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⑥-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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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⑥-끝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0.09 08:59
  • 기사수정 2022-01-14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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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허락받고 나왔는데 대표팀 무단이탈?

1983 시즌 도루왕에 오른 김일권 선수(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1983 시즌 도루왕에 오른 김일권 선수(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파란곡절을 겪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 김일권.

그가 1982년 9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1년여 앞두고 구성된 국가대표팀(감독 어우홍,코치 김충·배성서) 숙소에서 이탈, 이듬해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잡음을 일으켰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언론들은 ‘선수촌 무단이탈’, ‘명예보다 돈을 택한 김일권’ 등의 타이틀로 보도했고,사람들은 ‘돈만 밝히는 선수’라고 손가락질 해댔다.

그러나 그의 얘기 내용은 사뭇 다르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받던 1981년 12월 어느 날 아내가 이삿날 잡았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마침 일요일이어서 어우홍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배성서 코치가 막는 겁니다."

"감독님과 김충 코치에게 외출 허락 받았다고 했더니 모멸감을 주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국가를 위해 신혼여행까지 반납해가며 대표선수 생활을 했다면서···."

"저도 처자식이 있는 놈인데,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배성서 코치와 한판 붙었죠."

"김충 코치는 말리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이해창(주장) 선배에게 ‘형, 나 대표선수 그만할래’ 하고는 그날 밤 자정쯤 보따리를 싸서 나왔죠."

"그게 지금도 회자하는 ‘대표팀 무단이탈’이에요."

"이삿짐을 나르고 다음날부터 스포츠신문들이 무책임한 타이틀로 기사를 써대는데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하고 죽고 싶더군요. (한숨)”

 

그 후 훈련에 불참한 김일권은 프로야구 입단 의사를 밝히면서 자신을 국가대표에서 제명해 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1982년 2월 20일에는 광주체육관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 결단식 및 시민 환영대회에 참석,구단주인 박건배 해태 사장으로부터 입사를 뜻하는 해태 배지를 받아 단복에 꽂는다.

사회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갈림길에 서 있는 김일권 선수’라고 소개하자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불고기 화형식’ 사건은 해태 선수 모두가 공범

300도루 달성 신문 기사 제목
300도루 달성 신문 기사 제목

김일권은 호남 팬들의 대대적인 서명운동과 한양대 자퇴,야구협회의 제명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해태는 그해 3월 31일 경기에 처음 출전한 그의 선전에 힘입어 MBC를 6-0으로 격파,프로원년 첫 승리의 개가를 올린다.

이날 그는 1회 말 톱타자로 등장 4구를 고른 뒤 3번 김성한의 우전 적시타를 틈타 홈인,첫 득점을 올린다.

1982년 시즌 동안 풀타임에 가까운 75경기를 소화하며 2할 7푼의 타율과 홈런 11개를 때려내고 도루 53개를 기록, 프로원년 도루왕에 오른다.

그의 도루 기록은 경기가 108게임으로 늘어난 1987년 선배 이해창(54개)에 의해 깨진다.

그해 해태의 최종 성적은 38승 42패로 6개 팀 중 전체 4위에 머문다.

불굴의 투혼으로 뭉친 해태 선수들은 1983년 패권을 차지한다.

그해 10월 20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코리언시리즈(한국시리즈)5차전(해태-MBC)에서 해태는 1회 말 출루한 김일권이 2루 스틸 때 볼이 빠지는 사이 3루에 안착, 안타 없이 선제점을 올린다.

기세가 오른 해태는 5회 말 김일권의 좌월 2루타 등 2안타와 포볼 1개로 2점을 추가,일찌감치 승패를 가른다.

이날 MVP는 홈런왕 김봉연.

김일권은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음에도 메리트시스템이 절반으로 줄고, 숙소도 남서울호텔에서 시설이 떨어지는 호텔로 옮기자 해태 선수들은 구단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한다.

그래서 일어난 게 1984년 4월 10일 박건배 구단주가 마련한 회식자리에서의 ‘불고기 화형식’이다.

회식에 참석한 선수들은 석쇠에 올려놓은 불고기가 새까맣게 타는데도 한 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다소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김일권이 주동해서 일어난 것으로 야구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선수 모두가 공범이었다!”고 주장한다.

 

“안타·도루는 5000원,2루타는 10000원씩 지급하는 ‘메리트시스템’과 숙소 문제로 선수들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죠."

"그때 마침 박건배 회장(구단주)이 회식자리를 마련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한 번 들이대자’는 누군가의 제의에 모두 ‘좋다!’고 하면서 앉아만 있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니 선수 모두가 주동자이고 공범이죠."

"다만 제가 젓가락 드는 것을 신호로 불고기를 먹기로 약속했으니 기수 노릇을 했던 겁니다. (웃음)"

"저와 김응용 감독 사이에 언쟁은 있었죠."

"하지만 제가 주범이 아니었다는 것은 박 회장도, 김 감독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며칠 지나고 박 회장이 부른다기에 갔더니 봉투를 하나 주면서 ‘네가 주동하지 않은 것 다 아니까 다른 생각 말고 여행이나 다녀와라’라고 하는 거예요."

"당시엔 김준환 선배가 주장이었고, 얼마 후 제가 주장을 맡았는데, 주동자였다면 구단이나 김 감독이 보고만 있지 않았겠죠."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김일권 개인의 ‘사보타주’였다는 것과 20명이 넘는 선수들과 구단 사이에 숙소와 돈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다고 알려지는 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저런 상황을 유추해보면 (해태)구단이 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저도 할 말이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니까요. (웃음)”

 

300도루 대기록 달성 후 에 실린 김일권/사진=조종안 기자
300도루 대기록 달성 후 에 실린 김일권/사진=조종안 기자

그는 내성적인 성격에도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조직문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왔다.

경기 때마다 상대 팀 투수들의 세트모션을 노트에 메모할 정도로 도루에 욕심이 많았고, 프로의식도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프로야구 최초로 300도루를 달성하고 받은 상금과 광고모델 출연료를 가정이 불우한 최연소 아마레슬링 국가대표 선수에게 장학금으로 내놓는 등 어려운 이웃에 대해 애정도 남다르다.

영욕의 순간들을 모두 그라운드에 묻고 1991년 선수 유니폼을 벗은 원조 대도 김일권.

그는 “고교 시절 꿈이었던 연·고대 진학은 진즉 물 건너갔고,감독직은 아직도 미련이 있다”며 “납치, 타의에 의한 대학진학, 선수촌 무단이탈, 불고기 화형식 주동자 등 사건이 본질과 다르게 알려져 당시엔 속이 끓어올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타고난 업보,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같다”며 허허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김일권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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