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5] 120년 전 영명학교는 어떤 학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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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5] 120년 전 영명학교는 어떤 학교?(1)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6.21 09:44
  • 기사수정 2023-06-21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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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설립된 영명학교… 3.1운동 주도한 항일애국지사의 산실
야구· 축구 등 스포츠는 물론 전도 밴드부까지 전국 선도적 역할
신지식 무장한 ‘미 유수대학출신 선교사들’의 군산 이주 ‘맹활약’
옛 영명학교
옛 영명학교 교사/사진=구암교회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한국 축구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최초로 축구를 보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군산 선교사로 활동하며 학교 교육을 통해 축구를 보급하고 군산 축구의 전국화에 기여했다. 그는 도내 최초로 자전거를 탔던 인물로도 알려졌다.

또, 구암동산 소재 영명학교에 야구부를 만들어 국내 최초의 야구부를 창설했다. 이는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YMCA야구단을 조직해 활동한 시기보다 3년 앞섰다.

‘윌리엄 불’과 ‘윌리엄 린튼’ 등 당시 선교사들은 선교보고서를 통해 한반도를 강탈하고 강압하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며 우리의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대한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윌리엄 불(1876~1941: 부위렴)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에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서 12인조 밴드부를 만들어 전도 때마다 함께 다녔다 한다. 특히 밴드부 학생들은 졸업 후에는 각 교회에서 찬양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했다. 이는 공식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밴드부였다.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구암교회 등이 앞장섰던 군산 3.5 독립만세도 한강이남 최초란 타이틀과 함께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한 원동력이었다.

이들 내용이 신기하게도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영명학교’다.

국내 최초이거나 적어도 최초와 가까운 시기이다. 적어도 전북 최초라는 타이틀들이 항시 뒤따라 다니고 있다.

야구와 축구 등 스포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여기에다 밴드부(12인조)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다 멜볼딘여학교의 정구도 무시 못할 정도다.

당시에 군산은 보잘 것없는 항구였다. 이런 곳이 우리나라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거나 그 최초라는 시기에 가깝다면 아무래도 뭔가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당시 미국의 주요도시와 그 지역 소재 대학이나 신학교, 의과대학 등을 졸업한 선교사들이 군산과 전주 등 호남으로 대거 들어와 선교 및 의료활동에 헌신했다.

이들 선교사들의 주된 면면은 이렇다.

전킨 선교사((Junckin, W. M.(1865~1908): 한국명 전위렴)는 미국 버지니아 출신이었고 드루 선교사의 활동무대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윌리엄 불 선교사는 1876년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에서 태어나서 햄튼 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리치먼드 버지니아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했다.

여기에다 알렉산더 의료 선교사는 켄터키주 출신으로 프린스턴대와 뉴욕컬럼비아대학 의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1891년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빌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한국명 인돈)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프레스톤(J. F Preston·한국명 변요한)의 강연에 큰 감동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제너럴 일렉트릭스(Genral Electrics) 입사를 포기하고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1922년 인돈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딸인 샤로테(Charlotte Witherspoon Bell· 한국명 인사례)와 결혼한 이후 전주로 이동하여 교육선교를 이어간다. 인사례는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인돈 또한 자신의 아들들에게 지게 지는 방법을 가르칠 정도로 부부가 나란히 한국을 사랑했다.

인돈은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자학교의 교장으로 기독교적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 열매도 보았다.

이런 대학출신들이 대거 군산으로 오는 바람에 군산은 작은 항구도시에서 일약 근대사상의 메카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 ‘영명학교’가 있다.

​# 근대교육의 메카 ‘영명학교의 탄생’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킨(Junckin, W. M.: 한국명 전위렴)이 설립했다. 연도별 다소 차이는 여러 곳에 있지만 군산제일고는 이 때를 설립년도로 잡고 있다.

1903년 선교부에 의해서 전킨이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고 학교 운영이 공식화되었다. 가을부터는 단기선교로 온 유진벨 선교사의 두 여동생들이 전킨 부인을 도왔고, 전킨도 가세하게 된다.

당초의 설립취지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울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학교가 군산영명학교다.

영명학교 설립자 겸 교장으로 활동했던 전킨은 미국교회에 교사(校舍) 신축과 교육 선교사 파견을 호소했다.

이렇게 영명학교는 현대식 3층 건물과 기숙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을 모아서 기숙사 생활을 통해 신식으로 교육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미션 스쿨이었고 한국인 교사들(또는 졸업생들) 대부분이 근대사상으로 무장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군산과 익산, 논산 등 인근 지방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명’이란 덕과 학업을 쌓아 온 누리를 밝게 비추라는 뜻이며, 따라서 교과목에서는 덕육(德育)을 특히 중시하여 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영명’이란 이름의 미션스쿨은 공주 등지에도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청소년들의 지육· 덕육과 더불어 체육에도 주력했다. 영명학교는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활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미신타파 운동과 더불어 민족독립정신 고양에도 큰 역할을 했다.

설립 이후 보통과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미국에서 의학박사가 되어 돌아온 오긍선(대학원 재학 중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 서재필(徐載弼)에 이은 두 번째 의학박사였다.)에 새로운 상황을 맞는다. 그는 1909년에 소학교와 중학교 과정으로 분리, 발전시켰다.

중학교에는 4년제 고등과와 2년제 특별과가 병설되어 학부(學部)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911년 6월 6월에 특별과 7명, 1913년 3월에 고등과 4명이 최초로 졸업을 했다.

1919년 3월 박연세(朴淵世)· 이두열(李斗悅)· 송정헌(宋正憲)· 고석주(高錫柱)· 김수영(金洙榮) 등 교사들과 학생들이 한강이남 최초로 3ㆍ1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영명학교가 민족 운동의 중심이 되자 일제는 이에 대한 탄압으로 특별과를 폐과하고 고등과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1940년 10월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했다.

해방 후 한참이 지나서 195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군산노회에 의해서 군산영명고등학교로 복교됐다.

재정난 등의 어려움을 겪던 기독교계 영명학교는 1975년에 군산 굴지의 기업가인 고판남(작고) 세풍그룹 회장이 인수하여 교명을 군산제일고로 바꾸고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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