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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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 ①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0.12 08:09
  • 기사수정 2022-01-14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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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10년이 넘도록 무관에 그치다가 제41회 봉황대기 전국 고교야구(9월)에 이어 제94회 전국체전(10월)도 우승, 2013년 시즌 2관왕을 차지한 것.

후배들의 대견스러운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봤을 김성한 한화이글스 수석코치를 2013년 10월 16일 대전 한밭종합운동장에서 만났다.

(조종안 기자)

 

기자와 인터뷰하는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사진=군산야구 100년사
기자와 인터뷰하는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어느덧 50대 중반을 넘어선 김성한(57).

20~30대 시절 그는 지금은 사라진 ‘해태 왕조’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자존심이었다. 나아가 진정한 리더였으며,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야구를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그의 야구 인생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지난날을 반추하고 ‘힐링(Healing)’하는 기회라 여겨진다. 그를 따라 추억의 운동장으로 떠나본다.

‘기록의 사나이’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김성한.

그는 해태 타이거즈(82~95) 시절 프로 원년 타점왕을 시작으로 10승-10홈런 클럽 가입, 30홈런(1988), 20홈런-20도루(1989), 1000안타(1991), 2000루타(1992), 700득점(1993) 등을 최초로 달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최다 안타 1위 두 번(1985, 1988), 장타율 1위 세 번(1985, 1988, 1989), 홈런왕 세 번(1985, 1988, 1989)을 차지했다.

투수로서도 통산 15승 10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정규 레이스 MVP 2회, 골든글러브 7회, 올스타전 MVP 1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5년 9월 24일 광주구장에서 프로무대 14년을 마감하는 은퇴 경기를 치르고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해태 군단의 붉은 유니폼을 벗는다.

땀으로 쌓아올린 찬란한 기록들을 정든 그라운드에 묻고 떠난 지 20여 년.

그럼에도 고향의 60~70대 할머니 팬들의 기억에는 ‘야구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미남선수’로 남아 있다.

 

“김성한이, 내가 잘 알지. 방맹이도 잘 때리고(안타도 잘 치고) 미남 선수였지. 어렸을 때 우리 동네 목공소집 아들하고 친구여서 놀러도 오고 그럈는디,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는개비네···.”

 

군산시 미원동에 사는 74세 할머니의 추억담이다.

 

다섯 살 때 당한 사고, ‘야구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金城漢).

그는 전북 군산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모가 평화동 ‘농방 골목’ 모퉁이에서 생선탕 전문식당 ‘신진옥’을 운영했다.

영업은 그런대로 됐으나 딸린 식구가 워낙 많다보니 살림은 항상 쪼들렸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야구와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유별난 개구쟁이였던 그는 6남매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성장한다. 다섯 살 무렵에는 야구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고를 당한다.

 

“그때 큰형(김재한)은 중앙초등학교 축구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집(식당)에는 항상 축구공이 몇 개씩 있었죠. 학교와 가까워 축구공 보관소였죠."

"하루는 형 몰래 축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식당 화덕에 올려놓은 물솥에 빠뜨렸어요. 그 공을 잡으려다 팔팔 끓고 있던 물이 쏟아져 3도 화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죠. 훗날 야구를 하는 데 지장이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흉터가 혐오감을 준다고 해서 군대도 면제받았어요. 그래서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웃음)”

 

김성한은 “사경을 헤맬 정도의 대형 사고였고, 흉터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며 엉덩이 쪽을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흉터가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한편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단다.

그는 “상처 부위가 아물기까지 수개월 동안 겪은 고통은 악몽의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군 복무 3년의 공백 없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야구 인생에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며 개구쟁이 시절을 회상했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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