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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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⑤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0.05 08:42
  • 기사수정 2022-01-14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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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인터뷰하는 원조 대도 김일권./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기자와 인터뷰하는 원조 대도 김일권./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대학 진학, 군 복무 모두 납치로 시작

1976년 시즌이 끝나자 기업은행 박해종, 상업은행 김일권, 함상윤, 철도청 황태환 등 실업야구 톱클래스 선수들의 대량 이탈 현상이 일어난다.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그들의 가장 큰 이유는 실업팀 선수로 보람을 찾을 수 없고, 더욱이 고등학교 졸업장으로는 은행원 장래가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언론들은 금융기관의 소극적인 운영방침이 선수들의 이탈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상업은행 유백만 감독의 동의를 얻어 연세대를 희망했던 김일권은 입학시험(1977학번)에 대비, 체력장 테스트를 끝낸 상태였다. 아버지의 강압으로 포기했던 대학 진학의 꿈이 이루어지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해 12월 콜롬비아에서 개최되는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 다녀와 연세대 이재환 감독과의 만남도 약속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 이튿날 새벽 상업은행 숙소에서 납치를 당한다.

 

“을지로 6가에 있는 다방에서 이재환 감독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새벽 4시쯤 납치를 당했습니다."

"체격이 우람한 청년 몇 명이 끌고 가는데 ‘아야~’ 소리도 못 냈죠."

"코로나 차에 싣고 잠실 어느 아파트(한양대 스카우트부장 자택)로 데려가 하루 재우더니 소공동에 있는 호텔 스위트룸에 가둬놓고 청년들이 보디가드 식으로 지키면서 끼니때 밥만 쓰~윽 넣어주는 거예요."

"연세대 입학원서 제출 기간 2~3일 지나서 풀어주는데 눈앞이 깜깜하더군요.”

 

타의에 의해 한양대 선수로 등록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감을 프로정신으로 버텨낸다.

강한 정신력으로 연습에 돌입 그해(1977) 대학 춘계리그에서 홈런왕(9개)을 차지한다.

5월에는 미주(美洲)에 원정할 대학야구선발팀(감독 김진영)으로 뽑혀 인천에서 합숙훈련에 들어간다. 당시 나이는 스물둘, 어느 날 갑자기 징병 신체검사 받으라는 통지서가 날아든다.

 

“합숙훈련을 받는데 군대 신체검사 영장이 나온 겁니다. 김진영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군대는 무슨 군대야, 안 돼!’라고 하시면서 가더니 3개월 연기해놓고 오시더군요."

"그래서 미주 원정(6월 29일~7월 22일)을 무사히 다녀왔죠. 제가 홈런도 몇 개 날리고, 원정 통산 14전 9승 1무 4패로 성적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백호기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끌려가 군복을 입었죠."

"하루는 심말룡 육군야구단(경리단) 감독이 잠깐 보자고 해서 갔더니 지프에 타라는 거예요."

"아무런 생각 없이 올라탔죠."

"지프가 방향을 잡고 속력을 내는데 이상해요. 자세히 보니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기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더니 한 시간 남짓 지나서야 목적지가 논산훈련소라고 하는데, 어이가 없더군요."

"어쩔 수 없이 4주 훈련받고 올라왔죠. 그래도 대접은 잘 받았습니다. 머리도 1주일이나 지나서 깎고···. (웃음)”

 

졸지에 육군야구단 소속이 된 김일권은 1977년 11월 니카라과 마나과 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회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김봉연을 3번, 장효조를 5번에 두고 4번 타자로 기용되어 한국야구가 역사상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주역이 된다.

야무진 타격과 재치 넘치는 베이스 러닝으로 국가대표팀 톱타자로 자리를 굳힌 그는 1979년 리그 롯데와의 경기에서 1게임 도루 6개의 한국 최고기록을 세운다.

1980년 3차 리그에서는 소속 경리단이 1승 2패로 부진했음에도 홀로 5할대 타율을 지키면서 체면을 세운다.

1980년 6월 제대 후 한양대 복귀를 거부하고 실업팀(포항제철) 입단을 희망한다.

하지만 등록규정에 묶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1년 5월 한양대 선수로 등록한다. 당시 김일권을 입단시키려던 포철 허정규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양대를 졸업하면 다시 포철에 온다는 조건으로 김일권의 한양대 등록을 승인했다’고 밝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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