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서수농민항쟁 下] "사라질 위기에 놓인 농민항쟁 유적지 보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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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서수농민항쟁 下] "사라질 위기에 놓인 농민항쟁 유적지 보존해야"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2.13 10:50
  • 기사수정 2023-12-14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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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항쟁 기억의 장소들… 이용휴 가옥· 서당채(농민야학) 등 멸실위기
수원고등농림 학생들의 ‘건아단’ 활동과 김영현 선생 관련 여부도 과제
34명의 농민항쟁 유공자 관련 자료· 공적 모은 역사관 만들어야
이용휴 선생의 옛 집(이용휴가). / 사진= 서수면사무소 제공
이용휴 선생의 옛 집(이용휴가). / 사진= 서수면사무소 제공

옥구서수농민항쟁은 우연히 일어난 항일투쟁은 결코 아니었다.

구한말 이곳의 정신적인 지주인 이용휴 선생의 지조와 그의 서당에서 교육을 받고 옥구농민항쟁의 주역으로 거듭났거나 그런 지역의 분위기가 농민야학 운동 등으로 승화됐을 것임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이용휴 선생의 지조를 듣고 배운 이곳 출신들이 당시 일제강점기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으로 일제와 일인 농장주와 맞섰을 것이다.

선비 정신과 당시 지식인들은 시대적인 고뇌와 농토를 침탈당한 농민사회의 대변자로서 나서면서 농민소작투쟁의 서막은 열렸다.

그동안 옥구농민항쟁과 관련해서 아쉬운 것은 ‘브나로드’(계몽운동) 운동과 연결되는 연구가 있을 법도 한데 농민야학이란 존재를 얘기하면서도 이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안타까웠다.

추론해보자면 서수농민야학도 1920년대 흐름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 ‘브나로드’(계몽운동) 운동의 한 줄기였을 것은 분명하다.

특히 옥구농민항쟁의 중심공간에 등장하는 장소들로는 이용휴 가옥과 서당채, 임피역전 경찰관 출장소, 이엽사 농장사무소, 침탈상징공간(헌곡답, 서수신사 등) 등이 농민항쟁의 기억물들이다.

# 농민항쟁의 기억의 장소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이용휴 가옥과 서당채… 농민야학의 공간

옥구농민항쟁의 발단이 된 주요 인물과 장소가 한 인물로 향하고 있다. 그가 한말 선비 이용휴 선생이다. 그는 자신의 안채에 서당을 설립하고 인근의 사람들을 교육했고 그의 후손들도 농민야학의 든든한 후원자로 역할을 했다. 이용휴 가옥의 서당채는 마을의 중심지로 마을의 주요회의와 행사가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서당채는 1950년대 말 철거된 후 흔적도 거의 남지 않았다.

본채인 원래 4칸의 초가집이었으나 1970년대에 기와로 지붕개량을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올 여름 첫째간이 무너져 시급한 보수와 보존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엽사농장 사무실이 있었던 임피중학교 교정.
이엽사농장 사무실이 있었던 임피중학교 교정.

침탈의 상징 헌곡답· 서수신사· 이엽사농장사무소

이용휴 가옥의 서당채와 대비적인 이엽사농장과 일본 황실 헌곡답터, 서수신사 등 주요 유적지들도 다수 존재한다. 침탈의 핵심공간로서 그 시기의 암울함과 정신 말살지란 우리 조상들의 아픔을 보여준 곳이기도 하다.

임피역전 경찰관 출장소

당시 옥구(서수)농민 500여명은 옥구농민항쟁기간인 1927년 11월25일 일경에 불법체포된 장태성 선생을 임피경찰관 출장소에 가서 구출했다. 항쟁의 불꽃이 일었던 공간이다.

# 브나로드 운동과 서수농민야학

서수에 농민야학이 있었다는 것은 도내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을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고향출신의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서수농민야학 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은 그만큼 식민지 모순이 극심했을 뿐 아니라 교육열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농민야학의 뿌리는 브나로드 운동에서 비롯됐다.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됐다.

‘브나로드’로 애칭되었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서울의 학생과 지식청년, 문화단체 그리고 동경유학생들에 의해서 실시되기 시작했다.

이들 유학생이 방학 때 실시한 귀향계몽운동은 큰 주목을 받았다.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도 1926년 여름방학 때 귀농운동을 폈는데, 이것 역시 학생에 의한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의 배경하에 각급 학교 학생은 학생 서클 조직을 이용, 농촌계몽운동에 나섰다.

특히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의 전신) 학생들은 1926년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고, 그 해부터 농민을 계몽하는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9월 경찰에 발각되어 좌절된 적이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다시 교외활동으로 개학 중에는 수원 인근에 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며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고 방학 중에는 전국에 퍼져 있던 선배 졸업생들과 제휴, 농촌개발을 위한 여러 가지 계몽활동을 벌였다.

이런 운동의 큰 흐름은 서수지역과도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서수의 농민야학과 연결된 인물 중에는 장태성 선생이 있는데 그는 전주고보 3학년 때 퇴학을 당하고 후배 박상호 선생의 요청을 받고 이곳으로 와 농민야학을 적극 전개하고 농민조직과 지역청년운동에 중심이 됐다.

장 선생보다 2살 연배이자 선백인 김영현 선생도 전주고보를 졸업한 뒤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 진학 후 비밀결사사건과 관련됐다가 퇴학, 고향에 내려와 농민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 농민항쟁의 유적지 보존방안 마련해야

장태성 선생을 숨겨주었던 이용덕 가옥과 농민항쟁 유공자 이휴춘· 최은엽 가옥들이 남아 있는 만큼 보존과 활용방안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다. 특히 옥구농민항쟁 100주년을 얼마 남지 않는 시점에서 34명의 농민항쟁 주역들을 기릴 수 있는 역사관 건립도 적극 고민해야 하지만 넘어야할  산도 상당하다. 

이에 따른 용전마을 주변지역의 전반적인 기초조사와 함께 보존방안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반면 일제의 침략과 압박의 공간들이라 할 수 있는 이엽사 농장터를 비롯한 일본 황실 헌곡답터, 서수신사 등도 옥구농민항쟁의 관련된 유적지인 만큼 새롭게 정비하는 한편 역사공원 조성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곳의 내용에는 구희진 군산대교수의 발표자료를 적극 참조했다.)

특히 옥구농민항쟁과 관련된 주요자료들은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만큼 3.1역사공원과 같은 형식으로 조성하는 문제를 장기과제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제기했던 브나로드 운동 속의 서수농민야학의 역할은 물론 김영현 선생의 수원고등농림학교 비밀결사사건과 관련된 내용도 정확히 정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수원고등농림학교의 비밀결사사건은 그 당시 전문학교의 최대사건이란 흐름을 유지했다.

이 학교의 조선농우연맹(1920년대 비밀결사)은 건아단(1926년 전후)→ 계림농흥사(1928년)→ 조선개척사 등이란 이름으로 위장, 변형됐다.

이후 수원고농사건은 △ 제1차(1928~ 1930년 3월) △ 제2차(1931~ 1935년: 상록수운동· 독서회) △ 제3차(1939~ 1941년 9월: 한글연구회) 등으로 지속됐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옥구농민항쟁의 중심인물 중 한 분인 김영현 선생은 큰 의미에선 조선농우연맹이란 비밀결사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이고 항쟁기에 고향에 있었던 점으로 미뤄 건아단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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