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⑤] 향어양식 김제시 백산면 이문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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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귀촌에 성공한 사람들⑤] 향어양식 김제시 백산면 이문석씨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0.09.1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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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논농사보다 3~5배의 수익 창출하는 ‘향어 사랑꾼’
양식장 옆 사무실에서 숙식 해결하며 향어양식 3년째 열공 중
공시생‧ 시민사회단체 상근직 활동 등 거쳐 인생 2막 도전
수익구조 다양화가 과제 … 지원자금 대출조건 완화 등 제도 개선 촉구

다니던 대학을 자퇴한 뒤 공시(公試)생과 시민사회단체 활동 등을 거치며 늦깎이 어업인으로 삶을 도전한 이가 있다. 40대 후반의 인생에서는 자신과 익숙한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야말로 질풍노도처럼 어업인의 길로 빨려들었단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제시 백산면 돌제마을 이문석(48)씨.

문석씨는 인생을 투쟁하듯 질주해온 것처럼 그의 어업인으로서 도전도 거침없었다. 그의 경우 독학에 가까운 어업인으로의 길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무모함, 그 자체였다.

늦깎이 어업인인 그의 고군분투기와 인생 역정을 들어보자.

그의 고향 김제는 전국 최대 곡창지대이지만, 전형적인 논농사에서 서서히 양식어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특정 양식어업 분야에서는 이미 전국적인 생산지이기도 하다.

운석씨의 도전은 어업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살아온 백산면의 경우 논농사도 있었지만, 산촌처럼 밭농사가 상당해서 청소년기에는 나름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면서 살아왔단다. 그래서 농사에는 상당한 이해도가 있었다.

하지만 고교와 대학 때에는 인근 도시에서 학교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논농사와는 한동안 거리를 뒀다.

대학 재학 중 군 생활을 마친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형님 등과 상의도 했다. 지방대학을 졸업하면 취업 등에서 불리할 뿐 아니라 제대로 직장을 잡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과감히 자퇴를 결심했다.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곧바로 상경,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공시족(公試族)이 되었지만 선택권이 많지는 않았다.

그전에도 서울 생활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공시족의 길을 걸은 때는 군 제대 후였다. 우리나라 공시족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노량진은 그야말로 엄청난 청년취업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쟁터였고 고단한 청춘들의 집단촌이었다.

공시를 준비하는 나날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한평(3.3㎡)도 채 안 된 작은 공간에서 숙식하며 시험공부를 하는 삶은 고달팠다. 그야말로 극심한 시험경쟁률은 물론 수험생활의 부대비용 등을 생각하면 감옥생활, 다름 아니었다.

열심히 했지만 취준생의 삶에 지쳐 포기해야 했다. 3여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이런저런 노력을 거듭했으나 만족스러운 직업들을 찾기란 쉽지만 않았다.

 

그러던 2000년대 중반 어느 날이었다.

자신과 가까운 분의 큰 우환이 엉뚱하게도 보건의료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으로 이끌었다.

처음부터 시민사회단체의 일을 걷거나 계획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소중한 분이 ‘암’에 걸리자 그 문제점과 이를 해결하고자 첫발을 내디뎠다. 물론 아는 이의 이끌림도 있었다.

암에 걸리면 환자 자신은 극심한 고통에 빠지게 되고, 그 가족들은 엄청난 비용 때문에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야말로 나락의 길에 빠져든다.

선진국 등의 사례에서처럼 사회적 관심, 아니 정부가 그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치 않겠느냐는 근본적인 물음 때문에 그 활동에 있는 힘을 다했단다. 아마 5~ 6년쯤 활동했던 것 같다.

이 시기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결과물은 과중한 암환자들의 건강보험 부담 문제였다.

보험 확대 적용에 대한 투쟁은 길고도 길었다.

여론 환기를 위한 홍보에서부터 가두투쟁, 정당에 요구하는 성명서, 농성 등에 이르기까지….

이런 요구를 정치권과 정부 등에서 받아들이면서 암환자의 (건강보험제도) 부담문제는 획기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암환자의 경우 기존 본인 부담이 30%에서 20%로 줄었고, 후에는 더욱 경감되는 상황에 이르는 투쟁에 참여했었다.

암환자 건강보험 지원제도의 정착 등의 엄청난 성과가 그가 속한 시민사회단체의 노력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대단한 결실이었지만 40살을 넘긴 자신에게는 경제적인 희생과 삶의 피폐뿐이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생활해야 했다.

‘이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회의와 번민을 하던 그 무렵,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연로하신 어머님만 농사를 짓게 하는 일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갔다.

자신 때문에 노모의 엄청난 고생은 사회운동에 앞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과 함께 낙향을 결심했다. 물론 1~ 2년 동안 시민사회단체활동을 하면서도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돕기는 했지만, 이젠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2014년 귀향했다.

낙향과 함께 어머님의 논농사 1만6000㎡(5000평)를 이어받았지만, 매출은 4000만원 안팎에 불과했다. 순수익으로 보면 그 절반에 그쳐 겨우 밥 먹고 사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농자재값과 각종 경비 등을 고려하면 농사에 대한 희망이 없어 변화를 고민하던 때, 인근에서 양식어업을 하는 분이 “향어양식을 해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뜻하지 않은 권유였다.

문제는 그 분야에 문외한이란 점이었다.

‘어떻게 하지?’라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분에게 직접 배우기로 하고 새로운 길로 향했다. 2017년이었다.

자신에게 향어양식을 권유했던 분의 아들에게 양식장의 주요 시설 설치와 운영 방법 등에 대한 도움을 받았다. 그는 10년가량 향어양식업을 해온 베테랑이었다.

부화와 치어구입에서 키우는 방법 등을 어깨너머로 공부했고 2018년 기본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는 한편 익산시 황등, 고창, 백구 등 교육기관 등을 돌면서 어느 정도 심화학습(?)을 했다 싶었다. 처음에는 멘토가 하라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런저런 교육 등으로 제법 아는 듯한 착각에 빠졌지만, 향어양식에 대한 수준은 얄팍했다.

최근 향어양식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전망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이런 흐름에 비해 아직은 일반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어종이 향어다.

그는 자신의 양어장을 만들기 위해 귀어‧ 귀촌 정책자금이 결정된 후 곧바로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관리사로 활용하며 3년째 향어와의 씨름을 거듭하고 있다.

“처음 1~ 2년 동안 멘토 역할을 했던 분을 따라다니며 막고 품는 식으로 배웠어요. 그런 상황 때문에 첫해에는 향어양식을 위한 수차(水車)와 같은 시설을 하는 과정에서 공사가 늦어지는 바람에 절반도 입식을 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했지요.”

교육하는 곳이나 인근 양어장 등에서 향어의 특성을 알아가는 과정은 있었지만,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매스컴 등에 소개되는 보도는 현실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양식은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았고, 특히나 향어는 위가 없는 어종이어서 마구 먹다가 장염통이나 장포자충과 같은 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부산물 등으로 인해 생기는 녹조 현상은 향어 집단폐사로 이어지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수온문제, 고기의 건강상태 체크하는 법 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에도 불구, 첫해의 결과는 200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논농사와 비교할 때 수익적인 측면에서 엄청났다.

논농사 7920㎡(2400평)과 비교할 때 제대로 수확하면 3~ 5배를 훌쩍 뛰어넘은 결과라는 점에서 놀라움, 그 자체였다. 노동강도는 적고, 수익은 좋은 편이란 점에서 향어양식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배우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수온이나 향어의 상태를 알아보는 것은 물론 양어장의 녹조 해결 방법 등과 같은 경험을 하면서 하나둘씩 체득할 수 있었지요.”

향어양식은 다른 양식과 달리 특별한 방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노하우를 키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향어양식은 손이 많이 가지는 않지만,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치어보다는 중간종묘로 들여다 키우자는 생각에 인근 양식장에서 믿고 사들인 향어들이 병들어 있었다. 초보 양식어업인이라서 그것을 구분하지 못해 지난해에는 절반 이상 폐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향어는 봄에 치어로 입식, 여름과 가을을 나고 출하 시기인 겨울에 이르면 무게가 2㎏ 가까이 늘어난다. 주로 유통업체에만 도매로 향어를 납품하다 보니 양식 어가에서는 업체의 일방적인 요구에 좌우되는 구조여서 리스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에 키운 향어를 출하하는 시기와 맞물린 올해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로 고전을 거듭해야 했다. 판로에 문제가 생기면서 상당한 위기에 빠졌다.

이에 향어양식어가 단체인 전국내수면향어양식협회가 나서 정부 등에 건의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싸게 팔기는 했지만, 수입 향어가격과 경쟁할 수 있어 재고량을 줄여나갔다. 또한, 정부와 전북도 등이 ㎏당 1000원까지 보조해주는 바람에 숨통이 트였다.

당장에 올 겨울 출하기도 걱정이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향어의 재고량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지만, 창업 과정에서 그가 겪은 쓰라린 경험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주된 주장은 귀어‧ 귀촌을 꿈꾸는 예비양식어업인들을 위한 제도 개선이었다.

정부가 귀어‧ 귀촌을 장려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들의 안착과 먼 정책을 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귀어‧ 귀촌 정책자금이 농촌 현실과 동떨어져서 논값 상승분을 고려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대출 조건도 매우 까다로워서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양식장 부지 구입자금을 좀 더 늘려주어야 할 뿐 아니라 수차 등과 같은 기계구입에 있어서 새것만을 구입하도록 하는 조항은 과감히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많은 문제점에도 향어양식산업의 성장 가능성은 희망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양식어장 부지를 더 늘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예비어업인들을 위해 노하우 전수 등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다.

 

향어는 어떤 어종?

향어(香魚: mirror carp) 또는 이스라엘 잉어, 독일 잉어라고 불린다. 잉어목 잉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다. 비닐이 거의 없는 편이며 독일의 가죽 잉어와 이스라엘 토종잉어를 이용해 개량했다.

1970년대 국내에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수입됐으나 실제로 먹는 사례보다는 낚시터에 풀어 놓고 손맛을 즐기는 용도로 이용되어왔다.

이런 용도와 달리 실제로는 식용이다.

기본적으로 크게 자라고 몸이 빵빵해서 같은 길이라면 살이 많은 편이어서 먹을 것이 많다. 크고 두터운 비늘이 있는 잉어에 비해 비늘이 적다는 것도 조리할 때 장점이다. 비닐이 없는 대신 몸 표면에 두터운 점막이 있는데 이게 찜이나 탕을 했을 때도 남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향어는 민물고기 중 회로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이다.

특히 향어나 잉어는 간흡충이 침투하기 어려운 어종이라서 감염될 확률은 참붕어나, 피라미류보다 낮은 편이다.

1980년대까지 소양호에 향어 가두리 양식장이 있었는데 홍수 때 흘러나와 소양호에는 자연산으로 살고 있다.

향어 매운탕은 일단 물고기가 크니 살집이 두툼하고 먹을 것이 많다. 국물 맛이 달콤하면서도 진하다. 쑥갓과 풋고추를 넣고 칼칼하게 끓이면 안줏감으로는 제격이다.

향어는 우리나라 내수면 양식산업에서 뱀장어, 메기, 송어에 이어 4번째로 생산량이 많을 뿐 아니라 육질 탄력이 우수, 식감이 좋은 횟감으로 인기가 높은 대표적인 내수면 양식품종이다.

우리나라 향어의 80%를 생산하는 전국 최대의 향어 생산지가 김제다.

김제가 최대생산지인 이유는 향어의 특성에서 연유된다. 향어는 쉬지 않고 땅을 긁는 습성이 있다. 물과 부드러운 흙이 잘 어우러진 환경이 양식에 필수적이다. 그나마 풍부한 수자원과 함께 향어가 좋아하는 미네랄이 풍부해서 생산 적지로 부상한 지 오래다.

향어는 보통 23개월 가량 사육하면 상품 출하가 가능하다. 최근 수산과학원에서 첨단육종기술을 적용, 개발한 속성장 육종향어는 17개월이면 상품 출하될 수 있어 양식 어가들에게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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