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39] 군산 첫 상설시장 ‘공설시장’의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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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39] 군산 첫 상설시장 ‘공설시장’의 탄생 배경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9.29 11:47
  • 기사수정 2022-01-17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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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초 대형마트형 재래시장 탈바꿈… ‘쇼핑과 문화생활 한 곳에서’
공설시장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시장규칙에 근거… 구시장 역사와 달라
1918년 장재동 청과물시장이 시원(始原)…일제 식민지 상권 장악의 산물

구시장로의 최고 건물은 뭐니 뭐니 해도 군산공설시장일 것이다.

군산의 전통시장 원형은 400년 전통의 경장시장(설애장)이 근원이라 할 수 있지만 개항 후 군산장(場)이 만들어지면서 급격히 쇠락을 거듭하다 사라졌다. 그 후예들은 여러 형태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엔 일제의 집요한 상권장악에 따라 기존 전통시장은 힘을 잃고 새로운 형태의 시장이 탄생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공설시장이다.

공설시장의 시원 또는 탄생 배경을 놓고 분분하다.

공설시장의 역사성에 대해서 일부는 과거 원도심권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구시장과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 역사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전통시장으로 오인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논란에도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산물이란 점이다. 그렇다고 100년 이상 지역 서민의 애환과 유통중심지라는 위상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 군산장의 탄생

군산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군산개항 후 시내권의 급격한 인구증가와 함께 당시 군산의 인구가 조선시대의 옥구‧ 임피현 중심에서 벗어난데 따른 것이다.

특히 지금의 중앙로와 둔율동, 신흥동, 영화동 등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가까운 곳에 장이 있어야 한다는 편리성에 기반을 둔 경제적인 요인까지 작용했다.

시장 성립의 결정적인 원인은 1912년 군산선이 개통, 군산에 철도가 들어오면서 역 주변의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현재의 신영시장 자리 인근과 군산역 앞 광장에 5일장이 서게 된 것이다.

이 장(場)을 당시 사람들은 '군산장'이라 불렀는데, '군산장'은 처음에는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이었고 우(牛)시장이 서는 매우 큰 장(場)이었단다.

이 때문에 400년 전통의 경장시장은 사실상 새로운 군산장에 흡수돼 차츰 소멸의 길에 접어들었다.

일제는 청과물시장인 장재동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군산역 앞의 군산장을 단속하자 미원동 옛 미원파출소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가 군산장(5일장)을 지속하는 끈질김을 보여줬다.

미원동의 시장을 ‘새장터’라 부르고, 신영동 시장 자리를 ‘옛시장’, 즉 구시장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공설시장의 탄생 배경… 일제 식민지 지배논리

일제는 강점 후 상권 장악 차원에서 군산은 물론 전국의 시장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강점 직후인 1910년 12월 일제는 고전적 식민지개발이론에 따라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을 발포하고 우리나라를 그들의 원료생산지 및 공업제품의 판매시장으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곧이어 1914년 9월에는 ‘시장규칙(市場規則)’을 제정하여 시장의 정비에 착수했다.

이때에 만들어진 시장규칙은 몇 차례 개정되기는 하였으나 8·15광복으로 일본인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15년이나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시장을 규제하는 장치로 작용하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공포된 우리의 시장법이 작동됨에 따라 비로소 폐지됐다.

이런 식민지 법령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공설시장.

‘시장규칙’은 제1조의 규정에 따라 시장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 상설 또는 정기의 재래시장을 ‘제1호 시장’이라 하고, △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건물 내에서 주로 곡물이나 식료품의 판매업을 행하는 이른바 공설시장은 ‘제2호 시장’이며, △ 위탁 또는 경매의 방법으로 어물이나 채소 등을 거래하는 시장은 ‘제3호 시장’이라 한다. 제2호 시장과 제3호 시장을 합쳐 ‘신식시장’이라고도 한다.

시장규칙이 실시된 이후 현대적 감각의 다양한 시장들이 개설, 운영되기 시작하였으나 이것은 일반 수요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제의 시장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편, 다름 아니었다.

예컨대, 생선과 청과물 도매시장에 적용된 이른바 ‘1 도시 1 시장주의’는 신선한 상품의 원활한 공급과 공정한 거래질서의 확립, 그리고 시민의 보건위생의 증진 등을 그 존립 이유로 삼고 있다.

그럴듯한 명분은 있지만 그 실상은 일본상인들에게 독점적 판매권을 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1910년 부산의 부평동에 세워진 부평정시장(富平町市場)이 공설시장의 효시라고 한다. 그 뒤 공설시장은 일상 생활용품의 수급 및 가격의 조절과 보건위생 등의 이유를 앞세워 전국의 큰 도시에 하나둘씩 개설되어 1938년에는 모두 29개 소에 이르렀고, 계속 큰 폭으로 늘어나 1941년에는 53개 소에 달했다.

도시의 발달과 주민생활의 향상이 증가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으나 이때의 주민은 일본인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공설시장의 이용자는 9할 정도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생선과 청과물을 주로 거래하는 제3호시장의 효시는 한일합방 전인 1904년 어획물의 처리를 위하여 부산에 설치된 부산수산주식회사의 어시장이라고 한다.

시장규칙이 발효된 이후에 사설시장이 공영시장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제3호시장은 일제시대를 통하여 큰 증감없이 대체로 34∼38개 소가 운영되어 왔는데, 이것은 위에서 서술한 바 있는 ‘1도시 1시장주의’가 적용되었기 때문.

이런 일제의 ‘시장규칙’에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군산공설시장’.

1918년 장재동 일원에 새롭게 시장 개설됐다. 중앙로의 구 경찰서 앞 서울분식 골목에 들어선 식료품시장이었다.

이른바 일제의 시장규칙에 따르면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건물 내에서 주로 곡물이나 식료품의 판매업을 행하는 이른바 공설시장인 ‘제2호 시장’이다.

1930년대 들어 철도와 항만 등의 발달로 군산공설시장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잇는 중심 상권으로 부상했다.

군산공설시장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복구 과정을 거치면서 장옥(長屋)을 세워 시장을 운영하다가 도시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1970년에 1층 건물을 세웠다. 1981년에 2층을 세워 모두 490개의 점포를 가진 시장이 되었다. 여기에 130여 명의 노점상을 시장 내로 끌어들여 대규모 종합시장의 면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도시발전과 건물노후 등으로 재건축이 불가피하게 됐다.

2006년 이곳을 재건축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인근 철도부지로 옮겨가 영업을 하다 신축과 함께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 공설시장의 변신

2012년 현대식으로 새롭개 개장된 군산공설시장의 전경. / 사진=투데이군산
2012년 현대식으로 새롭개 개장된 군산공설시장의 전경. / 사진=투데이군산

 

과거 공설시장은 긴 역사와 달리 낙후와 노후의 상징과 같은 멍에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용 고객들의 불편은 물론 화재 위험 등이 노출된 평범한 시장이었다.

시가 이런 상인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침체된 전통시장 환경개선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정책적인 목표로 삼고 예산확보에 적극 나선 것이다.

2010년부터 2~3년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 쇼핑과 문화생활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전국 최초의 마트형 전통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이 시장이 전국 최초 ‘대형마트형’ 군산공설시장.

공설시장은 전국 최초로 냉난방시설 뿐 만 아니라 무빙워크와 유아놀이방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지상 3층의 현대식 시장으로 신축됐다. 규모만도 부지 1만942㎡, 연면적 2만763㎡의 초대형 시설이다.

2012년 3월16일 신축과 함께 영업을 시작, 전통시장의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 첫 마트형 시장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이곳은 대형마트와 맞먹는 규모로 1층에는 농․ 수․ 축산 식품 및 간편한 먹을거리 가게와 마트 등이 들어섰다.

군산공설시장 내부 상점들.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공설시장 내부 상점들. / 사진=투데이군산

 

또 2층엔 의류‧ 침구‧ 커튼‧ 안경‧ 귀금속‧ 핸드폰‧ 이미용실 등의 업종과 전문식당가가 배치됐다. 3층에는 쉼터와 여성교육문화공간이 자리했다. 건물 안팎의 주차면도 488대분에 달한다.

지상 3층 규모의 시장건물에는 모두 282개 점포가 입점해 있고 특히 대형마트 등에서는 볼 수 없는 방앗간, 대장간, 약재상 등까지 입점해 있어 전통시장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게 된 전통시장이다.

이와 함께 짐을 내리고 싣기 편하도록 각층마다 구비된 상품 하역장도 마련돼 있고 여기에다 엘리베이터, 상인휴게소 등 상인 편의시설 개선에도 힘썼다.

항구도시답게 선박을 본떠 건물 외관을 디자인했고 옥상에는 생선을 씻어 말리는 덕장도 갖췄다. 전국 전통시장 가운데에는 유일한 곳이어서 시장 부활의 선봉장이 될지에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실제로 시장 개장 후 현대식 건물로 재단장한 군산공설시장의 놀라운 변화를 둘러보려고 전국 자치단체 및 재래시장 관계자들이 몰려들었다.

시와 공설시장 번영회에 따르면 그동안 포항, 안산, 서울, 경북, 속초, 당진 등에서 자치단체 공무원 및 시장 상인들의 견학이 줄을 이었고 인터넷 동호회인 등 일반 시민들의 방문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유명해진 것은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2017년 2월 문재인 대통령 후보와 경쟁하던 시기에 공설시장을 방문, 지역상인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한데 이어 대화를 하기도 했다.

이때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와 만났다.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그는 각 지자체의 지역화폐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지역상권 보호에 대해 역설했었다.

시비와 국비 290억원이 투입된 공설시장의 현대화사업 이후 시장의 매출이 곱절로 늘면서 상인들도 신바람이 나 있다.

이런 시설에도 상인들은 서비스 부문에 대한 노력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장 재건축이 추진된 2009년 이후 중소기업청 산하 시장경영진흥원으로부터 경영․ 서비스 교육을 받은 등 쇄신의 노력을 펼쳐왔다.

특히 눈길을 끌고 있는 공설시장 내 2층에 있는 청년몰. 청년몰 조성사업과 청년몰 활성화 및 확장지원사업 등을 통해 시장 활성화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입점상황도 바닥을 찍고 새로운 변화를 통해 고객과 호흡하고 있다.

# 공설시장의 산증인 ‘경성대장간’

공설시장 입구의 경성대장간. / 사진=투데이군산
공설시장 입구의 경성대장간. / 사진=투데이군산

 

8년 전 김창호 당시 공설시장 번영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공설시장에서 아버지에 이어 2대째 대장간(경성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장인이다.

김 회장은 처음에는 다른 직업도 관심 가졌지만 우리 전통의 것이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워 시장 일을 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장간을 물려받아 맹렬한 공설시장 지킴이가 됐다.

그때 그와 만나 나눈 얘기다.

▽2대째 이어온 가업이자 생업인 대장간 이용객들은 주로 누군가요.

=가업으로 하고 있는 대장간의 운영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값이 싼 중국산의 공세로 철물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는 제품들의 다수는 중국산입니다.

하지만 무게나 부피가 큰 제품이라든가 제품의 질이 필요한 경우는 수입할 수 없어 서천과 보령 등지에서 저희 가게까지 찾고 있습니다.

저희 가게에서 취급하는 제품만도 1000여 가지에 달해 모든 것을 만들 수 없지만 강쇠로 만든 제품은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개를 까는 갈퀴는 직접 만들어야 강하고 이를 쓰는 사람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어 경쟁력은 여전합니다.

▽대장간 사업에 대한 긍지를 말씀해주신다면.

=우리 전통의 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적지 않지만 이런 분야에서 가업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다른 대장간과 달리 수직계열화로 철물점을 운영하는 까닭에 아직까지 경쟁력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동종업종의 경우 과거 나이 든 분들이 종사해왔는데 그분들이 많은 연세가 드셨거나 돌아가시고 있어 기술 계승 등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명인이 되기 위한 절차가 까다로운 것도 현실입니다.

이를 테면 저의 부친의 경우 대장간 분야의 명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췄지만 온갖 서류 제출 등 번문욕례와 같은 형식요건으로 인해 포기했을 정도입니다.

절차를 극소화해서 사라져 가는 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한 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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