정적인 실책 2개로 2점을 얻어 7회까지 2-1 리드를 지키다가 8회 말 2점을 추가함으로써 4-1로 승리 처음으로 봉황대기 정상에 오른다.

결승전까지 6게임을 치른 군산상고가 얻은 득점이 33점임에 비해 실점은 7점이었다.

이것은 조계현 투수의 위력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6게임 모두 완투하지는 않았지만, 37과 2/3를 던져 실점 4, 자책점 3을 마크, 방어율 0.72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따라서 군산상고의 봉황대기 우승은 조계현의 진면목을 보여준 화려한 퍼포먼스나 다름없었다.

이에 조계현 감독은 공(功)을 자신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며 손을 저었다. 그는 “백기성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과 지략, 그리고 선수 모두가 뛰어난 공격력과 수비력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며 백 감독을 떠올렸다.

 

“백기성 감독님은 서울 배문고를 졸업하고 한일은행에 있다가 서른세 살 때 군산상고로 오셨는데, 사납게 가르쳤습니다."

"전략도 좋았어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팀플레이와 수비를 완벽하게 만드신 분이죠."

"아침 7시 40분에 등교하면 연습, 연습, 밥 먹고 연습···. 밤늦어서야 집에 들어갔으니 선수들의 하루는 그야말로 야구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훈련은 혹독했지만, 껍데기를 벗는다는 각오로 임했기에 그해 2관왕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조계현은 “훈련 중 맞기도 많이 맞았다”며 “백기성 감독은 끈질긴 집념의 지도자로 선수들을 ‘악바리’로 만든 분이었고, 평소 ‘군산상고 야구는 군산 시민의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군산을 사랑하는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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