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6주년 특집] ‘근대기 파란 눈의 선교사’ 공적 기리자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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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6주년 특집] ‘근대기 파란 눈의 선교사’ 공적 기리자 (下)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8.15 06:30
  • 기사수정 2021-08-16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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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학교 설립 통한 서양 스포츠‧ 문물 등 전래… 채금석 선생 등 활약 계기
영명학교‧ 멜본딘여학 등 중심이 돼 한강 이남 항일운동 중심 역할 톡톡
항일운동 숨은 조력자 당시 윌리엄 린튼 영명학교장 등 선교사들 앞장

군산에 온 선교사들의 왕성한 활동은 근대학교 설립 등을 통한 근대사상과 근대문화(문물) 전래에 앞장, 낡은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는 등 대변혁의 시대로 이끌었다.

군산지역의 경우 기독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근대학교가 호남권에서 선도적으로 들어섰을 뿐 아니라 여학교, 소학교 등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설립됐다.

이들 학교는 서구의 근대사상은 물론 각종 스포츠와 문물의 전래 창구로도 작용했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 기념비. / 사진= 투데이군산
전킨과 드루 선교사 기념비. / 사진= 투데이군산

 

미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위렴은 1903년(광무 7) 2월 구암동에 영명학교를 설립했다.

물론 초기에는 정식학교 형태는 아니었지만 얼마 후 소학교와 중학교를 분리하여 중학교를 영명학교, 소학교를 안락소학교라고 칭했다.

전위렴은 1892년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내 최초로 축구를 보급했는데 이 경험을 살려 영명학교에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또 멜본딘여학교에는 정구코트를 만들어 정구보급에도 힘을 쏟았다.

성산면에서 영명학교 근처로 이사 온 채금석 선생(작고)은 초등학교 시절 선교사들의 축구경기를 보고 매료돼 전국적인 축구선수로 뿐 아니라 축구지도자로서 우뚝 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명중학교 선수 시절 군산지역 최초 체육단체인 평화구단선수로 뛰었고, 전국규모 축구 대회(1922년, 1923년, 1924년)에 연속 출전해 이름을 날렸다.

실력을 인정받아 1925년 서울 경신 중학에 진학, ‘라이트 윙’으로 제 9회 및 제 10회 전 조선축구대회 2연패와 제3회 전 조선축구대회 우승 등 수많은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서 배운 근대정신은 항일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야구도 이 시기에 영명학교에서 시작됐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최초로 야구를 도입한 필립 L. 질레트 YMCA선교사와 시기별로 볼때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군산 최초 야구인은 양기준(梁基俊: 1896~1975)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전킨 선교사의 야구 보급과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현 구암동)에서 태어난 그는 영명중학교 야구부에서 선두타자로 활약했고, 오늘날 군산야구의 위상을 만든 모태이자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군산에서 야구와 관련된 경기 자료는 적지 않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의 탄생은 거의 유사한 흐름을 갖고 있다.

전킨의 부인 메리 레이번선교사는 지금의 멜볼딘여학교와 인연이 큰 사람이다.

이곳에서 졸업한 이들은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에 벗어나 근대학문과 근대사상을 배워 새로운 시대를 열고 향후 항일운동에 헌신하는 자양분이 됐다 할 수 있다.

# 항일의 숨은 조력자… 항일운동의 정신적 토대

군산 3.1운동 100주년기념관의 내용.(사진= 군산시제공)
군산 3.1운동 100주년기념관의 내용.(사진= 군산시제공)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거족적인 궐기가 꿈틀거렸는데 1차대전 후 미국 월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 사건이 3.1독립만세운동.

근대사상에 눈을 뜨고 새롭게 무장한 군산의 선각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가 처음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있는 영명중학교 교사 박연세, 이두열 등에게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1일이었다.

영명중학교는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교원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등은 서울 기독교 계통의 지도자들과 전부터 연락을 지속해 왔다.

군산의 3·1만세운동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박연세와 김병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영명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친 김병수는 영명학교의 교사였던 박연세의 추천을 받아 세브란스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을 만나게 된다.

만남 이후 이갑성은 김병수를 군산지역 연락책임자로 독립선언서 전달 임무를 맡겼고 이로 인해 군산 또한 거사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군산의 상황이 서울의 독립운동 대표자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었다.

특히 교사인 박연세는 3·1만세운동 적극 가담 교사들과 자주 만남을 갖고 세부실천계획을 만들고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했다.

서울에서 온 청년학도 김병수로부터 선언서와 함께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이두열, 김수영, 박연세 등은 같은 학교 교사 등과 의논해 3월 6일 서래장날을 기해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를 챈 일경 10여 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해 학교 건물 안을 샅샅이 수색했고 등사기와 태극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각종 문서 등이 발견되면서 박연세와 이두열이 끌려가게 된다.

이 여파로 전북과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군산만세시위운동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지지를 호소한 윌리엄 린튼(1891~ 1960)은 당시 영명학교 교장이자, 국권회복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그가 떠난 50년 뒤 2010년 3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당시 군산예수병원과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등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에서 린튼 영명학교 교장 이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암묵적인 동참과 함께 지지를 했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말 되새겨야

군산과 전북 등지에서 활동한 윌리엄 린튼과 같은 선교사들은 적지 않다.

기독교 선교활동은 당시 한적한 군산지역이 근대문물과 사상으로 무장하는 청량제였다. 이중에서 서양식 근대학교를 세운 선교사와 학교 설립에 헌신했거나 근대의학을 전파해온 인사들도 엄청나다.

그 시절 항일운동을 앞장선 우리 선각자들은 이미 훈‧ 포장을 받았지만 선교사로서 근대학문을 체계적으로 전달할 학교설립과 문물 전래는 물론, 숨어서 항일운동을 조력한 선교사들에 대한 공적정리 작업은 지극히 미진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힘과 에너지가 한데 뭉쳐서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난 동력으로 작용했는데도… 

우린 그들의 노고를 오랫동안 잊어버린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이들의 활동상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공적 등을 기리는 일에 지혜와 아이디어를 모아야 할 때다. 군산시든지, 아니면 지역사회든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이들의 노력과 열정이 이어지고 승화할 수 있도록 하는 계승운동을 하는 것도 우리의 뼈 아픈 근대기를 되새기고 미래를 새롭게 여는 동력과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시급한 일이다.

이제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내년이든지, 혹은 광복 80주년까지라도 지역사회와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이 나서서 그들의 항일이든지, 문화 및 의료봉사 등과 같은 공적을 기리고 그 내용에 따른 정부차원의 훈‧포장 수여 노력도 아울러 경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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