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3.5 운동' 기폭제 역할 영명학교 출신 삼산 김병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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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3.5 운동' 기폭제 역할 영명학교 출신 삼산 김병수 선생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2.21 11:21
  • 기사수정 2023-02-21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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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으로 건네받은 독립선언서 모교 박연세에 전달
해방 후 초대 이리부윤· 한국전쟁 땐 군의관으로 참전
학창시절(좌)과 노년의 김병수 선생/사진=군산시
학창시절(좌)과 노년의 김병수 선생/사진=군산시

[군산 3·5 만세운동: 군산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중· 여고), 구암교회 교인,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

- 중략-

시위는 이후에도 28차례에 걸쳐 계속되어 시민 3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한강 이남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그 의미가 크다.]

-위키백과 내용 -

군산 3.5만세운동과 관련된 핵심 인물 중 한분은 삼산(三山) 김병수(1898~ 1951) 선생.

군산 3.5만세운동과 이리 4.4만세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삼산은 정치가· 교육사업 등에 헌신한데 이어 한국전쟁 땐 5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자랑스러운 전북인이었다.

하지만 영명학교(군산제일고의 전신) 출신인 삼산은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에 불씨를 놓은 독립운동가이지만 군산에선 그의 업적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존재다.

왜 그랬을까.

영명학교 출신인 그는 3.5만세운동의 주역이자 군산야소병원(궁멀예수병원)에서 근무하는 큰 인연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김제 출신인데다 주로 익산에서 의료· 여성교육분야에서 활동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삼산 김병수.

1898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의 유력한 ‘김해 김씨’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군산선교부의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 일행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전킨 선교사 일행이 익산과 김제 등에서 활발하게 순회전도하던 때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김연식(당숙)과 부친(김장호) 등 그의 집안어른들은 1908년 유강리에 신명학당을 세우고 후학을 육성한다. 이곳에서 주로 신학문은 물론 한문, 역사 등을 통해 독립사상 고취에 앞장서왔다. 이 학교는 일제말 폐교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해방 후 복교와 함께 공립학교인 치문초등학교(치문은 부친 김장호의 호)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 스승 박연세와 만남… 동향· 사제지간 등 깊은 인연

그가 항일운동에 나선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민족주의적인 집안 분위기와 기독교 입문, 스승 박연세(1883~ 1944)와 만남 등은 그를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의 전면으로 이끌었으리라!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던 박연세는 군산선교부가 세운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자신의 고향 인근에 있는 유강리 신명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제자 김병수와 인연이 시작됐다. 이 시기에 박연세는 후학양성 뿐 아니라 15리가 넘은 지금의 익산시 모현동 소재 이리고현교회에 나가 성경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런 열념과 실력이 알려지자 그의 모교인 영명학교는 박연세를 교사로 초빙, 군산으로 이주했다.

삼산은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고 상급학교인 군산영명학교로 진학하게 됐는데 이곳으로 먼저 이사와 교사로 근무하던 스승 박연세와 재회한다.

이들은 두 번의 사제 인연을 맺을 정도로 각별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삼산이 3.1운동 기간에 박연세 선생과의 긴밀한 만남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 한강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 숨은 주역… 군산 3.5 및 익산 4.4만세운동 등에 기여

삼산은 영명학교를 마치고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는데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1919년을 맞게 된다.

세브란스 의전에 다니던 그는 세브란스병원 제약실에서 근무하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군산지역 연락책임을 맡아들라고 부탁을 받고 실행에 옮긴다. 한마디로 서울과 군산의 연락책임자를 맡게 된 것.

우리가 아는 군산 3.5독립만세운동의 서막이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그해 2월26일 먼저 특별한 인연이자 존경하는 스승 박연세를 찾아 3.1운동과 관련된 서울 움직임을 알리고 거사 준비해줄 것을 요청하고 곧바로 상경했다.

이틀 후인 28일 독립선언서 200여매를 스승(박연세)에게 전달했고 막후에선 박연세가 동료교사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등과 만나 만세운동에 착착 준비했다. 당초 거사일은 3월6일이었다.

하지만 거사직전에 일경의 습격을 받아 박연세와 이두열 등 교사들이 체포됐고 이에 다른 교사와 학생 등이 경찰서로 향해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에 나섰다. 여기에다 멜본딘여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가세하게 됐다.

이 시위여파는 4.4 이리만세운동으로 확산됐을 뿐 전북도내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 수형생활 후 학업을 마치고 의료인 변신

만세운동 후 체포된 삼산은 서대문형문소에서 1년 3개월 복역했다. 이후 학업을 마친 뒤 1921년 군산야소병원(예수병원)에서 인턴을 거쳐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했다.

사재를 털어 이리 광희여숙을 설립했고, 이리제일교회에서 장로 장립(1924년)된 이후 신앙인으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물론 이리 YMCA 설립과 구제활동에도 앞장서왔다.

모진 고통의 생활을 경험한 후 해방을 맞았다. 건국준비위원회와 독립촉성회 등에도 활동했지만 애초 설립 취지와 다르게 변하자 건준과는 결별했다.

1947년 4월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하자 초대 부윤(시장)으로 취임했고 한국전쟁 땐 부산으로 피난가서 제5군 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도 활동했고 수복후 구국총력연맹 위원장으로 국가재건에 힘을 쏟았다.

1951년 결핵이 악화되자 이겨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정부에서 198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을 추서했다.

삼산의 아들 김신기와 며느리(손신실) 의사부부는 오랫동안 한센인 마을에서 봉사에 앞장, 아산사회봉사상(2014년)을 수상하는 등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으로 존경받아왔다.

한편 김병수 선생이 개원했던 삼산의원 건물은 한국무진회사, 국민은행 등으로 사용되다 2005년 6월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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