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76] 문학과 인물들의 본향 ‘은파호수공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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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76] 문학과 인물들의 본향 ‘은파호수공원’(3)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6.17 10:20
  • 기사수정 2022-07-05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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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대문호’ 고은 시인의 고향… 문학의 꿈 키운 창작 공간
은파 속 할미산 ‘마을의 진산’… 시인의 산문집‧ 자전적 소설에 단골 등장
지곡동 인근 고두모 대상그룹 고문‧ 옥정리 고병우 전장관 등의 고향
제1회 고은 문화축제가 2015년 10월 하순 열렸다/사진=군산시
제1회 고은 문화축제가 2015년 10월 하순 열렸다/사진=군산시

#1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 길 이슬도 털고 잘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 <중략> …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 <하략>… ]

- 고은 만인보 제1권 머슴 대길이 -

#2

고은=나는 그런 머슴방의 대길이 아저씨한테 한글을 배우고 그가 읽는 언문소설 따위를 읽게 되었지. 그러다가 종조부댁의 서울 유학 숙부들의 서가에서 탄금대인(彈琴臺人)이 지은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을 읽기도 했어.

그 저자가 뒷날 농촌소설가 이무영(李無影)이라는 것을 알았지. 나는 머슴방에서 배운 한글로써 10대 이후 다른 문자 언어 강제에도 불구하고 언어습득론에서 말하는 제1 언어인 한국어를 내 삶의 요체로 삼을 수 있었지.

사실인즉 언어는 민족이나 국가에의 등식(等式)의 가부에 앞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개적(個的)인 것이고 아니 그 개적인 초기상태는 어머니의 언어와 아들의 언어조차도 서로 달라지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말의 근원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 민족어 또는 국가어라는 근대 의제(擬制)를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 경향신문(2012년 2월3일자) ‘고은과의 대화’(20) -

#3

△고은=내 고향은 전형적인 쌀 주산지이므로 쌀 미(米)자가 붙어서 행정상의 고을 이름은 기름진 땅을 뜻하는 옥구(沃溝)에 쌀 고장이라는 미면(米面)에 용둔마을이 이웃 마을의 쌀메(米堤)와 합쳐서 미룡리(米龍里)가 되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쌀농사를 의미하는 데가 내 출생지인데, 그러나 식민지 시대 이전의 조선 후기나 식민지 시대나 착취의 현장이었으므로 전통적인 삼정(三政) 문란에다 일본의 쌀 강점과 37제 소작의 ‘쌀 없는 고장’이기도 했어. 아무튼 나는 이런 ‘쌀의 마을’과 ‘쌀 없는 마을’을 동시에 체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셈이지.

△김형수=‘머슴 대길이’를 보면 화자에게서 마을의 도련님 같은 인상이 풍기는데, 문학적으로 가공된 겁니까?

△고은=그 인물은 전설로도 모자라지. 집안에서 대체로 나는 축복받은 총애의 대상이었어. 내가 태어남으로써 아버지의 아버지인 고한길(高漢吉)이라는 동학난 지원세력이던 농부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생겨났고 예복이와 야문이도 두 고모가 되고 또 어머니의 친정 사람들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으로 있게 되고 어머니의 동생은 이모가 되었어. 요컨대 하나의 탄생은 수많은 혈친과 인척의 친인척 명사들을 만들어낸단 말이네. …

- 경향신문(2011년12월21일자) ‘고은과의 대화’(12) -

고은 시인(1933~ )과 은파호수공원, 인근의 할미산, 고향마을 등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고은 시인
고은 시인

만인보의 여정은 가족과 친척, 고향사람들을 두루 훑은 다음, 시인 자신의 편력을 따라 이 땅 곳곳으로 뻗어 나간다.

시작은 시인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친구네 집 머슴 대길이로부터 비롯된다.

고은의 작품은 시와 소설‧ 에세이 등 총 160여권에 이르며 세계 각국의 언어권에 번역, 출판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고향과 금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문학인이다. 그의 작품에서의 애뜻함은 더한것 같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대접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떤 이는 사상적인 이유로, 다른 이는 미투 논란 등으로 그를 밀어내듯 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얼마 전, 경위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든지 관계없이 고은의 고향마을을 다녀왔는데 때마침 ‘군산~ ’시리즈 중에 은파호수공원과 관련이 있어 주변의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고은의 삶에 깊은 관심에도 군산과 긴 인연에도 그의 생가 주변을 가보지 않아 단단한 마음을 먹고 그곳에 갔다.

고은의 청소년기와 아주 생판 달라졌겠지만.

그의 유명세에도 미투 논란 이후 고향은 그를 잊은듯했다.

그 시절 미제지로 불린 은파호수의 제방에서 몇 백미터 떨어진 언덕길을 따랐는데 그의 고향이란 푯말조차 존재하지 않아 동네 분에게 물어물어 찾아야 했을 정도란다.

과거엔 군산문화원에서 만든 ‘용둔리 고은 시인의 생가터’ 표지판이 존재했었지만 최근엔 그것마저 사라졌다.

용둔마을에 있는 고은 시인 생가지 주변. / 사진=투데이군산
용둔마을에 있는 고은 시인 생가지 주변. / 사진=투데이군산

은파호수공원은 그야말로 여러 동을 끼고 있는 곳인데 주로 옥구군 미면(미성동)에 속했다. 용둔리, 미제리, 원당리(신촌) 일부와 동면의 지곡리 일부, 옥정리 등을 병합한 공간이다.

이렇게 거창한 행정 통‧폐합을 언급한 이유는 용둔마을을 소개하기 위한 서술 다름 아니다.

지금은 미룡동에 속하는 도심이 됐으나 당시 핵심권역이라 할 수 있는 군산의 원도심권까지 가려면 적어도 산 넘고 논을 건너야 하는 벽지마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산의 성격상 평야지라 두메산골이라는 할 수는 없겠지만 그곳은 오지마을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오늘날처럼 전깃불이 들어온 곳이 아니었던 만큼 석유등잔에 의존하다가 다시 어유(魚油)나 식물 기름을 부어 의존하던 곳이었다는 게 고은의 회고다. 물론 그는 다른 작품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수차례나 밝힌 바 있다.

해방 직후 이 마을은 100여 가구에 달하는 동네였단다.

지금은 몇몇 집들만 있을 뿐 아파트촌으로 뒤덮이고 있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이 아파트촌이 없었던 때에는 멀리 선제뜰은 물론 군산역으로 들어오는 증기기관차까지 바라볼 수 있는 곳이 할미산이었다.

그렇다고 해발이란 말조차 어색한 동네주변 야산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본 들녘과 장항제련소 굴뚝 등은 외부를 동경하고 상상하는 무대였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과 달리 할미산은 일종의 놀이터요, 도마뱀 등이 사는 미니 동산과 같은 곳이서 온통 당시 아이들의 공간이었단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는 최근 군산대에서 발견된 인공동굴군과도 일반적으로 맥이 닿아 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그는 일어판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읽었던 쉼터였다는 게 조종안 기자와의 만남에서 추억담으로 쏟아낸 적이 있었다는 전언이다.

울창한 대밭과 그의 어머니가 살던 집, 본가 등이 있는 곳이었지만 과거를 상상할 곳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때 그의 생가와 어머니의 생존 때 집과 혼돈하는 일도 왕왕 있었단다.

고은 시인의 어머니가 생존 할 때 살았던 집/사진=군산시
고은 시인의 어머니가 생존 할 때 살았던 집/사진=군산시

심지어 잡풀과 다른 집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하지만 최근 이곳의 상황은 방치를 넘어 버려진 공간이 된 지도 꽤 오래된 듯싶다.

그래도 이곳은 살기 좋은 양택이었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인물과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크게 변한 동네와 민가 등만으로는 그 시절의 상상력을 키워내기는 쉽지 않다.

이곳 주변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분야별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어서 그런지 관심은 여전하다.

할미산의 동쪽마을 지곡리에서는 대상그룹 회장을 지낸 고두모(1938~ ) 고문이 태어났고 서쪽에는 고은 시인, 남쪽마을 옥구읍 옥정리에서 고병우(1933~ ) 전 건설부장관 등이 은파호수 인근지역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군산고 또는 군산중학교 동문이라는 학연뿐 아니라 고향 인근에 살았다는 인연도 있다. 고 전 장관은 옥구초를 졸업했고 고병민 의병장의 후손 중 한사람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기업인, 금융인, 관계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장남이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이다.

이들이 모두 제주 고씨란 점에서 우연으로만 치부하기는 아무래도 그렇다. 이들은 은파호수를 놀이터로 삼고 청소년기 등을 보내 그런 반열에 올랐다면 고향 이상의 어떤 영험함(?)이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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