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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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 ⑤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0.26 08:33
  • 기사수정 2022-01-14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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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타이거즈 입단 계약금 받고 가족회의 열어

김성한 코치 아파트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김성한 코치 아파트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김성한은 군산상고에 진학하면서 세운 목표를 동국대 4학년 때 달성한다.

그해 8월 한일은행에서 촉탁 발령을 받고 매월 20만 원을 수령하기 시작한 것.

가을에는 친구 소개로 만난 지금의 아내(박미영)와 데이트를 즐긴다. 당시 박미영씨 직업은 스튜어디스(비행기 승무원).

김성한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청소년대표와 대학선발팀 주전으로 뛰었음에도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프로팀 연봉 협상 때도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세미프로 형식으로 운영되는 팀들이어서 연봉이 많았죠."

"하지만 은행을 택했습니다."

"하루 빨리 유니폼을 벗고 은행 업무를 보면서 안정된 가정을 꾸미는 게 희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거예요. 안정된 직장(은행)이냐, 불안한 도전(프로)이냐, 갈등을 많이 했죠. 미국 프로야구를 동경할 때여서 약간 흥분도 되고. 고민 고민하다가 프로 쪽으로 마음을 굳혔죠."

"그런데 해태와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1800만 원에 계약하면서 저에게는 1200만 원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유는 국가대표 경력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어이가 없더군요."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선수로 뽑겠다는 어우홍 국가대표팀 감독의 언질(메시지)도 있었는데···, 1년이라도 태극마크를 달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30년도 더 지난 얘기인데요. 그때 1200만 원은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이었죠."

"처음으로 목돈을 쥐니까 고생하면서 살아온 형제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요."

"객지에서 아버지가 생각나면 형님을,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누님들을 그리면서 외로움을 달랬는데, 여동생도 보고 싶고···(잠시 침묵) 땀 흘려 번 돈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싶어 고향(군산)으로 달려가 가족회의를 열고 모두 큰형님 사업자금으로 드렸죠.”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아내 박미영 씨와 함께/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아내 박미영 씨와 함께/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김성한은 “극구 사양하는 큰형님을 어렵게 설득해서 건네주었다”며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결혼(1982년 10월)을 준비하느라 매월 ‘개나리 적금’을 넣고 있으면서도 ‘좋은 일’이라며 선뜻 동의하면서 격려해준 아내가 고맙게 느껴진다”고 덧붙인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한 6남매는 그날 처음으로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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