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 49] 자동차 등장 약 100년 만에 산업도시 위상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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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 49] 자동차 등장 약 100년 만에 산업도시 위상 ‘추락’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2.10 16:19
  • 기사수정 2022-01-17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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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몰락… 제2의 울산 자동차 꿈꾸다 지역경제 급추락하는 아픔도
상용차 및 자동차의 영욕… 지금은 인도 다국적 기업 등의 손으로
1세기 전엔 교통수단 대변화… 내연기관에서 전기자동차 시대로 이행

 

일제강점기 들어 군산에서 특징적인 변화가 교통의 발달이다.

군산의 근대교통시설은 개항 이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인력거와 철도, 근대적인 선박, 자동차 등의 등장이다.

이 시기에 눈에 띄는 교통수단 흐름은 자전거 시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의 출현이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자동차 발전의 시대가 본격화됐지만 전편에 다룬 철도 발달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군산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내용을 다뤄야 할 것같다.

대한제국시대에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1910년대를 지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큰 변화기를 맞았는데 장거리 버스 영업이 시작됐다.

1920년대 들어 승합버스가 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보통 15인승 또는 20인승 규모였다.

군산자동차 출현도 이 무렵 본격화됐다. 전주~ 군산, 군산~ 익산간 노선이 황금노선이었고 아마도 군산역과 인접한 곳에 오늘날의 버스 정류장(직행버스 터미널)을 오가는 노선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군산은 근대기 산업발전과 임해공단을 지녔던 까닭에 우리나라 몇 번째 안가는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자동차 시대 도래 약 1세기 만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들어섰고 관련 산업의 발전이 가속화됐을 뿐 아니라 자동차 도시 군산의 위상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 찬란한 역사도 공장 설립 21년 만에 좌절에 가까운 아픔을 겪어야 했다.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한국지엠이 2018년 2월 영업상황 악화 등을 이유로 군산공장 철수 결정을 내렸다.

 

얼마 후 명신이 이곳을 매입하고 전기자동차 생산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대감을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왜 뜬금없이 자동차 문제를 거론했느냐면 도내에서 자동차 시대를 연 선봉장이었을 뿐 아니라 옛 군산역 주변의 직행버스 터미널(군산농협 중미지점 주변)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장을 마련했다.

이에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와 산업발전의 흐름뿐 아니라 군산자동차산업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내용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뤘다.

#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등장과 첫 운전자

1903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미국 공관을 통해 포드 또는 캐딜락 승용차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로 들여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등장한 자동차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에는 서양외교관이나 기술자 또는 선교사들이 갖고 온 자동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로 보이는 차는 1901년 봄 미국 시카고대학의 사진학교수이며 여행가였던 버튼 홈즈가 한강을 구경하러 가다가 소달구지를 들이받아 사고를 낸 차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어용으로 들여온 차가 4대로 1911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찌가 고종 환심용으로 들여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과 대신들이 자가용으로 몰고 다니기 시작했던 1913년경부터 비로소 일부 층들도 자동차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1년 전주에 살았던 일본인 에가와는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 삼천포 간을 달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영업을 시작했었다고 전해진다. 이 차량은 보통 10명까지는 탈 수 있었으며 저녁에는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버스요금은 1인당 마산~진주간이 3원80전, 진주~ 삼천포간이 1원30전이었단다. 이 요금은 쌀 한 가마니 값이었으니 꽤 비싼 편이었다.

1913년 서울 낙산 부자 이봉래와 일본 청년 곤도, 그리고 장사꾼 오리이 3인이 합작해 20만원으로 첫 자동차회사를 세우고 ‘포드 T형’승용차 2대를 구입,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 영업을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의 택시의 시초이며 이때가 우리나라 운송사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914년 영친왕 이은 공(公)이 미국제 오버랜드를 들여왔을 때, 1915년 윤권이라는 사람이 이 차를 운전,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사가 됐다.

원래 전직 마차부였던 윤권은 1914년 이태리 공사관에 근무하던 중 공관 자동차로 운전을 배워서 의친왕의 오버랜드를 몰게 됐다. 당시 그는 금테 두른 검정 정장 운전복을 입고 고등관 행세를 하며 출세해서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 군산의 자동차 시대 ‘도래’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차비가 택시보다 훨씬 저렴한 승합버스가 지방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승합버스라고 해야 오늘과 같은 40~ 50명을 태우는 대형버스가 아니나 15인승 또는 20인승 버스였다. 북한에서는 길도 험했고 좁아서 힘들었지만 남한에서는 수많은 버스업자들이 경쟁에 뛰어들어 치열했다.

전주토착부자였던 최종열‧ 승열 형제가 세운 공화자동차부의 영업이 잘되자 군산자동차부가 생겨났고 또 이어서 마학진이라는 군산 대지주가 뛰어들어 3파전이 벌어졌는데 당시의 황금노선은 전주~ 군산, 군산~ 익산(이리)간 노선이 승객이 가장 많았다.

한편 1920년대 말 서울과 전주에 터를 잡고 살던 ‘애가와’라는 일본인이 서울에서 강천상회라는 조그만 공장을 만들어 왕실의 자동차들을 수리해주고 무개차의 지붕도 만들어 씌워주는 작업을 한 것이 원시적인 한국자동차공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또 일본인 구스모드는 만주사변 직후 서울에서 가장 큰 포드대리점을 인수하고 서울 인현동에 대지 6600㎡(약 2000평)을 구입해서 자동차 차체 제작공장과 정비공장을 세운 후 20인승 및 30인승의 대형버스를 최초로 제작, 시중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본격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해방 후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폐차로 있던 군수용품인 트럭 짚차, 스리쿼터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차량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운수업자나 정비업자들이 버스나 트럭으로 개조해 사용하는 재생자동차산업이 번창했다.

당시 부산에서 1955년 2월 설립된 신진공업은 미니 합승버스 25인승차를 2,000여대나 만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이 합승버스가 서울에서 운행할 때는 노란색 페인트칠을 해서 운행했다고 해 당시 사람들은 ‘노랑차’라고 불렀다.

기아산업(현 현대기아자동차로 1944년 설립된 경성정공의 사명 개칭)이 1952년 10월 설립됐다. 우리나라 첫 국산차는 1955년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차축 등을 이용해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첫 지프형 승용차 ‘시발’을 내놓았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국산차는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으나 한 대를 만드는데 수 개월이나 걸린데다 시발차의 값이 8만환에 달할 정도로 비싸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7년 광복 12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때 최무성이 시발차를 출품, 최우수상품으로 선정됨과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 덕분에 을지로 입구에 있던 그의 천막공장에는 시발차를 사려는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으며 이로 인해 가격도 하루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한 달도 못돼 1억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양산체제를 돌입했지만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 후엔 시발 투기 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들 사이에선 ‘시발계(契)’까지 성행,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생산되면서 이차는 큰 타격을 입었다.

재일교포 박노정은 1962년 1월 닛산과 기술제휴로 새나라 자동차가 설립됐고 한국자동차 공업의 현대화 기수로서 역할을 했다. 이후 자동차회사들의 설립은 줄을 이었다.

현대자동차가 설립된 때가 1967년 12월이었다.

현대차는 1975년 국내 최초로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과정을 국내 기술진에 의해 이뤄낸 첫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했고 단일차종으로서는 1984년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했다. 이에 따른 자동차 대중화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 ‘대우자동차 도시’ 군산 부상… 그룹 해체- 지엠 인수- 최종 ‘명신’ 손에

대우자동차는 1965년 신진자동차공업(주)으로 출발한다.

또 신진자동차와 미국의 GM이 합작, GMK를 설립했고 1976년 새한자동차(주)로 회사명이 변경된 뒤 1983년 대우자동차로 통합됐다. 1978년 대우실업(주)이 경영에 참여했고 후에 대우자동차로 상호로 변경한 뒤 1991년 국민차 티코생산을 시작했다.

1998년 쌍용자동차(주)를 인수하면서 경차부터 대형승용차, 사륜구동 지프형차에 이르기까지 전차종 풀라인업 체제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대우사태 등으로 영업력이 약화되면서 1999년 8월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지정됐고 2000년 9월 최종부도가 나 그해 11월 회사정리절차가 결정됐다.

2001년 9월 GM과 매각양해각서를 체결, 2002년 4월 신설법인 설립에 대한 최종계약을 맺고 인수했다. 2002년엔 지엠 대우로, 2011년엔 한국지엠주식회사로 각각 변경했다.

하지만 한국지엠은 2018년 2월 군산공장에서 철수 결정을 내렸다.

앞서 당시 대우자동차는 1996년 소룡동 앞바다를 매립한 129만㎡에 공장을 완공하고 12월 '대우 누비라 1호 차'를 처음 출고했다.

옛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전경. / 사진= 군산시제공
옛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전경. / 사진= 군산시제공

 

대우자동차가 1997년 4월21일 당시 고건 총리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첫 생산된 자동차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군산의 대우차 도시는 화려하게 개막됐다.

한때 전북수출의 4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위상을 갖고 있지만 한국지엠 철수 이후 명신에 관련 시설과 부지가 매각,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신은 2019년 6월 한국지엠 공장을 인수했지만 수년 째 대량 생산 일감이 없다. 인수 후 중국 바이톤과 2021년부터 연간 5만대 수준의 위탁계약을 맺었지만 이후 바이톤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하면서 두 회사 간 거래는 무산됐다.

우여곡절 끝에 명신이 최근 미국 패러데이퓨처(FF)와 전기차 위탁생산에 최종 합의하고 오는 2023년부터 연간 25만대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넘어야 할 산은 엄청나다.

한편 대우상용차는 대우자동차의 트럭 제조 부문이었다가 현재는 인도 타타그룹 산하의 트럭 메이커로 변한 것이 오늘날의 타타대우상용차다. 대우자동차가 부도날 때 회사가 분리 매각되어 버스 부문은 영안모자가 인수해 자일대우상용차가 됐다.

트럭 부문은 2002년에 대우상용차라는 별도의 독립법인으로 있다가 2004년 7월 인도 최대의 대기업인 타타그룹에서 인수해 현재의 타타대우상용차가 됐다.

# 희대의 지성룡 일경 사건과 겹친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기공식

필자는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준공식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물이 있다.

한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池) 일경의 행방불명사건이 해결되는 날이 우연하게 겹쳤던 실화여서 그 내용을 소환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지성룡 일경이 군산소재 전북경찰청 제506전경대에서 복무를 해오다 1990년 12월26일 2박3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귀대를 위해 집을 나선 후 돌연 행방불명됐던 내용이다. 이 사건 이후 2년 가까이 사회적인 파장과 함께 경찰 수사 대처문제 등으로 전북과 전국언론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근무하던 도내 J사의 사회부 막내 기자로 있었는데 경찰 출입시절부터 그의 타살 의혹 등 온갖 설이 난무했다. 이에 따른 경찰들의 초동수사와 조사가 문제돼 수많은 직원들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이 기억에서 멀어질 즈음,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준공식이 열리던 1993년 4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기공식에 도내 언론인과 기관장 등을 초청, 당시 전주소재 담배인삼공사의 폐공장부지(오늘날의 SK뷰아파트) 인근에 있었던 한 대형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던 때였다.

연이은 ‘삐삐 음’이 울려 전화를 했더니 사수였던 선배가 지 일경이 서울에서 잡혔다고 알려왔다.

그 당시 취재로 확인되지 않아 그는 암매장됐을 것이란 추측들이 일반적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일이냐고 출입처인 전북경찰청으로 가보니 교통사고를 낸 오토바이를 붙잡아 신원 조사를 하던 중 지 일경의 존재가 확인된 것.

한 중앙일간지의 신문배달원으로 일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면서 그의 생존이 알려져 그동안 수없이 기사를 보도했던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이를 다뤘던 당시 언론인들의 얼굴들이 요즘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희대의 실종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 일경이 붙잡힌 며칠 후 지 일경의 부모들이 기자실과 전북경찰청을 들렀는데 죽은 자식이 살아왔다는 사실에 환한 모습을 하고 떠나던 광경이 아련하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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