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서수농민항쟁 中] 서수농민항쟁과 소작투쟁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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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서수농민항쟁 中] 서수농민항쟁과 소작투쟁의 주역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2.05 10:58
  • 기사수정 2023-12-0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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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휴 선생… 한말 지조 높은 선비로 서당 만들어 인재양성교육
김영현 선생… 서수 첫 농민운동단체 광명농우회 설립· 항일투쟁 앞장
박상호 선생… 전주고보 재학때 일인 교장 추방운동 퇴학 후 농민운동
장태성 선생… 박 지사와 학생운동·농민야학· 농민항쟁 핵심 역할 톡톡
가와사키농장사무소와 이엽사 농장사무소가 있었던 임피중학교 교정. / 사진= 서수면사무소 제공
가와사키농장사무소와 이엽사 농장사무소가 있었던 임피중학교 교정. / 사진= 서수면사무소 제공

[옥구농민항쟁이란 1927년 11월 옥구군 서수면 일본인 이엽사 농장의 혹독한 착취와 폭압에 항거하고 봉기한 우리나라 농민저항 운동사의 대표적인 항쟁.

니가타현 출신 일본지주들의 종합공동농장격인 이엽사 농장이 소작료 75%를 현물 납입할 것을 강요하고 하향조정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자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운동과 함께 일경에 잡혀 간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을 위해 임피역전주재소와 서수주재소를 습격했다. 이어 다음날 새벽 일본경찰이 서수농민단체 간부와 소작인 대표를 압송하자 이에 항의해 인근 소작인 500여 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경은 시위책임 및 주역 등 총 80명 항일지사들을 붙잡아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했다. 이중 34명이 구금자 탈취, 소란죄 등으로 기소돼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대구 복심원(현재의 고등법원) 판결(1928년 9월) 때까지 항쟁은 계속됐다.

한편 농민항쟁 대표 34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 서훈(포상)을 받았다.]

사진=이엽사농장사무실-임피중교무실-1960년 10회 졸업기념사진
사진=이엽사농장사무실-임피중교무실-1960년 10회 졸업기념사진

이는 옥구농민항쟁과 관련된 핵심 내용이다.

이에 옥구농민항쟁의 의거와 투쟁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의 공로와 공적을 간단히 정리했다.

이런 항일농민항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숨은 저력은 서수지역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구한말 서수면 출신 선비 이용휴 선생의 의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이용휴 선생(1870~ 1918)은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 일제의 침탈을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지식인이자 선비로서 일본인 농장주 가와사키의 집요한 협박과 일경의 강요에도 당당히 맞선 지사였다.

국권상실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면서 선비의 의기를 굳건하게 지키며 자신의 집 아래채에 서당을 설립, 인근의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옥구농민항쟁의 주역들 다수가 이곳에서 공부했거나 인근에서 살면서 직간접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게 구희진 군산대 교수(역사학과)의 추론이다.

이후 옥구농민항쟁 당시에도 이용휴 선생의 자손들은 사랑채를 농민야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했을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낌없이 지원했다.

# 김영현(1907~ 1944) 선생

서수면 갑부 김용석의 아들인 그는 서수리 청년 및 농민운동단체에 적극 동참한데 이어 지원했다.

이 지역 최초로 만들어진 농민운동단체인 광명농우회는 1927년 1월 그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통해 만들어졌고 이 단체의 핵심역할을 했다.

전주고보 등을 졸업한 그는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전신)에 진학, 비밀결사사건으로 퇴학당한 후 만주으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했을 뿐 아니라 군자금 조달 등 항일운동에 전력했다.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붙잡힌 뒤 중형을 받고 수감 중에 1944년 3월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박상호 선생(미상)

서수면 최고 갑부 박운거의 아들로 1926년 전주고보 2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장 추방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했다. 10대 후반인데도 학교 1년 선배 장태성과 소작농들의 삶을 개선하고 서수농민조합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그의 삶은 왜곡돼 주요 행적이 가려져 있어 안타까움이 남는다.

# 장태성 선생(1909~ 1987)… 농민야학 등 농민항쟁 앞장

사진=1960년대 서수지서(군산 역사문화연구소)
사진=1960년대 서수지서(군산 역사문화연구소)

옥구읍 옥정리 출신인 장태성은 기존 옥구농민항쟁 지사들과 달리 인근 지역 출신이다.

그는 1926년 전주고보 3학년 재학 중 악질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후배 박상호와 함께 퇴학당한다. 후배 박상호의 요청을 받고 서수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서수청년회를 조직하고 이엽사의 무도한 수탈을 받는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권리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농민야학활동에 투신한다.

이곳에서 서수농민조합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를 조직,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서수청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맹렬히 활동한다. 농민조직 대표로 이엽사와 맞서 교섭하려했지만 철저하게 거부당한다. 이에 이엽사 농장이 교섭 대신 일경을 동원해 농민조합의 소작료 불납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그를 불법체포하면서 옥구농민항쟁의 신호탄이 쏘아올려진 것이다.

# 이용덕(1900~ 1953)· 신문관 선생(미상)

사진=1960년대 임피지서(군산 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사진=1960년대 임피지서(군산 역사문화연구소)

이용덕 선생은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석군의 아들로서 서수청년회와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유지 청년이었다. 그는 옥구농민항쟁 당시 임피역전 인근의 주재소에 불법 구금됐던 집행위원장 장태성을 구출해온 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에 은신시켰다.

이형로와 함께 이용휴의 서당에서 함께 공부한 민족의식이 투철한 신문관은 옥구농민항쟁 당시 40세로 항쟁 중심인물 중 연장자였다.

그는 장태성이 일경에 불법 체포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박상호 등과 함께 비상대책회의를 했고 각 마을에 알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조치를 취했단다. 그는 서수리 농민으로서 농민조합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인사로 주재소로 들어가 장태성을 구출한 뒤 이용덕의 집에 은신시킨 인물 중 하나로 알려졌다. 물론 여기에는 농민 500명과 합세, 압박과 위세를 부리던 일경의 위협을 이겨내고 적극 투쟁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남달랐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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