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直觀] 고군산군도의 900년전의 이야기…‘바다 위의 성, 군산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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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 直觀] 고군산군도의 900년전의 이야기…‘바다 위의 성, 군산군도’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2.18 14:45
  • 기사수정 2023-12-18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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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익산박물관 특별전 12일부터 내년 4월28일까지 기획전 개최
총3개 전시… 바다 위의 산· 바다 위의 쉼터· 바다 위의 울타리
송나라 서긍 1123년 고군산군도 20일 방문… 고려도경의 기록
시대별 고군산군도 입지. /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촬영
시대별 고군산군도 입지. /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촬영

얼마 전, 군산의 900년전의 이야기를 다룬 특별전에 다녀왔다.

그 특별전이 ‘바다 위의 성, 군산군도’다.

국립익산박물관은 12월 12일부터 2024년 4월 28일까지 이곳의 기획전시실에서 이번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여기에서 군산군도는 유인도 16곳과 무인도 47곳으로 이뤄진 섬의 군락인 고군산군도의 옛 이름.

‘군산(群山)’이란 명칭의 유래도 궁금했지만 그 시대의 ‘군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에 꽂혀 여름비처럼 쏟아지는 겨울비 내린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았다.

# 당시 (고)군산군도의 역사적인 위치… ‘바다 위의 성’

이번 특별전은 선사부터 근대까지 섬의 변화와 함께 900년 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단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군산군도를 조명하는 전시다.

이 전시에서 수도 개경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했던 고군산군도의 지리적 입지(또는 지정학적 위상)를 설명하고, 고려시대 섬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영상 등을 보여준다.

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유래부터 고군산군도가 가장 주목받았던 시기, 바다를 굳건히 지켜온 역할 등을 230여 점의 유물들을 중심으로 찬찬히 풀어낸다.

‘1123년’이란 해는 군산의 모습은 물론 동북아 주요국가의 국제질서는 어떠했을까.

우리 고려는 ‘인종 원년(14세에 왕위 오름)’이어서 만주와 몽고, 한족 국가 등간 정세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고려의 경우 요나라와 민족적인 혈투를 끝으로 약 100년간의 황금시대였을 뿐 아니라 동북아 질서의 대변화가 잉태된 시기였다.(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다.)

패권이 고려- 요나라- 북송에서, 고려- 금나라- 남송 중심으로 바뀌는 때였다.(북송은 서긍의 고려 방문한 4년 후인 1127년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상황을 맞는다. 한마디로 북방세력의 중심세력이 요에서 금나라로 넘어간다.)

당시의 상황은 참고로 북송(北宋)은 휘종 23년, 금(金) 태조 9년이자, 태종 원년이기도 하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이 지금의 고군산군도를 거쳐 개경을 방문해서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 정식 명칭 선화봉사고려도경)’ 속 기록을 통해 우리 군산의 900년전 모습이 속살처럼 드러난다.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촬영한 고려도경.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촬영한 고려도경.

이 시기, 고군산군도의 입지는 대단했다. 국제도시이자, 송나라 등과의 교류하는 외교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 서긍은 당시 군산군도를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과 같다’고 표현했다.

‘바다 위의 성’에서는 군산군도가 역사상 가장 주목받았던 고려시대를 살펴봤다.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과 함께 기록에서 표현된 과거 섬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영상, 12세기 고려청자 등을 보여준다.

고군산군도는 수도 개경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위치에 있고, 인근 바다에서는 침몰한 배의 흔적이 확인된다.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수중 발굴품과 유적 출토품은 섬의 교류적 가치를 잘 보여주는 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십이동파도, 비안도, 야미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고려청자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번 전시는 총 3개 주제로 구성됐다.

바다 위의 산

오늘날 군산 앞바다에는 63개의 크고 작은 섬이 존재하지만 과거의 바다는 지금보다 더 육지 깊숙이 들어와 더 많은 섬이 존재했었다.

해안가에서 바라본 바다의 섬들은 마치 산과 같았고 이 모습은 오늘날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상용되고 있다. 이른바 ‘군산(群山)’이다.

‘바다 위의 산’에서는 선사시대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소개한다. 군산에 다수 존재하는 패총에서 발견된 일상생활품을 비롯해 금강과 만경강을 통해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한 문화 교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군산군도의 원통모양토기.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고군산군도의 원통모양토기.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고군산군도의 청동기 문물 전래.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고군산군도의 청동기 문물 전래.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바다 위의 쉼터

고군산군도 출수청자(고려 십이동파도).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고군산군도 출수청자(고려 십이동파도).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900년전 군산도는 여러 섬이 둥글게 존재하여 많은 배들이 바람을 피해 머무를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군산도의 자연환경을 이용해 외교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사신 뿐만 아니라 여러 물건을 실은 배들은 이곳을 통해 자유롭게 이동했다.

뱃사람들은 거센 바람을 피해 머무르며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다래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곳은 찾아오는 구에게도 개방된 섬이자, ‘바다 위의 쉼터’였다.

그런 대표적인 형태가 제사를 지낸 오룡묘다.

오늘날 선유도의 오룡묘. /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촬영
오늘날 선유도의 오룡묘. / 사진= 국립익산박물관 촬영

고려도경에 기록된 오룡묘는 선유도 망주봉의 작은 봉우리 남쪽 끝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두 채의 작은 당집이 지붕을 맞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섬 주민들은 앞의 당집을 오룡묘 혹은 ‘아랫당’이라고 부르고 뒤쪽의 당집은 ‘윗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근 섬의 당집들이 고기잡이의 풍어와 뱃사람들의 안전만을 기원하는 곳이었다면, 이곳 오룡묘는 풍어보다는 먼 외국으로의 뱃길에 안전과 무역에서의 성공을 기원하는 곳이었다.

바다 위의 울타리

고려 말 군산도는 왜 등의 침략으로 큰 패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군산도에 있었던 군산진은 조선 초 육지로 옮겨 진포에 새로 설치됐다. 조선 16세기 이후에는 해적들이 횡포를 부려 이를 막기 위해 군산진을 추가로 설치하고 고군산진이라고 불렀다.

 

고군산진은 바다의 적에 맞서 섬사람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구한 말 국권을 상실하면서 고군산진은 무너져 내려 오늘날에는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한때 조선 최대 수군진영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고군산군도가 유배지가 된 배경, 유배를 왔던 주요 인물 등 상반된 역사도 설명한다.

16세기 말에 제작된  군산이우도.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16세기 말에 제작된 군산이우도. / 사진=국립익산박물관 촬영

특히 16세기에 그려진 회화 작품 가운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진 ‘군산이우도(群山二友圖: 임진왜란기 화가와 선비간의 우정을 다룬 그림)’는 내년 2월까지 약 3개월간 특별히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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