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③
상태바
[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③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9.25 07:55
  • 기사수정 2022-01-14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산남초등학교 아침조회(1950년대)./사진 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남초등학교 아침조회(1950년대)./사진 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글러브 끼면 힘이 솟고 동작도 빨라져

‘원조 대도’ 김일권(金一權).

그는 전북 군산시 둔율동(골목동네)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은 교육 행정직 공무원. 겨우 가난은 면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성격은 내성적. 수줍음도 잘 탔다.

뒷집 심술쟁이 아이가 꼬집고 때려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과 다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턱 아래 흉 자국도 그때 흔적이란다.

그럼에도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야트막한 노서산(老鼠山) 줄기를 중심으로 조성된 둔율동은 조선 시대 둔전(屯田)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둔배미’, ‘군청 고개’ 등으로 불리었다.

지명에서 나타나듯 1950~1960년대만 해도 ‘도시속의 산골’로 여름이면 뒷산의 아름드리 고목들이 하늘을 가렸고, 겨울에는 천연 눈썰매장이 만들어졌다.

특히 고갯마루의 둔율동성당과 삼천리간장공장 앞마당은 아이들이 호연지기를 키우는 산실 노릇을 해주었다.

 

“저는 1962년 군산 남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누가 짓궂게 굴어도 대들기는커녕 말도 못하는 순둥이였죠."

"그래도 야구연습을 할 때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기가 솟고 동작도 빨라졌습니다."

"4학년 때 특별활동을 통해 야구를 시작해서 투수와 3루수를 겸했는데, 그때부터 영호남 대회 2연패를 하는 등 운동장을 누볐죠. 뒷산(모시산)을 몇 번씩 오르내리는 고된 훈련도 투구와 타격연습을 생각하면 힘든 줄 몰랐으니까요.”

 

야구를 함께 시작했던 ‘스마일피처’ 송상복 씨는 “처음에는 일권이가 투수도 했던 것으로 아는데, 야구 감각도 뛰어나고, 순발력도 좋고,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내는 등 특출한 친구였다”며 “어려움에 부닥친 동료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는 등 희생정신도 강했다”고 기억한다.

그는 “말은 없지만, 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친구여서 가끔 손해를 볼 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남초등학교 야구부는 군산 시내 4개 초등학교 중 가장 강팀으로 성장한다.

선수들(11명) 연습을 눈여겨본 당시 이용일 전북 야구협회 회장과 김병문 군산남중·상고 교장은 그들을 모두 1968년에 창단한 군산남중에 특기생으로 입학시킨다.

그중 김일권, 송상복, 양종수, 조양연 등은 3년 후 나란히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1971년 군산상고(야구부 4기)에 진학해서 3학년 선배들의 ‘줄빠따(매타작)’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1, 2학년생들이 중국집에 모여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도망가자고 모의를 했겠어요."

"저는 서울로 튀었다가 사흘 만에 잡혀 와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았죠. (웃음)"

"3학년 10명이 두 대씩, 스무 대 맞으니까 얼얼하더군요. 그렇게 매타작을 당하면서 ‘반항심’이랄까, 상대에게 모순점이 보이면 따지기도 하는 등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연습은 죽어라 했죠.”

 

군산상고 3학년 때 ‘이영민 타격상’ 받아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군산상고 선수들(1970년대)./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군산상고 선수들(1970년대)./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고된 연습과 선배들의 매타작을 투지와 뚝심으로 버텨낸 김일권은 2학년 때부터 1번 타자 자리를 굳힌다.

야구 전문가들도 그를 군산상고 간판타자로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 화답하듯 시합 때마다 포문을 열면서 득점과 연결되는 장단타를 터뜨렸다. 안타를 치거나 4구를 골라 1루에 나가면 천부적인 주로 감각과 빠른 발로 상대 팀 마운드를 혼란에 빠뜨렸다.

전국고교야구 기존 판도를 뒤엎었던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 부산고와 결승전 9회 말 기적같이 일궈낸 역전 우승에도 기여하면서 고교야구 스타로 떠오른다.

그해 가을 일본 관서(關西) 지방에서 열린 한·일고교야구대항전(11월 11일~21일)에 한국고교 선발팀 일원으로 원정, 나라(奈良)팀과의 3차전 경기에서 도루 5개를 기록하는 등 호타준족의 기량을 과시한다.

1973년 군산상고는 전국규모 대회에서 4강에 한 번도 들지 못한다.

그해 5월 대통령배 대회에서 인천고와 11회 연장 끝에 4-5로 석패한 것을 비롯해 청룡기대회는 경남고에 1-3으로, 봉황대기 대회는 전남고에 0-1로, 황금사자기 대회는 8강전에서 대전고에 4-5로 패하는 등 잇달아 고배를 마신다.

그러한 부진 속에서도 한국 고교야구 대표팀에 선발되는 등 신기에 가까운 타력을 보여준다.

그는 1973년 12월 ‘이영민 타격상’을 받는다. 스승 최관수 감독이 동산고 시절 받았던 상이어서 의미를 더 했다.

1958년 제정된 이영민 타격상은 대한야구협회가 매년 3회 이상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30타석 이상 기록한 고교선수 가운데 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수여하는 영예로운 상이다.

김일권은 그해 전국대회에 4회 출전, 41타수 17안타(타율 4할 1푼 5리)를 기록했다. 그는 당시 팬레터도 많이 받았었다며 1998년에 타계한 스승을 떠올렸다.

 

“최관수 감독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죠. 고급 전술과 타법을 터득한 것은 물론이고요."

"지리멸렬했던 팀을 국내 정상 수준으로 올려놓은 지도력,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등이 놀라웠죠. 특히 ‘한문과 주산은 꼭 배워두라!’는 당부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배운 실력이 지금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가끔 옛 모습이 떠오르면서 건강하셨으면 해태 타이거즈 초대 감독을 맡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프로야구가 없던 1973년. 그해 국내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반 야구선수는 모두 235명(고교 216명, 대학 19명)이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각종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대학과 실업팀 스카우트 대상에 오른 선수는 고작 50명 안팎이었다.

따라서 170명 정도는 새로운 진로를 찾지 못하면 선수생활을 그만둬야 했다. 한편 김일권은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놓고 있었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