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74 ] ‘시민의 휴식공간’ 은파호수공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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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74 ] ‘시민의 휴식공간’ 은파호수공원(1)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6.03 10:33
  • 기사수정 2022-06-30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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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군산 전설 등 ‘이야기보따리 상자’… 미제지 등 ‘상상의 나래’
미제방죽 주변의 지명 유래… 세바위 전설‧ 임방절‧ 절메산‧ 사창 등
문학과 군산의 혼 노래한 고은 시인 비롯한 관‧ 재계 등 인물 즐비
은파호수공원
은파호수공원

군산대와 미룡초교 등을 끼고 있는 미룡동은 군산이 강과 바다와 관련이 있는 도시임을 보여준 곳이다.

‘용(龍)’이란 지명의 상징은 아무래도 바다 등 큰물과 인접해있거나 그 지역의 긴밀한 역사성을 지닌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군산에는 오룡(五龍)동과 소룡(小龍), 미룡(米龍) 등과 같은 동(洞) 지역이 존재한다.

유독 용(龍)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 지명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바다와 강, 호수 등을 끼고 있는 군산다운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뿐 아니다.

심지어 용문(龍門)과 용처(龍處)란 이름도 있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과거 이들 지역 중 상당수는 바닷물이 흘러왔거나 강물 등이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용문이란 곳은 이런 의미를 실감케 하는 단어다.

미룡동에 2002년 3월 개교한 용문초등학교 존재가 그런 곳이 아니겠나 싶다.

금광베네스타아파트 주변에 위치한 초등학교인데 가까이에 은파호수공원이 존재하는데다 주변엔 개천이 있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다.

이곳과 인접한 은파호수가 존재해서 주변 이름이 미룡이란 이름을 담아 작명됐는지는 모르지만 과거에는 만경강 등과 내부의 지천들과 교차해서 흐르는 민물과 바닷물이 혼재하는 곳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나운2~ 3동에서 미룡초등학교로 가는 대학로와 미성로와 연결되는 미룡육교(삼거리)를 지나기 전에 곧바로 대학로를 건너면 군산의 허파이자 시민들의 최애(最愛) 휴식공간인 은파호수공원이 존재한다.

이곳의 존재만으로 군산은 옛 전설 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는 시공을 초월하는 곳처럼 보인다. 아라비아의 민담을 얘기한 ‘천일야화’와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연상하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 아닐런지….

이런 공간 속에 태어난 대문호 반열에 오른 고은(1933~ ) 시인과 고병우(1933~ ) 전 장관, 고두모(1938~ ) 대상그룹 전 회장 등 군산 대표 인물들을 배출한 영험하고 인상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기본 내용은 조종안 기자의 보도 내용과 일부 신문 등에 다뤄진 자료들을 취합했음을 알린다.)

# ‘최애의 공간’ 은파호수… 유원지 구상 사업가 부친의 호(號) 정설?→ ‘은파’

은파호수공원의 원래 이름은 미제지(米堤池)였다.

미제지는 우리말 풀이로 쌀물방죽이다. 방죽 동북쪽 마을사람들은 절메방죽이라고도 했다. 은파(銀波)라는 이름이 지어지기 전에는 미제방죽, 미제저수지, 미룡저수지 등으로도 불렸다.

방죽둘레에 굽은 귀가 많아 ‘아흔아홉귀 방죽’으로 불리기도 했다.

‘은파’란 뜻은 달빛에 비친 물결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의미한다.

이곳의 지명이 만들어 때는 분명하지 않지만 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될 뿐이다.

은파유원지내 수상상가는 1971년 (옥구군 관할) 당시 전북농조와 사용자간 수면사용 임대계약을 체결, 총 10가구를 시설해 영업해 왔다.

이곳에 유원지 영업을 구상한 사업가 A씨가 영업허가 서류에 자신 부친의 호(號)인 ‘은파’를 붙여 군산시에 허가를 신청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1971년) 직후 군산시(당시 옥구군)의 허가를 받음에 따라 지금의 은파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운명은 199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이후에도 수년동안 7가구가 영업하는 바람에 이를 철거하려는 당국과 마찰을 빚어 당시 지역 언론의 포커스로 등장했을 정도다. 그 논란의 핵심은 호수내의 오‧폐수 유발때문이었단다. 1997년 7월 수상상가를 짓고 음식점 영업을 하면서 수질을 크게 오염시킨 상가 업주들이 식품위생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면서 영업을 중단, 은파유원지의 오염원들이 사실상 제거됐다.

이 시기에 은파수상상가가 사실상 철거돼 이곳에서의 결혼식 낭만과 추억은 사라지고 추억의 결혼 앨범으로 대체되는 수순을 밟아왔다.

당시에는 군산의 청춘남녀들의 결혼식 피로연을 이곳에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필자도 이곳 피로연장에 다녀간 적이 있다.

80년대까지 해도 은파호수공원은 오늘날과 사뭇 다른 공간이었다. 지금처럼 군산시의 중심으로 들어서지 않았던 시절에는 한적한 큰 저수지였다. 대낮에도 혼자 걷기 무서울 정도로 한적했던 곳이기도 했다.

은파관광지는 군산 시내에 인접한 낮은 구릉의 울창한 수림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표시되어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은 무려 258만여㎡에 이르는 농업용수로 활용해왔지만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그 기능 대신 주변 산과 함께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1985년에는 수상상가와 제방 아래 포장마차 등이 운영됐다가 공원으로 관리하기 위해 환경정화작업이 이뤄지면서 1995년부터 정비됐다.

넓고 잔잔한 호수는 과거 전국체전 때 조정경기장으로 활용되거나 최근엔 선수들의 연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곳은 역사와 관련된 공간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군산·옥구 출신 독립유공자 충혼탑이 세워진 7만㎡ 규모의 만남의 광장에 느티나무군락지를 조성, 국민관광지로서 면모를 더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고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군산에서도 노란색 추모의 물결이 일었고 은파호수공원에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시민들은 십시일반 조의금을 모아 같은 해 7월 푸른나무와 박석(薄石)으로 추모공간을 조성했다. 해마다 5월이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 행사가 꾸준히 열리고 있다.

군산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제작된 ‘박석(추모 글귀가 적힌 작은 돌)’은 경남 봉화마을과 군산지역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은파와 얽힌 전설들… 지명들의 유래

옛날 한 아기장수가 미제방죽을 서울터로 만들려고 100귀로 만들면 밤사이에 한 귀가 무너져 아흔아홉 귀가 돼 끝내 실패하고 울면서 떠났다는 내용의 ‘애기 장수 서울터 만들기’ 전설도 내려온다.

가장 일반적인 얘기는 ‘세바위 설화’다.

옛적에 방죽 근처에 마음씨 고약한 구두쇠 영감이 살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흙과 돼지똥을 뿌리며 내쫓았다. 이를 본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시주하니 스님은 “극락왕생하려면 아들을 업고 이 집을 떠나되 뒤를 절대 돌아 보면 안된다”고 말했다는 것.

우리 설화의 보통 스토리가 그렇듯 그런 신신당부를 지키지 못하게 돼 며느리는 길을 떠나다 정든 집과 가족 생각에 뒤를 바라보자 일대가 물로 뒤덮여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죽고 스님, 아들, 강아지마저 바위로 변했다는 줄거리다.

이런 유래만큼 지명들도 여전히 남아 있다.

*임방절= 임방절은 두 가지 설이 내려온다. 하나는 임방(壬方)이라는 의미다. 임방은 정북에서 서쪽으로 15도 정도 안쪽을 가리킨다. 절메산에서 보면 임방절이 정확하게 임방이 된다.

두 번째는 임방(任房)으로 옛날 보부상들이 어울리는 곳이라는 의미다. 임방절은 이곳에 있던 사찰 이름이다.

*별이(보리)마당=나룻리(나운리)에서 새터(한밭골)로 들어오는 어귀를 일컫는다. 미제지는 선제뜰 관개저수지로 인해 오래 전 미곡집산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전국의 미곡상들이 지역의 쌀을 각지로 유통시켰을 것이다.

돈벌이를 위해 장마당을 떠도는 등짐장수와 봇짐장수까지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 팔았던 마당이란 의미를 지닌 지명이다.

*절메산(寺山)과 새터=미제지 수면 가운데로 산이 길게 남으로 커다란 함선처럼 떠 있는 모습의 산을 가리킨다. 이곳 동쪽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제방축조공사 때 수몰됐다.

새터는 미제지 동북쪽 고샅을 ‘절메’라 했다. 그 동쪽으로 새터가 있다. 새터는 한밭골에서 새로 닦은 터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안백두게=백두게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백두게는 미제방죽과 인접한 마을로 옛 지명은 ‘백토리’였다. 백토가 어원이 변하면서 백두로 부르게 된 것이다. ‘게’는 마을이란 뜻이고 옛날에는 이곳에서 하얀 흙이 나와 그릇을 구웠다는 전한다.

*방아동=안백두게 고샅에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지금은 수몰됐지만 널찍한 밭과 공터가 있었고 산딸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한다. 그 언저리를 방아동이라 했다. 옛날 옛적에 벼를 찧는 방앗간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창골=조선시대 이곳에 사창(社倉)을 두고 방아를 찧어가곤 했던 쌀곳 마을이다. 사창은 조선시대 환곡을 쌓아둔 곳집이다. 은파호수 입구 길목 고샅(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사챙이’이라 불렀는데 사창의 와전으로 보인다.

*용처=미제지 사창골에 다다르는 산자락에서 서북쪽으로 수백미터 지점에 작은 늪지대가 있다. 이곳을 옛날엔 용처(龍處)라 불러왔다. 이곳에서 물이 솟아 방죽의 원천수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용천(龍泉)이라 부르는 얘기도 전한다.

한편 은파삼거리쪽 주차장에서 시작해 호수 중간을 가로지르는 물빛다리길을 건너 반시계방향으로 돌면 아름다운 호숫길이 있다.

이곳 주변에는 전설의 핵심공간인 ‘세바위’ 옆에 오래된 가시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가시나무 종류는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주로 자라지만 해안가를 따라서는 충남까지 올라가 자란다.  군산에서 가시나무를 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잎이 떨어지는 참나무 종류는 상수리, 굴참, 졸참, 갈참, 신갈, 떡갈 나무 등 ‘상굴졸갈신떡(상수리나무·굴참나무·졸참나무·갈참나무·신갈나무·떡갈나무)’ 6형제가 있다. 그런데 제주도와 남부 해안가에는 잎이 지지 않는 상록 참나무들도 있다.

바로 가시나무 무리다. 가시나무에서 ‘가시’는 ‘가시덤불’ 할 때 가시가 아니라 도토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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