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51] ‘팔마산-팔마재’ 존재… 추억의 고가교‧로타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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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51] ‘팔마산-팔마재’ 존재… 추억의 고가교‧로타리 등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2.21 16:30
  • 기사수정 2022-01-17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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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영광과 오욕 같이한 팔마광장… 팔마성당‧ 팔마신협 등 오늘날까지 존재
역전의 명수 등 카퍼레이드로 수놓았던 곳… 한때 팔마광장로타리 분수대 눈길
‘군산의 관문’ 주변 상전벽해… 새로운 고층 아파트 단지 변모
​팔마광장 건너편에 전북은행 경장지점과 팔마성당이 있다.
​팔마광장 전북은행 경장지점과 팔마성당.

중앙로 쪽의 옛 군산역과 원도심, 시외 및 고속버스 정류장, 번영로 등을 오가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곳이 지금의 ‘팔마광장오거리’ 다.

이곳은 대로와 소로가 얽혀 있어 일반적인 도로와 달리 오거리를 형성, 여전히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중앙로와 번영로, 해망로, 동팔마길, 경암로 등과 합쳐지거나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공간은 한때 광장이 존재했고, 그곳에서 시청 방향으로 몇십 미터가량 다시 이전하기도 했으나 오늘날은 알아보기 힘들다.

이 같은 복잡한 도로의 형태 속 나름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 회전식 교차로인 ‘로타리’설치다.

1980년 10월 전국체전을 앞두고 설치된 옛 팔마광장 분수대 화단에서 당시 고교생 두명이 야경에 빠져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80년 10월 전국체전을 앞두고 설치된 옛 팔마광장 분수대 화단에서 당시 고교생 두명이 야경에 빠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로타리 설치는 한때 대유행이었다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동 사거리와 중앙로의 옛 경찰서 앞, 팔마광장 로타리 등이 교통흐름문제 등을 이유로 철거됐다. 물론 오늘날 그 장점이 다시 부각, 재설치되는 곳도 몇 군데 있다.

이 도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은 아무래도 전군도로다.

이곳의 유래를 알리는 본보 군산야구 100년사를 취재한 조종안 기자가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이 있어 소개하자면 이렇다.

[1908년 일제가 호남평야 쌀 수탈을 위해 전국 최초로 개설한 신작로(전군도로)를 ‘대한길’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팔마재를 넘어가는 사람이면……' 대목이 눈길을 끈다. 당시엔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다녔고, 기념비도 ‘고개(峙)’ 입구에 세워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어서다. 옛 지도를 보면 팔마산은 경포천까지 뻗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이 옥구선(군산-옥구) 개설하면서 상당 부분 잘려 나간다. … 중략…]

# 팔마산과 팔마재… 흥남공원과 추억의 쌀시장 풍경들

팔마산은 동흥남동에 있는 산으로 해발 43.7m.

지형이 여덟 마리 말이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산 서남쪽 아래에는 군산고등학교와 전주교대 부속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이 산은 흥남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 정상에서 보면 사방팔방으로 군산 시내가 눈에 들어오고 다른 산들이 연이어 보이는 그야말로 군산(群山)임을 보여준다. 이 야산은 한국전쟁기 이후 초가집과 판잣집 모양의 촌락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2011년 자연재해위험지구로 지정, 경관 숲이 조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남공원(팔마산)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 사진=투데이군산
흥남공원(팔마산)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 사진=투데이군산

 

옛날에는 군산사범학교(지금은 군산고) 등의 뒷산이 팔마산이었고, 사정동 방면에서 한일아파트 쪽 철로 건널목 주변을 잇는 고개가 ‘팔마재’였단다.

이곳 주변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다뤄보자.

이 산을 뒷산으로 한 군산사범은 1946년 9월 10일에 설립 인가를 받아 1947년 2월 22일에 제1회 신입생 입학식을 갖고 개교됐다.

군산사범은 사범과(본과)와 1년제의 강습과를 개설하였는바, 강습과는 1948년 7월 18일에 제1회 수료식을 거행한 이래 5회에 걸쳐 451명(남 260명, 여 191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1950년 4월 1일에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고, 1951년 7월 14일에 사범과(본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한 이래 1963년 2월 28일에 폐교될 때까지 13회에 걸쳐 2,698명(남 1,999명, 여 69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62년 2월 17일 교육대학 설치방침에 따라 당시 문교부는 전라북도의 경우 전주교육대학을 설치토록 했다. 군산사범은 1963년 2월 28일자로 폐교됐고, 그 자리에 군산수산초급대학이 설치됐다가 후에 군산대로 흡수됐다.

군산사범은 해방 후 급격한 취학아동 증가로 인해 이를 교육시킬 예비교사들을 양성하고자 팔마초등학교(국민학교)의 교사(校舍)에 둥지를 틀었으나 그나마 1961년 화재로 소실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팔마초등학교는 해방 직후까지 존재했으나 이 학교를 잇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팔마재는 철로를 따라 지금의 군산고 쪽에 있는 팔마산으로 도는 곳을 ‘바람매’라고 했다. 물론 바람매라는 말의 유래는 이곳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바람이 돌면서 많이 분다고 해 붙여진 이름.

지금은 군산이 크게 변해 건물이 우뚝 서 있는 에이본호텔(옛 군산관광호텔)쪽이나 최근에 사라진 팔마고가교가 있었지만 그 당시는 팔마재의 건널목을 거쳐야 옛 군산역이나 지금의 구시장 방향으로 갈 수가 있었다.

옛 군산역의 진입철로가 과거 영광을 뒤로 하고 녹슨채로 남아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옛 군산역의 진입철로가 과거 영광을 뒤로 하고 녹슨채로 남아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그 당시만 해도 이곳 팔마재는 아침이면 회현, 대야, 옥산, 상평 등에서 지게는 물론 마차와 소달구지 또는 리어카, 짐자전거 등으로 쌀들을 싣고 와서 사고파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단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가져온 쌀의 품질을 알아보기 위해 ‘삭대’라는 대나무나 쇠로 만든 도구로 쌀가마니를 찔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가격이 정해지고 또한 삭대로 가마니에 넣어다 하면 자연스럽게 땅바닥에 떨어지면 그 쌀을 쓸어 같을 정도다. 이 삭대는 쌀이나 보리 품질 검수에도 활용된 도구다.

이곳에는 영일상회, 유성상회, 대풍상회 등 쌀가게들이 집중됐다. 물론 지금은 이런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촌로들과 장년층들의 전설과 같은 얘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팔마재라 하면 군산의 관문이요, 또한 쌀시장이 형성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옛 군산관광호텔이나 전북은행 경장지점, 옛 군산농협 팔마지점, 옛 결혼회관 등이 그 중심지이다. 물론 과거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원형로타리로 이뤄져 자동차들이 중동이나 역전 및 경장동 쪽으로 돌면서 주행했고 저녁이면 분수대에서 오색 물결이 치솟으면 분수의 모양이 아름다워 군산의 명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팔마재 인근에 당시 최고 랜드마크는 결혼회관.

80년대 초반 완공된 이 건물은 태전약품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오모(작고)씨가 건축했는데 당시 지역 청춘 남녀들의 결혼식장이었고 각종 회합의 장소로 각광을 받았던 공간이다. 군산청년회의소에서 활약했던 그는 사업상 문제 등으로 얼마 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했다. 오늘날은 다른 대규모예식장과의 경쟁에서 밀려 본업을 포기하고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평범한 건물로 남아 있다.

옛 결혼회관 건물이 세월의 흐름과 경쟁에 밀려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옛 결혼회관 건물이 세월의 흐름과 경쟁에 밀려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팔마성당(본당)은 1969년 4월 1일 둔율동 본당에서 분리돼 중동본당으로 처음 설립됐다. 이어 1976년 3월 경장동에 새 성당을 짓고 봉헌하면서, 성당 소재지의 옛 명칭인 ‘팔마재’란 이름에서 따 팔마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 ‘결빙의 상징물’ 팔마고가교… 32년 만에 철거

이곳은 군산역 진입선로와 도로가 마주하는 바람에 사고 우려와 저지대라는 특성 때문에 불가피하게 ‘팔마고가교’를 만들었다. 그전에는 우회하는 작은 도로(오늘날 동팔마길)가 있었으나 1976년 개설돼 중앙로의 핵심적인 이동로였다.

하지만 2008년 9월, 32년 만에 철거됐다.

32년 만에 사라진 옛 팔마고가교가 한때 군산의 중심도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 사진= 군산시제공
32년 만에 사라진 옛 팔마고가교가 한때 군산의 중심도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 사진= 군산시제공

 

철거 후 폭 25m 왕복4차선의 도로로 시원스럽게 변했고 주변은 말끔히 단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도로가 중앙로다.

옛 군산역이 현재의 군산역으로 2008년 1월1일 이전, 군산화물역으로 바뀌었다가 그 해 7월1일 폐역됐던 얼마 후 시기에 팔마고가교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 고가교는 시행청인 군산시와 업무 문제로 시공사와 마찰이 돼 다툼을 벌이는 촌극도 있었단다. 이 때문에 당시 시 관계자들이 사법당국 등을 오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종 승소해 마무리된 것이다.

팔마고가교는 왕복 2차선(폭 8.5m)에 총 길이 240m로 결빙이 되는 차가운 겨울이면 시청소속 수로원과 직원 등이 늦은 밤이나 새벽이면 제설작업을 하느라 큰 곤욕을 치렀다.

당시 제설업무를 했던 한 시청 직원은 “눈이 오면 철야를 하기 일쑤였다. 특히 빙판길이 다 된 이곳을 통행할 수 있도록 다량의 염화칼슘 등 각종 제설제를 뿌리면서 뜬 눈으로 차가운 겨울밤을 지새워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에는 차량들이 거북이걸음을 하듯 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곳을 오르려다 미끄러져 차량들간 교통사고로 이어지는 사례도 빈발했었다.

그 시절 회식이나 술 한잔 마시다 눈이 오는 날이면 밤샘 작업에 투입됐던 이들은 푸념과 함께 당시 애환을 추억담처럼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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