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에 물들다] 1000년의 역사 살아 있는 선유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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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에 물들다] 1000년의 역사 살아 있는 선유3구
  • 임동준 시민기자
  • 승인 2022.04.04 17:51
  • 기사수정 2022-04-08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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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주봉을 중심으로 서쪽은 신기리(샛터), 북쪽은 전월리(반너머), 동쪽은 남악리(나매기) 마을로 이뤄진 전형적인 어촌마을인 선유3구.

2017년 연육교가 연결이 되면서 이곳 역시 관광지로 변했다.

그렇게 선유3구는 어업과 관광이 어우러지는 마을로서 40여가구 9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인 1980년대에는 주로 멸치, 바지락, 굴 등이 주수입원이었으며, 소라와 새우를 잡는 지금의 자망배들이 몇 척 있었다.

1980년대 멸치 삶는 모습
1980년대 멸치 삶는 모습
1980년대 멸치 말리는 모습
1980년대 멸치 말리는 모습

 

그후 김양식업은 선유도와 횡경도 사이에 부유식 양식장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어업의 수입은 김양식과 봄,가을에 잡히는 꽃게였다.

선유3구항의 개발로 군산시 수협위판장이 들어서면서 고군산의 수산물이 이곳에서 위판되는 등 어업의 중심지가 됐다.

선유3구항 전경
선유3구항 전경

 

군산시수협 선유도 위판장
군산시수협 선유도 위판장

 

선유3구항을 감싸고 있는 산에 올라가 보았다.

패총을 보기 위해서다. 올라가기 전부터 흰색 굴껍데기의 조각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지금은 밭을 경작하지 않아서 풀이 무성하다.

밭에 있는 패총
밭에 있는 패총

 

이 곳은 오래 전부터 이 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12~13세기로 추정되는 청자파편이 발견된 것을 감안하면 900년 전 고려시대에도 건물이 있었던 곳임이 확실하다.

잠시 둘러본 산자락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자락에서 바라본 이 곳 바다에도 역사가 숨쉬고 있었다.

1597년 9월13일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왜선과 맞서 승리를 이끌었던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은 5일 후인 1597년 9월 21일 고군산군도 선유도에 닻을 내린다.

이 곳에서 12일간(1597.9.21.~10.3)의 휴식을 보냈다.

명랑해전 대승의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선유도에 머물던 이순신에게 아산 본가의 처참한 소식이 전해졌다.

아산의 고향집이 육지의 왜적에게 분탕질을 당하고 잿더미가 돼 남은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일)

셋째 아들 면의 죽음 소식을 전해들은 곳이기도 하다. 

고군산진이 현재 선유2구 마을에 1624년 설치가 되어졌으니 명량해전의 승첩장계를 작성했던 곳이 이곳 선유3구였지 않았을까 싶다.

전남 여수, 목포와 경남 통영시는 이순신장군이 머물렀던 곳을 관광상품화하고 있다.

군산시도 이런 노력을 보여주었으면 했다.

 

군산이우도(조영. 1596)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군산도로 피난을 와서 조영과 김주의 우정을 기리기 위하여 그린 그림
군산이우도(조영. 1596)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군산도로 피난을 와서 조영과 김주의 우정을 기리기 위하여 그린 그림

 

두 번째 기록은 1123년 송나라 사신단인 서긍이 작성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보면 900년전의 이 곳 군산도(선유도)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아침 밀물을 타고 운항하여 진각(辰刻·오전 7~9시)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접반(사신을 맞이하는 고려 측 인사, 당시 김부식 일행이 왕의 명령을 받아 송의 사신단을 맞이했음-필자 주)이 채색 배를 보내 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닷가에 있고 뒤에는 두 봉우리가 받쳐주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우뚝 서 있고 높은 절벽을 이루어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관가 소유의 건물 10여 채가 있고, 서쪽의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민가 10여 호가 있다.”

이처럼 기록을 토대로 보면 현재 남아있는 오룡묘를 중심으로 한 망주봉 서쪽 방향인 신기리 마을쪽으로 건물들이 모여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런데 작년 5월에 망주봉 자락의 밭을 중장비로 파헤치는 일이 있었다.

약 100평의 땅을 파서 흙을 옮겨 놓은 곳에 가보니 건물의 기단석과 기왓장과 청자의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곧바로 군산시 문화예술과에 신고했다.

 

밭에 널브러져 있는 고려청자와 기왓장
밭에 널브러져 있는 고려청자와 기왓장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고려청자의 경우 강진과 부안을 떠올리지만 이곳은 청자를 생산하는 도요지였다.

이곳 선유도는 그 곳에서 만들어진 고급 청자를 실제 사용하며 살아왔던 곳이다.

작년 12월 바닷속 보물선에서 청자 200여개가 나왔다는 보도로 여러통의 전화를 받았다.

필자는 전화온 그들에게 바닷속 보물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역사가 선유3구에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한적 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 망주봉을 중심으로 전월마을과 신기마을에 펼쳐지는 모습을 설명하고 싶었다. 

참고로 파주의 혜음원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혜음원(惠蔭院)은 고려 예종때 남경과 개성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을 위해 창건된 국립 숙박시설이다.

인종 이후에는 왕이 숙박하는 행궁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고 전해진다.

2001년 이후 지속적인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연못지, 배수로 등의 유구와 금동여래상, 기와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려 시대 각 계층의 생활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곳 망주봉도 2018년 명승 제113호가 지정이 되어 토지매입이 진행중이다. 군산시가 작년에 종합개발계획을 용역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명승 지정으로 망주봉 인근 500m 주변의 토지들은 문화재 허가구역으로 묶여졌다.

토지주들의 재산상 손해가 불가피하다. 

이런 점을 감안해 주민들을 위해 고려 건국 1,100년 기념 ‘강화고려문화축전’과 같은 서긍 사신단 방문 900주년 기념 축제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제안한다.

신기리 마을을 바라보는 망주봉 자락에는 신비스러운 오룡묘가 앉아있다.

소나무 재선충으로 적송을 잘라내 그 자리에 다른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만 예전에는 적송과 상수리나무가 오룡묘를 가려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은 마을의 안녕과 뱃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풍어를 빌었던 곳이다.

매년 당산제와 3년마다 별신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한달간 상가집과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은 다른 마을로 임시로 거처를 옮겼다.

음식은 마을 주민들과 선주들이 돈을 모아 부안이나 김제까지 배를 타고 나가 쌀과 돼지, 과일 등을 준비했다.  

여성은 음식장만을 했다. 남성은 새벽부터 목욕을 하고 신성한 마음으로 제를 지냈다고한다.

어려서 기억되는 당지기집이 오룡묘 바로 밑에 있었지만 그 흔적만 남아있을뿐 그때의 현장을 기억하는건 우뚝선 상수리나무 뿐이다.

2012년 수리하기전 오룡묘 아랫당
2012년 수리하기전 오룡묘 아랫당
현재의 오룡묘의 모습
현재의 오룡묘의 모습

 

망주봉을 지나 해수욕장 끝쪽에 대봉을 오를수 있는 푯말이 보인다.

아직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가다보면 오르막이 있다.

숨이 차오르는 길이지만 북쪽의 바다를 보면 김양식장이 바둑판처럼 보인다.

저멀리 군산 산업단지와 새만금도 시야에 들어온다.

 

선유도와 횡경도 사이에 있는 김양식장
선유도와 횡경도 사이에 있는 김양식장

 

대봉 정상에 오르면 망주봉과 해수욕장, 선유3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이들 풍경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망주봉과 3구항이 내려다 보이는 대봉 정상
망주봉과 3구항이 내려다 보이는 대봉 정상

 

다시 발길을 돌려 남악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장자도와 관리도, 무산십이봉으로 이루어진 방축도,명도,말도의 풍경과 저 멀리 미공군 사격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직도도 보인다.

2006년 주민의 사활을 담보로 협의한 직도사격장 주민 보상금 3,000억으로 고군산 연육교가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직도가 반갑기만하다.

 

망망대해 끝에 보이는 직도
망망대해 끝에 보이는 직도

 

신기마을을 지나면 몽돌해변이 나온다.

몽돌해변의 돌들은 유독 납작해 어려서 물방개를 치며 놀았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용담금이라 불리었는데 현재는 코끼리를 닮았다 해 '코끼리 바위'라 불린다.

 

용담금이라 불리우는 신기리마을 뒷산
용담금이라 불리우는 신기리마을 뒷산

 

조선시대 요망대(遙望臺)가 있었다는 뒷산에 올라가는 시간은 10여분.

탁 트인 바다와 함께 멀리 군산 산업단지와 새만금을 바라볼수 있는 전경을 선물 받을수 있으며 아침에는 일출을 볼수 있는 곳이다.

 

선유도 일출
선유도 일출

 

만경현고군산진지도(1897년, 서울대규장각 소장)에 나오는 요망대
만경현고군산진지도(1897년, 서울대규장각 소장)에 나오는 요망대

 

고려시대에 아주 번성했던 이곳의 역사적 기록은 나중에 주변에서 찾아본 유물과 함께 글을 써볼 생각이다.

선유3구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나의 쉼터인 '선유도에 물들다'로 발길을 돌렸다.

 

 

 

임동준 시민기자

ㆍ원광대 일반대학원 보건행정학 석사

ㆍ군산시자원봉사센터 이사

ㆍ현)선유도에물들다 대표

ㆍ현)선유도주민통합위원회 사무국장

ㆍ현)고군산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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