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說'] ‘질곡의 역사’ 잘 견뎌낸 전통명절 ‘설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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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과 '說'] ‘질곡의 역사’ 잘 견뎌낸 전통명절 ‘설날’(4)
  • 글=조종안 기자(향토사학자)
  • 승인 2024.02.11 08:23
  • 기사수정 2024-02-1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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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아침 차례지내는 모습(2010년)./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 설날 아침 차례지내는 모습(2010년)./사진=조종안 기자 제공

전통 문화유산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

서울올림픽이 개최됐던 1988년 한국갤럽이 집계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신정을 설로 여기는 사람은 11%에 불과했다. 구정을 쇠는 사람은 84%, 신·구정 모두 쇠는 사람은 3,1%였다.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그래프이기도 하다.

1989년 이전에는 고유의 명절 설이 신정(新正)·구정(舊正)으로 나뉘어 차례를 지내는 바람에 친지와 새해 인사를 나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어느 설을 쇠느냐로 가족 간에 다툼이 일기도 하였다. 직원이 상사에게 언제 인사하러 가야 좋을지 고민하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정부가 설 전후 3일을 연휴로 정하자, 대기업과 공단의 중소기업들은 5일~7일의 휴무와 함께 직원들에게 특별보너스를 지급하였다. 달아오른 명절 분위기에 편승해 많은 사람이 유명 관광지와 휴양지를 찾았다. 여행 자유화 물결에 힘입어 동남아를 찾는 여행객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경제성장과 함께 찾아온 설연휴는 삶의 패러다임도 바꿔놓았다. 설이 가까워지면 설악산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 유명 관광지와 스키장 부근 호텔은 예약이 넘쳐났고, 설 전날 외국여행 떠나는 사람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여행지 호텔에서 차례 지내는 사람도 느는 추세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도 필요하고 여행도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렵게 되찾은 소중한 전통 문화유산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보릿고개 시절(50~60년대) 설 풍경

설날 아침, 신작로에 나가면 색동저고리 차림의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세배 다니느라 분주하게 오갔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덕담을 주고받으며 새해 인사를 나눴다. 젊은 부모 손을 잡고 세배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때가 새롭다.

아이들은 값싼 '고리땡' 바지도 “엄니(어머니)가 사준 옷”이라며 자랑하면서 입고 다녔다. 그런데 나는 새 옷차림으로 나가기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무섭고 창피했다. 해서 어머니가 '양키시장'에서 맞춰준 새 옷을 구겨 입고서야 대문을 나설 수 있었다.

대목을 만난 만화방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하꼬방(판잣집)식 점포에서는 딱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동그란 종이를 떼면 뒤에 적힌 번호대로 가져가는 풍선 떼기, 어쩌다 큰 풍선이라도 떼게 되면 올림픽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은 화약 딱총이었다. 오돌오돌한 종이를 찢어 화약가루를 넣고 방아쇠를 당겼을 때 '빵!' 하고 터지는 소리 크기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화약을 너무 많이 넣어 손을 다치는 아이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널뛰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삔치기 등을 하였다.

그중 '다마'(유리구슬) 따먹기, 땅바닥에 다섯 개 홈을 파놓고 하던 '뎅까'(구슬 놀이), 고무줄놀이(헤비상) 등은 왜놈들이 남기고 간 놀이문화의 잔재로 여겨진다.

팽이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사금파리 놀이), 연날리기, 꽁꽁 언 논바닥에서 썰매 타기, 양지에서 모닥불 피우기, 설 특선 영화관람 등 하루가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 정성이 담긴 설빔과 음식,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얼음조각도 놀이기구가 되었던 그때가 그립다.(계속)

※위 원고는 필자가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와 <디지털군산문화대전>(2012) 등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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