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골목 이야기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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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골목 이야기 4-2
  • 김선옥
  • 승인 2022.06.17 06:05
  • 기사수정 2023-04-21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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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복동 골목
개복동 골목

(…4-1에 이어) 테이프가 먼저 자리를 잡고, 과일과 꽃을 꼬드겨 골목이 문을 여는 시각이면 함께 몰려왔다.

그들은 골목 아가씨들과 싱글거리고 농을 주고받으며 잠시 서성이다가 어둠이 더 깊어져 손님들이 몰려올 시각이면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기세 좋게 소리치는 그들 틈새로 다른 상인들도 가끔씩 물건을 챙겨 저녁이 내린 골목길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여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상큼한 물건들도 더러 있었다. 아찔하게 속살이 비치는 야한 드레스들과 드라마에서 탤런트가 머리에 꽂았던 모조 보석이 화려하게 달린 핀이나 목걸이, 굽이 높고 특이한 샌들을 가져오는 행상들은 여자들에게 단연 인기가 좋았다.

어둠이 세상을 잠식할 때부터 골목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켜켜이 쌓인 전날의 피로를 낮 시간의 짧은 잠으로 황급히 털어 낸 여자들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게 서둘렀다. 얼굴을 곱게 다듬고 되도록 윤곽이 많이 드러나는 옷을 골라 입었다. 선정적인 옷은 사내들을 유혹하기에 좋은 미끼였다.

화장을 마치고 옷을 차려입은 여자들은 문 곁에 놓아 둔 둥그런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비를 기다리며 꽃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떤 여자는 질겅질겅 껌을 씹거나 영화에서 보던 여배우의 모습을 흉내 내며 담배를 입에 물었고, 누군가는 무료해서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잘 칠해진 입술을 지우고 다시 칠하는 여자도 있었다.

여자들은 되도록 많은 돈을 사내들로부터 쥐어 짜내는 게 임무였다. 가면처럼 화장한 모습에 속는 멍청한 사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여자들은 골목에서 시간을 죽였다. 찾아온 사내를 제대로 유혹할 수 있기를, 흘러든 사내가 속살을 드러낸 옷자락 사이로 거침없이 돈을 떨어뜨려 주고 가기를 여자들은 한결같이 바랐다.

여자들의 가치는 수입에 비례했으므로 지폐의 무게가 골목의 하루를 마감하는 간절하고 유일한 꿈이었다.

얼굴에 생기를 가득 피워 올리며 손님을 유혹하기 위해 준비한 여자들의 모습은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한 꺼풀 뒤에 숨겨진 모습이 어떤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은구슬이 구르듯 맑은 목소리로 부산을 떠는 여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 시커멓게 썩은 애환들이 탑처럼 쌓였는데도 속내는 살피지 않았다.

골목을 찾아오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치장된 모습과 꾸민 미소에 현혹되어 창자까지 꺼내줄 듯이 은근하게 굴었지만 여자들에게 환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골목의 여자들에게 환상의 베아트리체가 있는 것처럼 위안을 방패 삼아 찾아왔다. 환상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자들이 알아채기 훨씬 전부터 여자들도 알고 있었다. 골목 여자들은 환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설사 있더라도 환상을 믿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오랫동안 꿈과 환상을 찾아 헤매던 남자들은 골목으로 들어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성였다. 서성이던 남자들은 덥석 미끼를 물어 버린 고기를 낚아채기 위해 벼르던 골목의 여자들에 의해 골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리고 세상 경험이 부족한 순결을 지닌 남자들도 찾아왔다. 그들에게도 골목은 꿈의 세계였다. 어른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장소로 지정된 골목은 환상이 있는 세계로 비쳤다. 그들도 여자들에게 어김없이 동정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포기하면서 꿈과 환상까지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함께 버렸다.

노총각도 그들처럼 어린 시절 부모의 눈을 피해 아주 가끔 골목을 훔쳐보며 지나갔다. 지금은 성장하여 골목 가까이에서 서성이지만 꿈의 파편들을 조금이라도 주워 모으고 싶었다. 그는 골목에서 꿈을 찾으려고 크게 눈을 떴다가 다른 남자들처럼 꿈꾸던 것들을 하나도 찾지 못해실망한 채 돌아서곤 했다.

허무와 허탈감만 뼈저리게 맛보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된 그는 꿈의 깨진 조각을 보고 쓸쓸한 표정으로 날마다 미련을 남기며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그에겐 돌아갈 집과 받아 줄 세상이 있었다.

여자들에게도 그럴 장소가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노총각의 테이프와 경쟁이라도 하듯 골목집 어디선가 볼륨을 크게 틀어 놓은 흘러간 가요의 슬픈 음률이 파도처럼 골목을 휘돌았다. 간간 깔깔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낮은 비음으로 흥얼대는 늙은 포주의 목소리가 새어나와 삽시간에 골목이 노랫가락으로 적셔졌다.

과일 몇 개와 한 다발의 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팔지 못했지만 행상들은 서서히 리어카를 밀었다. 본격적으로 손님이 몰려들 시간이었으므로 아쉽더라도 사라져야 했다.

“오늘 머저리 몸 푸는 날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들만의 언어로 여자가 소곤거렸다. 머저리는 단골로 골목에 찾아와 여자를 찾는 남자였다.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머저리로 불린 그가 여자의 단골손님이라는 것도 노총각은 알지 못했다. 머저리로 불릴망정 여자를 품에 안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는 노총각보다 한결 나은 처지였다.

“맞다, 내 사랑 바람잡이도 함께 올 걸. 오늘 선불 땡기는 날이거든. 우리 머저리랑 바람잡이를 홀딱 벗겨 먹자 쌍말만 안 갈기면 바람잡이도 죽이는데."

"쥑이긴 뭘 쥑여. 제발 니가 죽이지나 마라. 곱게 살려 보내야 담에 또 빵빵하게 돈 들고 찾아오지."

초록 가발을 쓴 여자의 말에 주위의 여자들 모두가 킬킬대며 웃었다.

단골로 찾아오는 남자들에게는 별명이 붙여졌다. 머저리, 병신, 등신, 통돼지구이, 사팔뜨기, 불한당, 바람잡이같이 대부분 질이 낮고, 저속하거나 상스런 별명이었다.

그렇게 별명이 붙여진 남자들도 희한하게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자신의 별명이 재수 없고, 웃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으며 크게 화내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즐겁게 키득거리면서 다른 사람을 놀리는 일에 기꺼이 동참했다.

별명이 붙은 단골들은 주로 뱃사람들이었다. 결혼할 나이가 훨씬 지나 버린 늙은 총각이거나 바다를 떠도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한 아내를 둔 홀아비들이었다.

혼자서 풍진 세상과 맨주먹으로 맞서는 그들은 바다에 목숨을 떠맡기고 살았다. 바다의 변덕은 그들의 목에 시퍼런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부여잡은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힌 채 절망에 길들여 있었다.

인생이 고단해서 그들은 자주 삶을 체념하였다. 거칠 것 없는 삶을 당당하게 생각하면서 되도록 호탕하게 살고자 애썼다. 하루를 힘겹게 사는데도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에 미련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바다로 나가기 전에 선주로부터 선불로 받은 돈을 써 버려야 안심이 되었다. 가치 없이 탕진하기엔 아까운 목숨 값이었는데도 배에 오르기 전에 없애지 않으면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여 안달이었다. 선불을 쌓아 두면 바다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위스러움에 떨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돈을 쓰기에 적합한 곳으로 골목을 택했다. 목숨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 골목이라고 단정한 모양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 세상의 관심권에서 밀린 사람들끼리는 서로 단단히 얽어매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법이고, 생의 밧줄이었다.

골목의 여자들과 배를 타는 그들은 바다로 나가는 날까지 좁은 방에서 함께 뒹굴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이면 그들은 뭐든지 해 주었다. 여자들은 바닷바람을 싣고 온 남자들에게서 가능하면 뼛골까지 빼앗으려 덤볐다. 그들은 허허 웃으며 바닷물을 마셔 모두 없애라는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굴었다.

여자들은 비린내가 절어 있는 거친 그들에게 갖은 애교를 부렸다. 되도록 많은 화대를 울궈내면서 그렇듯이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날, 머저리와 바람잡이도 지갑을 탈탈 털어 푼수처럼 마구 돈을 뿌렸다. 머저리는 여자에게 십팔금의 예쁜 발찌를 사 주었으며, 여자의 비음이 섞인 앙탈에 귀고리도 사서 주었다.

여자는 내일 비싼 핸드백을 사다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 내었다. 핸드백을 들고 뽐내며 거리를 활보할 일이 있을지 까마득했지만 여자는 그저 행복했다. 머저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골목의 여자들에게는 영원한 봉이었다.

골목에는 어린이나 나이 많은 어른들은 없었다. 어린이나 노인들의 세계는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설렁 골목에 존재하더라도 그림자만 얼씬하도록 규정지었는지도 몰랐다.

어디선가 뚝 잘라 온 듯 젊고 싱싱한 여자들만 환영받았다. 젊고 반듯한 여자여야 골목의 거주자가 될 자격이 주어졌다.

방문객들의 연령층도 대게는 젊었다. 골목엔 이십대에서 삼십대가 주를 이루었다. 간혹, 십대나 사십대 이후의 사람들이 기웃댈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골목의 사람들에게 홀대를 받았다. 기가 죽어 나왔고, 다음엔 골목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 소설은 매주 금요일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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