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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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 ④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9.28 07:42
  • 기사수정 2022-01-14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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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 후 최관수 감독을 헹가래치는 군산상고 선수들(출처: 한국야구사)
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 후 최관수 감독을 헹가래치는 군산상고 선수들(출처: 한국야구사)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71년 전국체전 우승에 이어 이듬해 2관왕을 차지, 호남에 야구 붐을 일으키며 국내 정상급 팀으로 자리매김한다.

경기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방전, 투지와 끈기로 접전을 펼치면서 팬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1971년~1972년, 그 짧은 기간에 놀라운 저력(우승 3회, 준우승 1회)을 보여줬음에도 선수들 진로는 불확실하기만 했다.

 

“나는 김일권의 진로를 놓고 당시 한일은행 김응용 감독과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김응용 감독은 김일권을 원했고 나는 양기탁과 함께 입행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중략)"

"김응용 감독은 애써 노력했지만, 한일은행은 김일권 한 명밖에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김 감독은 며칠 뒤 ‘죄송합니다. 김일권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김일권과 양기탁은 함께 상업은행으로 갔다···.”

 

위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이 ‘중앙일보’에 52회(2003년 3월 31일~6월 12일)에 걸쳐 연재한 <白球와 함께 한 60년>에서 김일권 관련 회고다.

이 전 총재대행 회고대로 1973년 10월 5일 치 <경향신문>은 김일권을 한일은행 스카우트 예정자로 보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 스카우트 제의는 금융팀이 아닌 고려대였다”며 자신 또한 고려대를 희망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연·고대 진학이 목표였는데, 마침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아, 내년에는 연고전을 뛰겠구나!’ 하고 가슴이 부풀어 있었죠."

"근데 아버지가 한사코 반대하시는 겁니다. 그때 처음 아버지에게 말대꾸했고, 귀싸대기도 맞았죠."

"아버지는 ‘네가 대학에 가면 용돈을 댈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대학에서 스카우트비랑 장학금 받으니까 용돈은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 저보다 조금 처지는 선수를 한두 명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니까 학교에서 아버지를 통해 상업은행으로 유도했던 겁니다.”

 

일본 진출 좌절 후 대학캠퍼스 더욱 그리워져

국내 최고 대학스포츠 축제인 연고전(고연전) 출전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던 김일권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상업은행으로 진로를 정한다.

 

“결국 상업은행(감독 장태영)으로 마음을 정하고, 입행 동기생 9명이 장태영 감독에게 인사를 갔죠."

"근데 대뜸 집 주소와 가족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고 하는 거예요."

"모두 놀랐죠."

"저하고 양기탁 둘만 써냈는데,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중앙 일간지 사설을 골라 노트에 옮겨 오라는 숙제를 내더군요. 그것도 매일."

"연습 끝나면 숙소에서 한자투성이인 사설을 적느라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생활의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필체 좋다는 칭찬도 듣고요. (웃음)”

 

상업은행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는 1975년 추계연맹전 타격왕(타율 4할 6푼 2리)에 오르면서 상업은행을 12년 만에 우승(7승 1패)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대회가 끝나자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팀 가네다(金田正一) 감독은 언론을 통해 김일권, 장효조, 이선희 등을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밝힌다.

가네다 감독은 한국계로 제2의 장 훈, 백인천을 스카우트하겠다고 해서 관심을 끌었다.

당시 팬들은 한국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체육계 역시 한국야구 사상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한 백인천 선수도 1962년 병역 특혜를 받아 출국한 전례가 있어 가네다 감독이 탐내는 선수들에게도 병역 특혜를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여망이었다.

그럼에도 김일권은 병역법에 묶여 꿈을 접어야 했다. 일본 진출이 좌절되자 대학 캠퍼스가 더욱 그리워졌다.

 

상업은행 시절(1975) 태극마크 달고 이선희 선수와 미국행 비행기에서./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상업은행 시절(1975) 태극마크 달고 이선희 선수와 미국행 비행기에서./출처=군산야구 100년사

 

“1974년~1976년까지 상업은행 소속이었는데, 대학 진학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체육 특기자 혜택 기간이 3년이었거든요. 상의할 사람은 없고, 속만 태우다가 하루는 장태영 감독님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단칼에 ‘안 돼!’라고 하시더군요."

"해서 ‘감독님은 옛날에도 명문인 서울대학 나오신 것으로 아는데, 왜 저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당돌하고 건방졌죠. (웃음)”

 

김일권은 상업은행 소속 3년의 마지막 무대를 통렬한 대역전 홈런으로 장식한다.

1976년 10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추계실업야구 연맹전 마지막 경기(상업은행-한일은행)에서 9회 초까지 두 점(0-2)을 리드당하다 9회 말 주자 1, 3루 상황에서 한일은행 에이스 주성노의 두 번째 볼을 받아쳐 끝내기 3점 홈런을 터뜨린 것.

승리를 목전에 두고 안도의 숨을 내쉬던 김응용 한일은행 감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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