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의 의미
쟁반같이 둥근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정월 대보름. 우리네 조상들은 일 년 중 가장 밝은 보름달이 뜨는 이날을 설날만큼이나 중요시했다. 풍물놀이와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였고, 다양한 민속놀이로 화합을 도모했다. 묵은 근심·걱정을 모두 털어내고 희망찬 새 출발을 다짐했던 것.
설날부터 풍물패가 조직돼 마을 곳곳을 돌며 악귀를 쫓아냈다. 당산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우물가에서는 칠년대한 가뭄에도 물이 솟구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마을행사가 끝나면 집집을 돌며 스며든 잡귀를 쫓아내고 가족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풍물패는 보름까지 이어졌으며 복을 기원하기에 앞서 사람들에게 신명을 돋궈주고 새해 풍요와 희망을 안겨주는 마을 잔치로 시작했다. 또한, 풍물패가 보름 동안 돌면서 거둔 쌀과 돈은 동제나 당산제 등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 음식을 만들어 모두가 나눠 먹었다.
대보름은 밥(오곡밥)도 아홉 번, 나물도 아홉 가지에 찬 음식을 먹는 날이기도 했다. 특히 제삿밥을 여럿이 나눠 먹는 옛 풍속에서 비롯된 '백가반(百家飯)'을 즐겼다. 그래서 이집 저집으로 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대보름날 여러 집에서 얻어온 오곡밥을 먹으면 그해 건강하고,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으며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오곡밥은 장수를 상징했다. 따라서 밥 얻으러 다니기는 열 살 안팎의 아이가 많았다. 보름날 아침이면 누덕누덕 기운 옷차림으로 얼굴에 숯검정을 바르고 쭈그러진 양재기나 깨진 바가지, 소쿠리 등을 들고 밥을 얻으러 다녔다. 거지옷차림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대문 앞에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대목이 들어가는 <각설이타령>을 부르기도 하였다.
‘쥐불놀이’
그 시절 대보름은 그야말로 하루가 풍성하고 즐거웠다. 어른들은 이른 아침부터 밥 얻으러 다녔고, 아이들은 풍물패를 따라다녔다. 전날 잠자리에서 부럼을 깼고, 새벽에 일어나 동생과 누나에게 더위를 팔았다. 어머니가 시루에 정성 들여 쪄낸 찰밥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먹었고, 귀밝이술을 마셨으며, 쥐불놀이에 쓸 잡목을 주우러 동네방네 골목길을 휘젓고 다녔다.
구멍이 숭숭 뚫린 깡통에 불쏘시개와 잘게 자른 장작, 솔방울 등을 한줌씩 넣고 힘차게 돌리면 불꽃이 원을 그리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깡통을 힘껏 돌리다가 불꽃이 최고로 올라왔다 싶을 때 공중으로 던지면 장관을 이뤘다. 여럿이서 동시에 던지면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땅으로 쏟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춤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농촌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논두렁 밭두렁의 마른 풀에 불을 놨다.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쥐를 잡고, 잡초에 붙은 해충의 알을 태워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불을 '쥐불'이라 했다. 불이 잘 타오르도록 짚을 깔았는데, 타다 남은 재는 다음 농사에 거름이 됐다. 특히 아이들 불장난(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등)은 겨우내 이어졌고, 논바닥에 쌓아놓은 볏단을 홀랑 태워먹어 소동을 빚기도 했다.
달집태우기 현장에 소방차가 출동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말뚝이와 장난치는 재미로 배고픈 줄 모르고 풍물패를 따라다녔던 일들이 아련하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과 가치를 달리한다. 하지만, 조상들의 삶과 얼이 깃든 세시풍속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 그래서일까. 건강한 문화와 풍습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 또한 의무이자 축복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끝)
※위 원고는 필자가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와 <디지털군산문화대전>(2012) 등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