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6] ‘항일정신의 산실’ 영명학교 빛낸 인물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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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6] ‘항일정신의 산실’ 영명학교 빛낸 인물들(2)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6.28 09:38
  • 기사수정 2023-06-28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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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학교, 3.1운동 주도적 역할… 재학생 및 졸업생들 다수 참여
학생들… 군산· 익산· 논산 등지의 만세운동 확산에 앞장
졸업생들 … 장관, 전북지사, 부윤 등은 물론 유명 체육인 배출
김가전 전 전북지사· 박연세 목사· 윤건중 장관· 채금석 선생 등
1931년 영명학교의 학생 및 교사들/사진 출처=군산제일역사관
1931년 영명학교의 학생 및 교사들/사진 출처=군산제일역사관

학생 양기철(梁基哲)· 전세종(田世鍾)·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李道俊)· 홍천경(洪天敬)· 고준명(高俊明)· 유복섭(劉複燮)· 오한길(吳漢吉 :원적 정읍시)· 강규언(姜圭彦 : 원적 제주도)· 강인성(姜仁聲: 원적 익산시)등이 앞장섰다.

같은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 학생들도 함께 나섰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메 군산 시내로 들어갔다. 도중 예수교 신도들이 가담하고 부근 주민들이 함께 나섰다.

보통학교 생도들도 행렬로 뛰어들었다. 평화동(平和洞)· 영동(榮洞)을 거쳐 본정 큰 거리에 이르는 동안 만세대열은 더욱 증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시민 정문선(鄭文善)· 김영상(金永祥)· 전종식(田鍾植)· 문재봉(文在鳳)· 홍종억(洪鍾億)· 전봉신(田奉信)· 박동근(朴東根)· 임종우(林種祐)· 이병관(李炳寬) 등도 감격하여 학생들과 함께 앞장섰다. 학생들에 의하여 태극기가 나뉘어지고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일부는 경찰서로 밀려가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중략-

뒤이어서는 영명학교 및 예배당을 수색하여 증거 물품을 수색하고 관계 인사들을 검속하였는데 영명학교에서는 등사한 선언서 2천여 장이 발견되었으며, 5~ 8일간에 교사 고석주· 송정헌(宋正憲)과 병원 직원 양성도(楊成道)· 안경태(安敬泰)· 홍원경(洪元敬)· 임병률(林秉律)· 이진규(李眞圭)· 김준실(金俊實)· 송기주(宋基周)· 이재근(李在根) 등을 위시하여 90여 명이 검속당하여 저의 비인도적인 고문과 학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으로 하여 주동 인물로 인정받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은 3년, 김수영· 박연세는 2년 반의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고석주· 김성은․ 양기준· 유한종· 임종우· 김영상· 문재송 및 학생 유복섭· 고준상· 홍천경 등 30여명은 6개월 내지 1년 반 동안의 옥살이를 강요당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내용 중-

영명학교는 군산과 전국적인 항일지사들은 물론 정치인, 체육인 등 전국적인 인사들을 다수 배출했다. 이중에는 항일운동의 중심 인물을 넘어 장관이나 도지사 등을 역임한 이들도 있다.

영명학교 졸업생은 아니지만 교사와 교장 등으로 재직한 이들 중 항일운동에 헌신하거나 교육사업에 기여,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한 이들도 적지 않다.

◇ 항일운동에 앞장선 영명학교 출신 애국지사들

군산3·5만세운동은 영명학교 학생은 물론 교사, 구암교회 교인 등이 주도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 만세운동까지 앞장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적극 나서 주도했던 인물군에는 영명학교 학생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궁멀예수병원 9명, 시민 8명, 영명학교 교사 4명, 구암교회 신도 2명 등의 순이었다.

# 3.5만세운동 당시 재학생 출신 항일애국지사들

11명의 영명학교 재학생이 징역형을 받았고 교사 4명은 징역 3년~ 1년6개월을 받았단다.

주된 항일행적은 다음과 같다.

▽강인성(1897~1930)

1897년 1월 13일 익산시 웅포면 대붕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에 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소재 영명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앞장서다 투옥됐다.

정부는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강규언

1914년 군산시 구암동에 있는 영명학교에 입학했다.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자 불복하여 항소했다.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숭실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중퇴하고 모교인 영명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고향인 제주로 가서 모슬포에 광선학교(光鮮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22년 6월에는 기독청년회 창립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동아일보 제주지국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오한길(1896∼1951)

정읍 출신인 오한길은 1919년 3월 5일 영명학교 교사인 이두열· 김수영· 박연세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가 일경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연행됐다. 동료 학생들과 시민 등을 규합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군산 시내로 진출, 경찰서 앞에서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펴다가 체포됐다.

같은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행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영명학교 출신 애국지사

3.5만세운동당시 학생이었던 유복섭(1895~ 1949), 김영후(1897~ 1948), 전세종, 홍천경, 송기옥, 고준상, 이도준 등이 있다.

영명학교 출신이지만 일제강점기의 특성상 많은 자료가 멸실되거나 소실되는 바람에 졸업명부 등이 거의 사라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 항일지사들의 공로는 일부만 남아 있거나 혼란의 해방정국에서 역사 속에 묻히기도 했다. 후손이나 역사가의 노력이 미치지 않을 경우 아직도 그들의 공적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한편 강금옥(姜金玉) 학생도 강경 독립만세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의 소식을 그의 영명학교 선배였던 엄창섭 지사에게 전하면서 그곳의 독립만세운동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 영명학교 출신 애국지사 및 유명인사

영명학교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정치인을 배출한 항일학교였다. 이곳을 졸업한 인사들 중에는 옥중 순교와 항일 투쟁 중 순국한 이는 물론 해방 후 장관, 부윤(오늘날의 시장), 의사 등 지도층 인사들도 다수였다.

▽김가전(1892~1951): 상해 임정의 의정원 의장 지낸 김인전의 동생

“사실 김가전 지사(3대 전북지사)는 1949년 12월 15일 전북도지사에 취임하여 과로 때문에 1951년 10월 5일 순직하기까지 22개월여 재임하는 동안 특기할 만한 업적을 쌓지 못했다. 취임하자마자 도정 운영계획 하나 세우기도 전 6개월 만에 6·25라는 민족 최대의 전란에 휩싸였던 것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개화사상을 신봉하여 기독교에 입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황성기독청년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펼친 개화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김가전 선생은 형 인전 선생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하여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고, 또한 27세 때인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했다.

김가전 선생은 1892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영명학교를 졸업한 김가전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의 교목(校牧)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신앙과 민족정신을 일깨운 성직자이기도 했다. 김가전의 형인 김인전(金仁全) 선생도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장을 역임했던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다. 지금의 국회의장 격이다. 두 형제는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獄苦)를 치렀던 독립투사였다. 김가전은 7개월간의 감옥 생활 후 전주신흥학교에서 인재들을 양성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김가전 선생은 전주북중 교장을 맡아 또 다시 육영사업에 힘썼다. 그러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김가전 선생에게 공직에 나설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양했으나, 끝내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를 저버리지 못하고 1949년 12월 15일 제3대 전라북도 도지사에 취임하게 됐다. 도지사 취임 후에도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김가전은 전북대학교 창립에 앞장섰다.

김가전 지사가 1951년 10월 6일 갑자기 사망했다. 향년 59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박연세(1883~1944)

 1919년 군산 지역에서 3·5 만세 운동을 주모한 죄로 체포되어 복역한 후, 평양 신학교에서 수학하여 목회자가 됐다. 익산시와 전남 목포시 등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1942년, 목포 양동 교회에서 신사 참배 거부와 설교 내용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형을 선고 받던 중 1944년 2월 대구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윤건중(1898~1987)

1898년 8월 5일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영명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했다. 독립선언서를 자전거 뼈대에 숨겨 전주로 이송해 3월 13일 전주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또한 그해 4월 초에는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에 거주하던 최종삼에게 ‘일본 동포에게 고하는 글’과 독립신문 등 조선독립과 관련한 문서들을 일반인들에게 배포하게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수배를 당하던 중 조선총독부 참의원 전라북도 대표 김윤정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이승만 등과 교우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활약했다. 1922년 이승만의 권유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 정치경제학과로 진학해 1927년 5월 졸업했다.

1929년 겨울 살인미수죄 공소시효가 끝나자 귀국해 완주군에서 봉상산업노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8.15 광복 이후 군산에 있는 농기구 회사 조선이기공업사를 인수했다.

1954년 제9대 농림부 장관에 발탁되었으나 쌀값을 흉년으로 폭등하는 쌀값대책에 큰 마찰을 빚은 데다 농림부 직원의 비리사건에 책임을 지고 재임 56일 만에 사임했다.

장관직 퇴임 이후 전북대에서 독일어 강사를 지냈으며, 삼례여고와 읍사무소 건립을 위해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그의 유해는 2000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됐다.

▽엄창섭(1892~1973)

충청남도 부여 출신인 그는 1919년 강경의 사립 창영학교(昌永學校) 교사로 있을 때 자신의 영명학교 후배 강금옥(姜金玉) 학생으로부터 3·1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3월 6· 7일에 고상준· 추병갑 등과 3월 10일 강경장날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먼저 태극기 200여개를 제작하여 강경읍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3월 10일 옥녀봉(玉女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날의 시위중 붙잡혀 강경만세시위운동의 주모자로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이 강경시위는 충청남도에서의 시위운동을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출옥 후 민족사상계몽대를 조직하여 그 대장으로 군산· 만경· 김제 등을 순회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부안에서 붙잡혔고, 1929년 신간회의 선전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투옥됐다.

1980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에는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병수(1898~1951)

김제 출신인 김병수 선생은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세브란스 의전 재학 중에 1919년 3월 5일의 군산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같은 날 서울 남대문(南大門)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같은 해 2월 25일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군산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라는 권유를 받고,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이튿날 군산에 도착했다.

이어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의 집에서 고석주· 김수영· 이동욱· 이두열 등 교사과 만나 서울의 만세운동 계획을 전하고, 이들에게 1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준 뒤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3월 5일의 군산만세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군산의 시위 계획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상경, 역시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강기덕(康基德)· 김원벽(金元璧) 등과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양기준(1896~1975)·기철 형제

양기준은 1896년 군산구암교회 초대 장로인 양응칠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명학교 야구부 선두타자로 활약했다. <군산 야구 100년사>(2014년 판 참조)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이리(익산) 삼산의원에서 조수로 근무하였고, 1932년 한지의사 면허를 취득, 무의촌 지역 공의로 전염병 예방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익산시 보건소장, 경기도 강화군 연평도 진료보건소장 등을 지냈다.

3.5만세운동으로 징역 6월을 받아 대통령 표창(2015년)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의 동생 양기철(梁基哲)도 만세운동에 앞장서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해 영명중학교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양기철 학생은 급우들과 ‘졸업은 조국 독립 후로 미루자!’고 결의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당시 양기준(24)· 기철(21) 형제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한편 양기준 선생의 누나 양마리아는 멜볼딘여학교 사감(舍監)으로 재직한다. 그녀는 1914년 인텔리 청년 임옥빈(任鋈彬)과 혼례를 올린다.

양기준의 자형인 임옥빈(1893~1919)은 영명학교 고등과(4년제) 졸업생으로 결혼 이듬해 영명학교 특별과(2년제)에 진학한다. 영명학교 특별과는 지금의 대학 과정으로 졸업 후에는 주로 교직이나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 근무했다.

그의 가족들은 임옥빈 지사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자료와 증언을 통해 할아버지가 영명학교 고등과(2회)와 특별과(6회)를 졸업한 사실이나 결혼 후 3·5만세운동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문초당한 이야기, 온갖 고문으로 인사불성이 된 채 풀려나왔다고.

하지만 다른 사료와 자료 등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을 찾지 못해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 후손들의 호소다.(조종안 기자 보도 내용 참조)

▽문용기(1878~1919)

문용기는 1878년 5월 19일 지금의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관음마을에서 태어났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의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남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 영어를 공부했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시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는 박도현(朴道賢)· 장경춘(張京春)· 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48년 3월 1일 익산지역 유지들이 순국 현장인 이리구시장에 순국열사 문용기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송기주(1890~1950):송삼석 모나미 창업자 부친

1890년 8월 27일 충남 서천군 장항읍 옥남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군산시 구암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군산영명학교를 졸업했다.

영명학교 졸업 후 군산구암병원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공부해 독학으로 약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군산만세 운동 당시 송기주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9월 15일에는 군산개복동기독청년회에서 영신학원(永信學院) 창립을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자, 의연금을 기부했다. 종교 및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2년 가족들을 이끌고 완주군 삼례로 이주해 ‘송약방(宋藥房)’을 개업해 생업으로 하던 중 1950년 3월 26일 별세했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 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이요한(1899~1988):전전북지사

군산시 대야면에서 태어난 그는 안락소학교, 군산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갑사 불교전문강습원을 수료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옥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됐고 후에 전북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요순(1902~1937)

이순길 지사의 막내 남동생이자, 이요한 전 전북지사의 친동생이다.

영명학교 재학 중인 1926년2월 일어선생 거부 동맹휴학으로 퇴학됐다가 그해 고창고보 입학 했다.

교장에게 일본인 교원 배척 외 3개 조건과 5개의 요구를 담은 진정서를 제출하고 이날부터 동맹 휴학을 단행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후에 퇴학당했다가 서울 경신고보로 편입했다.

졸업 후 1932년 연희 의학전문에 입학했고 1934년 10월 고문 후유증으로 휴학과 병기 휴학 등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고문과 질환으로 요절했다.

▽이수현(1895~1984)

구암동에서 태어나 해리슨(1894~ 1928: 한국 하위렴)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했다. 군산영명학교와 광주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순천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만주신흥군관학교 등을 거쳐 1918년 2월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중앙교회를 거쳐 개복동교회와 군산중앙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45년 목회 중 36년간 군산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채금석 (1904~1995)

1903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영명학교에서 시작된 군산 축구는 1911년 군산영명축구단이 창단하면서 본격화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정한 규칙은 물론 유니폼도 없이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경기를 했다.

경신중에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던 채금석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일제의 탄압에 맞서다 퇴학당한다. 학생 신분을 벗어난 그는 각종 국내외 대회에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했다. 경성축구단 소속 공격수로 경성·평양 축구대항전 등에 참가해 승리를 거뒀다. 1934년에는 조선 대표선수로 일본과 중국 원정 경기에서 대승을 거뒀다. 1935년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채금석도 1934년 베를린 올림픽 예선전을 끝으로 국가대표선수 생활을 마치고 고향 군산으로 돌아온다. 그는 군산 축구팀을 이끌며 54세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또 매일 아침 운동장을 찾아 축구 동호인과 초중고생들을 지도하며 군산 지역 축구발전에 앞장섰다.

채금석의 축구 정신을 잇기 위해 지역인사와 제자들은 1992년 초·중·고교가 참가하는 ‘금석배 전국 학생 축구대회’를 창설,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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