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55] 호남야구 중흥 시대 활짝…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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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55] 호남야구 중흥 시대 활짝…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1.17 11:47
  • 기사수정 2022-01-18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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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야구의 실질적 개척자… 군산남중‧ 상고야구부 창단 등에 앞장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등장… 1972년 황금사자기 제패 이후 전국명문 부상
KBO사무총장‧ 쌍방울 구단주 대행 등… 프로야구 태동 결정적인 역할
이용일 KBO총재 대행./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이용일 KBO총재 대행./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군산야구의 키다리 아저씨, 한국프로야구와 지역야구 발전에 헌신한 야구계의 거목, 진정한 애향인… ’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했던가.

이 말의 본뜻은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다. 이 사자성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다소 인용하는 뜻과 차이는 있지만 선친의 업적이나 능력을 뛰어넘었던 한 군산야구선구자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끄집어냈다.

우리 속담에 ‘왕대밭에 왕대 난다’란 말이 더 맞는 인용이겠지만.

다만 사업가로 지역경제발전 등에 공헌을 했지만 선친의 행적 중 친일의 꼬리를 뗄 수 없어 이 말로 대신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도입부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군산과 전북, 전국의 야구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가 이용일(1931~ ) 전 KBO사무총장.

그의 선친이 생을 바쳐 번 큰 재산을 당시로선 야구의 불모지와 같은 고향 군산에 아낌없이 투자했다는 점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야구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다.

역전의 명수 신화를 쓴 밑거름이자 오늘의 군산상고가 있게 만든 이가 그다. 그의 군산야구 발전에 대한 공로는 아무리 찬사를 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이용일과 그의 부자에 대한 얘기와 그의 야구인생 등을 다뤘다. 이란은 조종안 기자의 글과 다른 자료 등을 취합, 참조했다.

# 경성고무 창업자 이만수‧ 용일 부자

이만수(1891~1964) 경성고무사장은 당시 조선 사람들을 위해 짚신보다 오래가는 고무신을 만들어 판매한 사업가였다.

이 사장은 당초 서울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군산사람이었단다. 중학교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소속 토지측량과 기술자로 일했다.

이후 사업에 눈을 뜬 그는 고향인 군산으로 내려와 1924년 고무신 소매업을 하다가 1932년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 대주주 겸 사장으로 취임, 고무신 사업에 본격 뛰어들어 기업가로서 승승장구했다.

당시 군산의 공업은 일제 독점자본으로 발전했고, 대부분의 공장이 일본인 소유였다.

이런 성공을 통해 당시 조선인 사업가로서 보기 드물게 군산상의 상의원으로 진출했고 지금의 부회장까지 맡았다. 이런 직책을 맡은 것은 이만수 사장이 사실상 처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친일단체를 만드는데도 간여했고, 군수 자재 헌납운동과 국방비 헌납 등으로 일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단다. 이 때문에 반민특위 피의자 명단 등 친일행적과 논란에 휩싸였지만 친일인명사전 등재까지는 되지 않았다.

이만수 사장은 5남2녀를 두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각각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었고, 셋째는 경찰(경감)이었다.

그런데 1957년 셋째가 미국 경찰제도 현지 시찰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 경성고무 설립자인 이만수 사장은 넷째아들 이용일을 경성고무 후계자로 지목한다.

이용일은 그는 누구인가.

이용일은 군산에서 태어나 군산중학교 1학년 마치고 가족을 따라 상경한다.

서울 경동중(6년제) 2학년 때 야구를 시작, 서울상대 야구부· 육군야구단 등에서 내야수로 활약한다.

그의 선수 생활은 고작 7년.

국가대표 출신 매부(유복룡: 경동중 야구부 창설자)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이용일은 1950년 서울대 상대에 진학, 야구부에 들어간다.

동료 선수는 장태영· 박정표(이상 경남중)· 이호헌(마산중)·김의석(광주서중)· 김재복(인천중)·김 홍일· 문명채(대구상) 등 각지에서 올라온 뛰어난 야구 유망주였다.

평소 성격이 활달했던 이용일은 훗날 한국 야구계를 이끌어갈 그들과 친분을 쌓는다.

이용일은 1950년 6월 23일 동대문야구장에서 개최된 전국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출전, 24일 성균관대를 누르고 25일 연세대와 준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장교로 입대한다.

1950년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1952년 육군 정훈감 김천경 장군으로부터 육군야구단에서 선수로 뛰라는 명령을 받아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1956년 소령으로 예편한 이용일은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듬해 3월에는 스물일곱 나이에 경성고무(주) 상무이사로 취임, 경영 일선에 뛰어든다.

군 제대 후에도 그의 야구사랑은 계속됐다.

고향 군산에 대한 애정과 야구에 대한 사랑은 누구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성고무 전무와 사장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 창단 등 지역을 넘어 전남북에 야구부 창단 붐을 일으켜 호남야구의 전성시대를 연 인사다.

군산상고가 호남을 대표하는 야구명문으로 성장한데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함께 고 최관수 감독 영입 등과 뛰어난 인재를 찾아낸 결과물이다.

또한, 군산초와 중앙초 등은 물론 군산중과 남중, 군산상고 등 6개팀의 야구부를 창단해 야구 토양을 튼튼히 했다.

경영일선에 뛰어든 그는 경성고무 사장은 물론 우리나라 프로야구 창단에 기여, KBO사무총장‧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권한대행 등으로 활동한 야구계의 거목이자 원로.

# ‘군산야구의 키다리 아저씨’ 이용일

진정한 야구인 이용일은 군산에 야구를 육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꿈나무를 육성해 중·고교 야구부로 이어지는 계단형의 야구단 육성 계획이었다. 그는 군산 4개 초등학교 교장을 설득했고, 그 결과 1962년 2월에 군산초와 중앙· 남· 금광초 등 4개 학교에 야구부가 창단됐다.

이들 4개 야구단은 봄· 가을 리그전을 펼치며 실력을 키웠고, 1964년 졸업생부터 군산중에 입학했다. 이어 1967년 봄에는 군산중 야구부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군산고 야구부의 창단을 계획했으나 최종 무산됐다. 이 때문에 이 사장은 군산중 출신 졸업생 8명을 데리고 상경해 4명은 동대문상고에, 그리고 3명은 휘문고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그는 애써 키운 인재의 지역외 유출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이에 지역 고교 야구단 창단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듬해 군산남중과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창단 후 아낌없는 지원도 이어갔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신화 탄생… 올해로 50주년 맞아

군산상고 야구부는 창단 5년만인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역전우승, 화려하게 등장하며 고교 야구를 호령하는 명문 야구부로 우뚝섰다.

호남 연고 학생 야구팀이 정상에 오른 것은 광주서중이 1949년 제4회 청룡기대회였다.

이후 오랫동안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4대 대회에서 호남야구팀은 단한차례도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2년 7월19일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2만2,000여명의 관중이 몰려든 가운데 전통의 야구명문 부산고와 신예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군산상고에는 1970년 청룡기대회와 71년 대통령기대회에서 4강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주역들이 포진해 있었다. 스마일 피처 송상복이 마운드를 지키고, 김일권과 김봉연, 김준환, 양기탁 등 불방망이 타선이 늘어서 있었다.

군산상고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1회말 먼저 1점 선취점을 뽑았다. 그러나 3회초 동점을 허용한 뒤 팽팽하게 맞서나갔지만, 8회 초 6안타를 얻어맞으며 대거 3실점을 했다. 1대 4로 뒤진 운명의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선 6번 김우근이 안타를 만들어냈고, 부산고 마운드가 흔들리면서 1사 만루 찬스가 됐다.

1번 김일권의 몸에 맞는 공으로 2대 4가 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양기탁 선수가 깨끗한 중전안타를 쳤다. 두 명의 주자가 들어오면서 4대4 동점이 되며 야구장은 물론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리고 김준환의 천금과 같은 끝내기 좌전안타가 터졌다.]

역전의 명수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당시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을 이끈 감독은 최관수였다.

인천 동산고 출신으로 1961년 제13회 쌍룡기 결승전에서 부산상고를 노히트 노런으로 잠재운 야구천재였던 최관수는 빼어난 선수생활을 했지만 어깨부상으로 은퇴해야 했다. 실업팀에서 은퇴한 그를 붙잡은 것은 이용일이었다.

이용일은 마침 서울대 상대 선배인 정우창(전주) 기업은행장을 찾아가 간청했고, 최관수는 1970년 7월 기업은행 군산지점으로 발령, 군산상고와 인연을 맺었다.

프로야구 태동의 숨은 공로자

이용일은 경성고무를 경영하며 군산 야구를 지원하고, 특히 군산상고 야구부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과 취업 등 진로까지 책임졌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감독들이 제일은행· 상업은행· 농협 등에 포진해 있었고, 국방부 정훈장교로 근무할 때 상관이었던 이선근 동국대 총장 등의 도움이 컸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등 대어급 선수들과 함께 실력이 조금 뒤지는 선수들까지 취업 및 진학을 배려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80년을 전후해 이용일은 경성고무가 너무 노동집약적인 업종이라고 판단, 마침 종합무역상사를 출범시키고 수출업종 다각화를 꾀하던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또 10‧ 26사태와 5공 정권 탄생 등으로 정치· 사회적 혼란이 계속됐다.

이때 5공 정권은 사회적인 관심을 바뀌기 위해 프로야구 출범을 서둘렀고 이 일은 이용일에게 인생의 또 다른 기회였다.

당시 야구계의 마당발인 그는 5공 정권이 프로야구단 출범 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문공부를 오가며 프로야구 창단 후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이 된 그는 서종철 초대 총재와 함께 프로야구의 기반을 다졌다.

이용일은 1990년 12월,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9년 동안 정들었던 KBO 사무총장을 사퇴하고, 그 이듬해 쌍방울 구단주 대행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98년 쌍방울구단을 사임했다.

“1989년 제8구단 창단을 진행하던 당시 급박했던 상황들이 기억에 남는다”는 이용일 사장은 “해태의 반발 속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팀을 호남에 유치해도 좋다고 해 쌍방울과 미원(대상) 그룹이 공동출자하는 등의 조건 아래에서 제8구단 쌍방울야구단 창단이 속도를 내게 된 것”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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