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 세 번 찾은 '일본 야구계의 전설' 장훈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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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 세 번 찾은 '일본 야구계의 전설' 장훈⑦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6.29 08:20
  • 기사수정 2022-01-14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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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무(주)상무시절 이용일(1959)./사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경성고무(주)상무시절 이용일(1959)./사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이용일은 경성고무㈜ 전무였던 1960년대 초부터 일본 출장이 잦았다.

그는 일본에서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도에이 플라이어스 경기장을 찾았다.

재일교포 야구영웅 장훈(張勳)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군산에 고교야구팀 창단을 구상하고 있던 그는 타석에 들어선 장훈이 다른 타자들보다 신중하게 취하는 타격자세를 눈여겨본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장훈은 민족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낸 의지의 사나이였다. 광복 후에도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을 ‘조센징’이라 부르며 무시하였다. 차별대우가 상상 이상으로 심했던 것.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훈은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긍심을 지켰다. 자신이 한국인임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드러내놓음으로써 편견을 이겨냈다.

장훈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한국인은 절대로 일본인보다 못하지 않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장훈이 네 살 때 화상을 입자 그를 등에 업고 이리저리 병원 문을 두드렸지만, 일본인 병원에서 자신의 한복 저고리 차림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지 않아 장훈이 제때 치료받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이용일은 “장훈은 화상을 입은 오른손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치솟아 올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장훈은 나니와 상고 시절 여러 차례 웅변대회에 나갔을 정도로 언변이 좋았다.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이러한 소질 덕분에 그는 은퇴 이후 방송 해설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용일은 1970년 당시 장태영 상업은행 감독 소개로 장훈을 만난다. 장 감독이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뛰고 있는 장훈이 서울에 와 있는데 함께 만나자’고 연락해온 것.

이용일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장훈과 뭔가 통하는 것을 느낀다. 이후 두 사람은 야구는 물론 개인사, 세상사 등을 상의하는 등 두터운 친분을 쌓아간다.

 

장훈 선수 인터뷰 보도한 1977년 1월7일치 동아일보./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장훈 선수 인터뷰 보도한 1977년 1월7일치 동아일보./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재일동포 야구영웅 ‘장훈’.. 군산으로 초대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동영(東映)팀 소속이던 1972년 11월 어머니와 함께 일시 귀국, 서울운동장에 들러 연습하는 고교 선수들을 격려한다.

그는 선수들 재질을 높이 평가하며 제2의 백인천 같은 유망주를 물색하겠다고 말한다. 이어 대구, 부산, 광주, 대전, 군산 등지 순회 코치로 나서 지방 고등학교 선수들에게 타법 및 작전법 등을 지도하였다.

1977년 1월 가족과 함께 귀국한 장훈은 기자회견에서 “내년까지 안타 3천 개 치겠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힌다. 3천 안타는 일본 프로야구 ‘전인미답’의 기록으로 당시 장 선수는 2천6백 50개 안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장훈은 “각계각층의 성원 편지 등 항상 고국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서 “조국에도 빨리 프로야구가 생겨나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1978년 8월, 네덜란드 5개국 친선대회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제25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초청받은 한국 대표팀 단장을 맡았던 이용일은 대회 참가 후 한국 야구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이후 국내 프로야구 구상에 매달리던 그는 주변의 간곡한 부탁으로 대한야구협회(KBA) 전무를 수락한다.

그리고 그해(1979) 장훈을 군산으로 초대한다.

초대에 응한 장훈은 군산에 내려온다. 군산 방문은 두 번째였다.

전국 규모 대회에 출전한 군산상고가 예선에서 탈락해도 선수들을 내려보내지 않고, 며칠씩 머물게 했던 이용일.

그는 지역 기업체 대표와 시민은 물론 군산상고 선수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경기 경험이 일천한 시골 선수들의 집합적인 사고와 시야를 넓혀주기 위함이었다.

 

군산상고 방문한 장훈 선수가 최관수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1979)./사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군산상고 방문한 장훈 선수가 최관수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1979)./사진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전인미답의 기록 세우고 다시 군산 방문

1980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롯데 오리온즈 코치 겸 지명타자였던 장훈은 그해 5월 28일 도쿄 교외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롯데-한큐(브레이브즈) 경기에서 대망의 3천 안타를 기록한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대기록을 세운 것.

경기가 끝난 뒤 어머니에게 장미꽃다발을 받으며 울먹이는 모습이 보도되어 고국 팬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장훈이 3천 안타 금자탑을 쌓았다는 소식을 접한 이용일은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이어 뭔가 기념될만한 이벤트를 열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문득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세계 최다홈런 기록을 세웠을 때 모국인 대만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초청해 훈장을 수여한 기사를 떠올리며, ‘장훈의 훈장 수여’ 방법을 모색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이용일은 일본의 장훈 후원단체 양 모 회장과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을 만나 의견을 제안한다.

박 회장은 ‘문교부장관과 총무처장관에게 연락해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6월 하순경 ‘장훈의 훈장 수여’가 최종 결정된다.

수여식 날짜가 문제 됐으나 장훈은 그해(1980) 7월 24일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맹호장)을 받는다.

1982년 봄, 한국 프로야구 출범 때 이용일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을 맡는다.

그는 재일동포 야구영웅인 장훈을 총재 보좌역으로 임명한다. 지근에 두고 한국 프로야구 초석을 다지는데 도움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늘이 있기 까지 장훈의 영향이 컸다. 그의 도움이 있었기에 한국 프로야구가 오늘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용일은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1983) 장훈을 다시 군산으로 초대한다.

군산을 3번째 방문한 장훈은 지역 야구애호가들을 만나고 시장이 마련한 환영 리셉션에 참석한다.

이튿날 군산상고를 방문한 장훈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는다. 당시 군산의 야구 꿈나무들에게 장훈은 ‘일본 야구계의 신화 같은 존재’로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훈은 군산에 머무르는 동안(2박 3일) 잠은 항도호텔에서 자고, 모닝커피는 신생다방(신생그릴), 술은 아리랑고개 너머에 있었던 요정 송죽(松竹)에서 마신 것으로 알려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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