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52] 경포천과 옛 얘기들… 아흔아홉다리= 송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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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52] 경포천과 옛 얘기들… 아흔아홉다리= 송경교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2.27 11:38
  • 기사수정 2022-01-17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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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다리 숙종 때 전라우도 군산진지도… ‘철도침목 99개?’ ‘ 99걸음?’ 유래 분분
군산의 한강(?) 경포천 총연장 3.34㎞ … 송경교‧ 미장교‧ 경마교 등 수많은 교량 존재
어떤 이들은 경찰서 앞 교량인 경포교와 혼돈하기도 … ‘전혀 사실과 달라’
송경교(아흔아홉다리)와 옛 군산선의 철도교량. / 사진=투데이군산
송경교(아흔아홉다리)와 옛 군산선의 철도교량. / 사진=투데이군산

 

‘경포(京浦)’란 이름이 서울과 1,000리 이상 떨어진 군산에서 독특한 지명으로 남아 있을까. 과거 수많은 물자, 즉 고려와 조선시대에 쌀 등을 조운으로 서울로 실어 나르기 위한 주요 포구여서 이런 명칭이 유래했단다.

물론 이곳에 흐르는 하천의 이름도 경포천이다.

과거 시내와 다른 곳을 연결하는 하천으로는 경포천이 시내의 중동부를 남북으로 흐르며, 구암천도 구암동을 동서로 흐르다가 금강으로 모두 유입된다.

오늘날엔 시내의 중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까닭에 이곳을 지나기 위해선 수많은 교량들을 건너야 한다.

# 경포천과 그 발원지… 고봉산자락의 한 지류

아흔아홉다리(송경교). / 사진= 투데이군산
아흔아홉다리(송경교). / 사진= 투데이군산

 

군산을 얘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곳이 경포천이다.

경포천의 발원지는 고봉산자락의 작은 지류에서 시작, 경포제수문과 연결되는 도심 하천으로 본래 9㎞에 달했지만 올해 7월 그 지류였던 옥회천과 분리되면서 3.34㎞로 크게 줄어들었다.

경포천의 금강과 합류하는 입구에는 수문이 설치되어 강물의 역류를 막고, 홍수 때는 배수구의 역할도 한다.

과거에는 아흔아홉다리가 있었고 근대기와 해방 후를 넘어서면서 수많은 다리들이 건설되기도 했다. 이 곳에는 1970년대엔 송정교란 이름으로 과거 아흔아홉다리 위치에 건설됐고 오늘날엔 미장교, 경마교, 제2경마교, 크고 작은 다리 등 약 10개의 교량 및 도로로 이뤄졌다.

옛날 옥구현 경장리의 큰 하천이 있던 아흔아홉다리에서 물을 따라 내려가면 경포가 있었는데, 그 경포의 본래 위치는 지금의 중동 로타리 부근 지역으로 추정된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모인 각종 물자들이 여기에 쌓여지고 그것을 배로 서울(개경, 한양)로 운반하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서울(京)로 떠나는 배가 드나든 갯벌(浦口)이라 하여 부르기 쉽게 ‘셔울개→서울개→설개→설애’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본보에 군산 야구 100년사를 기고했던 조종안 기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설명하고 있다. 설애에서 ‘서래’로 바뀐 유래를 나름 해석해서 적고 있다.

[옛 지명 ‘설애’가 어원변이 되어 ‘서래’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소설 <탁류>에서는 ‘스래’로 나온다. 동네 어른들도 ‘스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래’가 친근감이 있고, 향토냄새도 짙게 느껴진다. ‘물문다리’는 부근 하천의 관개용수를 가둬두는 보(洑)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 설치된 수문을 의식해 부르지 않았나 싶다.

경포천의 보(洑)는 여름에는 아이들의 야외수영장이 됐다. 해마다 여름이면 익사 사고가 몇 차례씩 일어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어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천연 스케이트장이 됐던 것. 여름에는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로 변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물가에서 웃고 떠드는 아낙들의 수다와 빨래 방망이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하다.

경포천은 옥산, 조촌, 경암 들녘의 농수로 물이 모여 지금의 경장동 ‘아흔아홉다리’와 경암동 ‘꺼먹다리’를 거쳐 물문다리 ‘보’에서 쉬었다가 금강으로 유입됐다. 주변 논에서 잡은 우렁이는 된장도 제대로 담가 먹지 못하던 가난한 시절 여름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 ‘아흔아홉다리’ 유래

군산‘아흔아홉다리’는 수많은 얘기를 낳고 있다.

조선 숙종 때(1701년) 제작된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에 나오는 강 중앙에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가 형태 변화와 건립 등을 거치면서 이름도 몇 차례 바뀌었다.

이 시절의 군산진지도를 보면 임피현과 함라에서 설애(경포)로 이어지는 큰 도로가에 큰 냇가가 하나 있었고 그 속에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의 길이가 ‘아흔아홉발자국’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까지 시민들에게 전해지는 특징적인 교량의 이름이 ‘아흔아홉다리’다.

물론 당시의 다리는 역사 속에 남아 있고 오늘날의 정식 이름은 ‘송경교(松京橋)다.

우리 조상들은 ‘아흔아홉’이란 의미를 계곡과 가옥 등에서 즐겨 사용했다. 그 의미는 ‘많다, 또는 길다, 크다’ 등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에 아흔아홉칸집은 대궐을 제외하고 가장 큰 집을 의미했고 계곡과 물길 등에도 즐겨 썼다. 다리에서 이런 수치를 수식어구로 표현했다면 그 다리가 아주 길다는 표현이다.

일제강점기에 오늘날 ‘송경교’ 옆으로 옛 군산선의 철길이 놓여 있었다. 이를 놓고 혹자들은 철교 침목의 수가 ‘아흔아홉개’라서 불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다리의 길이가 아흔아홉 발자국이 되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으나 앞서 말한 송경교의 길이가 길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내용이 있다.

군산과 전주를 잇는 2차선 도로가 1908년 건설된 이후 이 다리는 과거 나무다리이거나 조선시대 돌다리에서 시멘트 다리로 변했을 것은 분명하다.

군산 토박이들은 옛 황다방 사거리에서 팔마광장 쪽으로 오면 제법 큰 다리가 있는데 오늘날까지 이곳을 여전히 아흔아홉다리라고 부르고 있다. 이 다리와 가까운 버스승강장의 이름, 역시 ‘아흔아홉다리’라고 공식 지명처럼 불리고 있을 정도다.

# 아흔아홉다리의 전설은… 걸음 수일까? >침목 수일까?

‘길이 60m 폭 35m 크기’의 송경교는 경장동 옛 결혼회관을 지나 첫 다리로 1977년 8월에 세워졌다. 보강공사와 조형물 설치(2008년)까지 더해졌지만 퇴색된 형태로 남아 군산의 쇠락과 낙후의 작은 상징물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송경교란 이름으로 40여년을 훌쩍 넘겼는데도 옛 다리 명칭이 좀 더 익숙하고 널리 알려졌다. 이 다리는 수백년동안 군산사람들에게는 가장 익숙한 다리의 이름이자, 기억물이었다.

이 다리의 실제 길이 60m란 점을 감안할 때 조선시대 보통 성인(160cm)들의 보폭을 60㎝로 가정하면 약 100보란 수치가 나온다.

이런 속설 때문에 이 다리는 걸음을 기준으로 호떡 등 각종 내기를 했다는 말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 군산선 철도교량과 침목들. / 사진=투데이군산
옛 군산선 철도교량과 침목들. / 사진=투데이군산

 

또 다른 속설인 군산선의 하천 교량의 침목수는 어떨까.

옛 군산선 철도 교량은 송경교와 50~ 60m가량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를 확인하기 위해 필자가 직접 철도(군산선) 교량 침목의 수를 세어봤다. 교량의 초입과 마지막 부분은 8개였고 교량만의 수는 127개였다. 이를 합하면 135개에 이르니 침목수와 어떤 관련이 없는 듯하다.

이런 사실에 근거할 때 과거 군산진지도의 다리가 아흔아홉발자국이었다는 점이나 오늘날 그곳에 서 있는 송경교의 길이 60m 등을 종합할 때 다리의 길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게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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