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야구인생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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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야구인생②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6.11 08:33
  • 기사수정 2022-01-14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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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중학교 야구경기(1960년대)./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군산중학교 야구경기(1960년대)./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군산중학교에 특기생으로 입학한 선수들이 졸업하는 1967년 초, 이용일은 군산고등학교 최도철 교장을 만나 야구부 창단 약속을 받아낸다.

당시 그의 직책은 경성고무(주) 사장. 그는 그해 전라북도 야구협회장을 맡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최 교장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지원금도 사용처가 불투명했다. 야구장비 대신 현금을 보내달라는 요구에는 화가 치밀었다.

 

"나는 1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큰형 작은 형이 졸업한 학교야. 또 중학교에 야구부가 있으니까 조건이 좋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 군산고를 고집하다가는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겠더라고. 그래서 목표를 수정하고, 서울로 올라가 졸업생 8명 가운데 4명은 동대문상고에 3명은 휘문고에 입학시켰어."

"그때야말로 진학과 취업이 선수와 학부모들의 가장 큰 희망이었잖아."

"그래서 친분 있는 야구인들을 동원해서 최대한 힘을 기울였지."

"그리고 1968년 군산상고와 군산남중에 야구부를 창단했어. 그때 심정은 구름을 탄 기분이랄까. (웃음)"

"얼마 후 김병문 교장과 상의 끝에 건물 한 동을 지어 한쪽은 매점 겸 식당으로 쓰고, 한쪽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합숙소로 사용하게 했지. 쌀은 우리 회사 직영 정미소에서 몇 가마든 필요한 만큼 보내줬어. 부식비는 매점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충당했지."

"그때는 운동장을 찾아가 어린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

 

김병문 교장은 매사에 의욕적이고, 정이 많아 선수들을 조카처럼, 자식처럼 돌봐줬다고 한다.

아침을 거르고 운동장 한편에서 비실대는 양기탁(72년 황금사자기 결승 9회 말 동점 타자) 선수를 발견하고 뒷바라지해준 사연은 감동을 자아낸다.

또한, 야구장으로 사용하기에 비좁은 운동장을 '동창 한 명이 운동장 한 평 보태기 운동'을 펼쳐 3700평을 넓힌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 사장이 군산상고 우승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고 있다./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 사장이 군산상고 우승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고 있다./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창단 1년만에 전북 대표로 전국대회 참가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이 거금(2000만 원)을 쾌척했다는 소문과 함께 군산남중·상고 야구부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자 서울로 진학했던 군산중 졸업생 가운데 두 명이 다시 내려와 합류한다.

정읍에서 노석균, 전주에서 나창기·김준환 등이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도 전주북중에서 군산남중으로 전학하는 등 우수한 유망주들이 모여들었다.

김일권, 송상복(스마일 피처), 양기탁, 양종수 등은 군산남중 창단 멤버이다.

군산상고 야구부가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규모 대회에 출전해서 중간에 탈락해도 이용일은 선수들을 곧바로 내려보내지 않고, 며칠씩 머물게 하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의 고교 강팀들과 친선게임을 하거나 일본 고교야구 상징인 갑자원(甲子園) 대회 우승팀 경기를 관람시키는 등 시골학교 선수들의 경험과 시야를 넓혀주기 위함이었다.

이용일은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일본 야구계의 전설이자, 재일교포 야구 영웅으로 불리는 장 훈(張 勳:1940~) 선수를 군산으로 몇 차례 초대해 시민은 물론 군산상고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군산상고는 창단 1년만인 1969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국내 고교야구 정상의 대열에 뛰어든다.

그해 봄 전주상고를 6-0으로 물리치고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것.

9월에는 지역 예선에서 전주상고를 1-0으로 물리치고 전국에서 15개 팀이 참가하는 제23회 황금사자기 대회에 출전한다.

그러나 10월 6일 배문고와의 경기에서 안타 10개(배문고 9개)를 기록하고도 2-4로 패한다.

이날 군산상고는 1회 초에 2점을 내주고 1회 말 4안타를 집중시켜 2점을 만회한다.

이어 2회에서 1사 주자 2·3루, 3회에 노아웃 주자 1·2루, 5회에 2사 만루, 7회에 노아웃 주자 1·2루 등 여러 차례 찬스를 맞이하면서 역전승의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견실치 못한 작전과 후속타 불발로 기회를 득점에 연결하지 못하고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1969년 10월 당시 군산상고 야구부는 김병문(대표), 서창활(감독), 송경섭(부장), 선수= 노석균(투수), 한상선(포수), 김용석, 조준기, 오승열, 한연상(내야수), 소재덕, 김용배, 박만천(외야수), 최종수, 김성태, 하태문, 유희명, 오덕환, 나창기, 김복근, 김갑순, 김주철(후보) 등으로 짜여 있었다.

제24회 황금사자기 대회(16개팀 참가)를 앞두고 있던 1970년 9월 당시 군산상고 진용은 김병문(대표), 최관수(감독), 송경섭(부장), 선수=소재덕(주장) 노석균(투수), 한상선(포수), 김용석, 나창기, 오승열, 하태문(내야수), 김복근, 박만천, 김성태(외야수), 김봉연, 김준환, 한연상, 조준기, 최병태, 유희명, 김용배, 김갑순, 오덕환(후보) 등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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