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78] ‘스포츠(레포츠) 성지’ 은파호수공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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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78] ‘스포츠(레포츠) 성지’ 은파호수공원(5)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6.30 15:29
  • 기사수정 2022-07-05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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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조정의 산실 역할… 동고 조정부‧ 시청조정팀 창단→ 전북조정협회 초석
고 손정국 교사 헌신‧ 한영준 대한조정협회장 기술 전수 등 전국 명문 우뚝
카누 등 주도 한때 청구목재 여자일반부 창단 … 동고 조정부 → 카누부로

은파호수는 오늘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한때 초기형 레포츠와 스포츠의 성지였다.

70년대 초‧ 중반의 은파는 숲과 산을 끼고 있는 한적한 호수였으나 도심의 팽창으로 군산 최초의 야외풀장이 존재했었고 보트장까지 들어선 유원지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야외풀장은 아마도 새로운 놀이문화의 시작이었는데 이곳에 보트장까지 들어섰으니 그런 분야의 신기원을 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와중에 남고 조정부까지 창단되면서 이곳은 그야말로 스포츠의 성지로 거듭나는 계기였다. 수년 전에 은파 순환 자전거로까지 만들어져 레포츠 공간으로도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은파의 스포츠와 레포츠, 놀이문화에 대한 언급을 통해 시대적인 흐름에 따른 재조명의 장을 마련했다. 시기별로 보면 수중 놀이시설이라 할 수 있는 야외풀장과 보트장이 가장 먼저 들었고 다음으로 엘리트 체육인 조정 훈련장, 자전거길 등의 순으로 이뤄졌다.

# 군산 첫 야외풀장‧ 보트장 등장

은파의 본격적인 개발은 미제지 관광개발사업에서 비롯됐다 할 수 있다.

이 사업을 시작한 사업가는 1971년 5월 24일 전주지법원 군산지원에 ‘주식회사 군산유원지’ 설립 등기(등기번호 550호)를 내고, 그해 6월에는 관광진흥법에 따라 전라북도에 등록 절차를 마쳤다.

이렇게 시작된 개발사업으로 같은 해 7월 야외풀장(수용인원 500명)이 완공됐고 유람선과 보트까지 들여온다. 시민기자 조종안 기자의 취재 내용에 따르면 이렇다.

은파보트장에는 풀장 외에 유람선 5척(10인~20인승), 5평 규모 수중 방갈로(3동), 2인승 보트 50척(무동력선), 3인승 보트 5척, 2층으로 된 수중 누각(연건평 65평), 맥주홀 2동(30평), 매점· 식당 5동(30평) 등이 영업 중이었다 한다.

이후 미제지는 은파유원지 등으로 불리게 된다.

은파는 옥구군 미면 미룡리에 속한 농업용 저수지였다. 이곳으로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아 큰길에서 내려 흙먼지가 푸석푸석 날리는 시골길을 500~ 600m 걸어가야 했다.

이곳은 1973년 7월 행정구역개편을 통해 옥구군 미룡리에서 군산시로 편입된다.

# 군산에 조정은 언제 등장했을까… 1970년대 중반 은파호수 첫선

1948년 군산해양대학(한국해양대학의 전신) 조정부 출범→ 1975년 군산동고 조정부 창단

우리나라 조정의 역사는 1916년 일제강점기에 생겨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 땅에 조정경기가 자취를 감춘 후 1961년 특수체육으로 부활하는 근대조정역사로 크게 대별된다.

이 땅에 조정 경기정의 첫 도입으로 한강에 기다란 보트가 달리는 광경을 연출한 학교는 1916년 6월 1일 개교 기념식을 거행한 중앙학교다.

이 학교에서 ‘금년부터 조선에서 보지 못하던 운동기관을 설치할 터이라는데 이는 즉 활발하고 유쾌한 보트 운동이다’라고 전해져 온다.

그러면 군산과 전북에는 언제 시작됐나.

각종 자료들을 종합하면 이런 내용들로 요약된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국내에선 1946년 경성제대 예과 포어팀이 출범했고, 1947년 부산수산대학에 조정부가 연이어 창단됐단다.

이런 상황 속에 1948년 군산해양대학(한국해양대학의 전신)에 조정부가 만들어졌는데 부산수산대학과 군산해양대학은 조정 보트를 보유하지 못한 관계로 2열로 앉아 젓는 6척의 해상훈련용 ‘카터’로 바다에서 훈련하며 체력단련에 주력했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전쟁 중에 피난을 떠났던 한국해양대학이 부산에 잔류하는 바람에 이를 군산 조정의 공식기록을 잡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서울과 부산 등의 지역은 1961년에 뿌리를 내리는 상황이었지만 군산은 거의 미지의 땅이었다.

1970년대 중반 들어 전국적인 고교 팀 창단 붐이 일었는데 전북도와 도체육회 차원에서 고등부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고등부 조정팀 만들기에 나섰다.

이때가 1975년.

우선 항구도시이자 은파호수가 있는 군산과 완주 구이저수지를 갖춘 곳에 남고 조정부가 창단된 것이다. 이들 학교가 군산동고와 전주완산고다.

군산동고는 팀 창단과 함께 그해 6월 14일 은파호수에서 조정부 진수식을 갖고 본격 출범하게 이르렀다.

2000년 제작된 ‘군산시사’에 따르면 심규원 동고 교감(전무이사)과 손정국 교사(작고: 총무이사)가 중심이 돼 전북조정협회를 설립했는데 초대 회장이 진홍권 전 군산신문 회장(작고)이었다.

팀 창단 때 조정부 선수로는 8명(3학년)과 2명(2학년), 10명(1학년) 등 총 20명으로 시작됐지만 고된 훈련과 학교의 열악한 재정 때문에 포기한 선수들이 적지 않았단다.

나중엔 10명만 남아 겨우 A, B팀만 존재했을 정도로 중도 하차했다. 이중 2학년 부원은 그나마 1년도 안돼 포기해버린 것이다.

당시 체력과 체격이 갖춰진 부원을 선발하다 보니 유도선수 등과 같은 다른 운동선수들을 충원했다. 이런 일화는 과거 김기웅(군산동고 12회) 서천군수의 회고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그는 3학년 재학 때까지 유도선수 생활을 하다가 뜻밖의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유도를 포기, 새로 창단된 조정부의 선수로 변신해 조정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1년생 10명도 2명만 선수로 남아 전국대회 우승까지 하는 쾌거를 이뤘는데 중심인물이 송정환(14회)과 익산 오산출신 한원섭(작고) 선수 등이었다.

이들은 창단 멤버로서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며 2학년 재학 중에 전국선수권대회(1976년 10월)에서 우승을 일궈냈지만 잇단 불운에 시달여야 했다.

송 선수는 이 대회 우승과 함께 군산상고 야구부처럼 시가행진을 하며 축하받았던 기억들을 회고했다.

이들이 남고 조정부 최강에 오른 것은 은파호수에서 매일 1만m 운동연습과 함께 매일 10km 달리기 등 강훈련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런 훈련 소화는 한번의 레이스만으로도 체중 1.5~ 2.0㎏가 소진되기 때문에 풀코스 마라톤에 버금가는 스포츠다.

또한, 당시 선수출신으로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영준씨의 지도도 한몫했다. 이는 군산시사에는 ‘나영준’으로 잘못돼 있다. 제자들은 이 내용은 잘못된 만큼 바로잡아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한조정협회장(2009~ 2012년) 등을 역임한 그는 국가대표 조정선수로 일본 도쿄올림픽대회(1964년)에 출전한 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조정담당관과 국제심판, 아시아조정연맹 회장, 대한조정협회 부회장 등 여러 자리를 거친 인사다.

이런 훈련 덕분에 당시 조정 명문대학들과 해군사관학교 조정부에서 연습경기를 하자는 제의를 잇따라 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경쟁학교들의 ‘경계 1호 학교’로 부상했을 정도다. 실제로 당시 전국 남고 조정팀 중 최고 실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아 주위의 기대가 대단했었다.

하지만 전국대회 우승 등에도 불구, 그해의 한일선발전과 전국체전 등에서 불운이 겹치면서 동기생과 후배들은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오늘날과 달리 운동선수들의 사정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시절은 운동선수로서 체력보강용 식단은 아예 기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학교 차원의 지원도 거의 없었을 정도니… .

게다가 선수 혹사 등으로 선수생명 단축과 부상으로 혹독한 상황을 경험해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송 선수는 핵심 주전으로서 맹활약했지만 고 3때 무릎부상으로 대수술을 하는 바람에 선수생명의 기로에 놓여 있다. 무리한 훈련과 혹사가 빚은 참극이었다. 졸업 후 지역대학의 조정부 창단 움직임에 합류하려 했지만 이마저 불발, 짬을 내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다가 사업에 투신하면서 본업과 멀어졌단다.

“다시 태어나도 조정인이 되겠다”는 그는 “아무리 더워도 정상 운동복을 갖춰 입고 운동을 하는 조정인이야말로 대단한 체육인 신사”라고 치켜올렸다.

이후 박영기 선수는 국가대표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운동을 같이했던 이가 전계석 전 군산시청 계장 등이다.

군산동고의 조정부는 창단 9년째를 맞으면서 새로운 상황을 맞는다. 조정부 대신 카누부가 만들어졌고 군산시청 여자일반부가 1994년 창단된 것이다.

군산시청 조정팀이 화천평화배 전국 조정경기대회 12연패(2009~ 2020년)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3회부터 14회 대회까지 우승한 것이다.

군산시청 조정팀은 군산시 엘리트 전용 훈련시설에서 런닝과 웨이트 등 체력 훈련으로 대회의 준비를 위해 체력단련을 꾸준히 해왔으며 대회 개최 50일 전부터 화천에 자리 잡고 전지훈련을 실시해온 결과물이다.

# 카누의 군산 상륙… 동고 조정부의 발전적 해체(?)

동고 조정부 창단 이후 군산에 비슷한 수중 스포츠라 할 수 있는 카누가 새롭게 등장한다.

고 진홍권 전북조정협회장과 심규원 조정협회 전무이사 등의 노력으로 청구목재에 여자일반부 카누부가 창단됐다. 카누부는 전국체전 우승은 물론 1980~ 81년 한일교환경기에 참가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올린 바 있다.

군산동고 조정부는 8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발빠르게 카누부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그 중심인물이 손정국 교사다.

기갑부대 장교출신이었던 그는 익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군산동고로 와서 군산조정의 태동과 전북조정협회 창립에 앞장서지만 1983년경 조정종목에서 ‘카누’로 갈아탄다.

구체적인 자료가 없지만 군산동고 카누부가 1984년 전후 제1회 회장배 전국카누대회와 제2회 체육부장관배 전국카누대회, 전국체전 등에서 입상한 것을 보면 이를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 K-4 종목에서 두 차례에 걸쳐 1위를 차지하는 등 전국대회 호성적을 80년대 말까지 기록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군산 조정과 지역 카누의 발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손정국 교사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왜 카누로 종목을 바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새로 종목이 조정 비전문가였던 그에겐 새로운 기회였기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여세로 그는 1985년 3월 군산카누협회를 창단했고 전무이사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회장의 오랜 공석으로 침체기를 맞다가 1990년 새로운 회장에 당시 하광선 옥구군수를 영입한 뒤 자신이 전무이사를 맡는다.

이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카누 국제심판 자격증을 획득했고 국가대표팀 코치까지 역임하는 한편 카누연맹 심판이사까지 올랐다.

조정부 제자들은 이런 그에게 아쉬움을 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정부와 카누부 선후배들간 관계 정립도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송정환 선수 등 선배들이 나서 조정선수 선후배는 물론 카누선수들과의 만남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임 회장은 남원에서 활동하는 주군송(12회)씨다.

# 자전거문화센터 신축과 라이더

군산시는 은파호수공원 내 군산시 자전거 문화센터를 신축, 2013년 11월29일 개소식을 개최했다.

문화센터 건립은 2010년 6월 행정안전부 10대 자전거 거점도시 사업에 선정된 군산시가 국·도비 지원으로 자전거 도로 개설 및 공공자전거 무인대여 시스템 구축과 아울러 진행한 사업이다.

지상 2층 연면적 335㎡ 규모로 건립된 자전거문화센터는 은파호수공원 및 백년광장, 금강습지공원에 구축된 공공자전거 무인대여 시스템(자전거 100대)을 종합관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시민 자전거 교육, 방치 자전거 수거· 수리 등으로 군산시 자전거 이용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자전거 문화센터 1층에는 자전거 리폼센터, 공공자전거 등 자전거보관소 및 자전거 동호인들을 위한 다목적 휴게소가 있다. 2층에는 공공자전거 종합지원센터, 자전거 교육장, 자전거 관련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센터는 안전하고 편리한 자전거 이용 문화 조성을 위해 자전거 이용 안전교육 등을 실시하고, 교육 후에도 환경체험, 자전거 투어 등을 진행해 시민들이 실생활에서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사후 관리에도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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