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25] 조선말 대야의 천도교인들…동학혁명·항일운동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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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25] 조선말 대야의 천도교인들…동학혁명·항일운동 앞장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3.26 10:18
  • 기사수정 2024-03-26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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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동학혁명 앞장선 ‘동학’의 후예· 일제강점기엔 만세운동 적극
천도교, 항일운동 앞장… 장경화 대접주- 노춘만 지사- 최열경 종법사
지경리 금반마을 종법사 월당 유허비 눈길… 들판 속 천도교 옥구교구
지경리 금반마을 소재 천도교 옥구교구. / 사진=천도교 옥구교구 홈페이지
지경리 금반마을 소재 천도교 옥구교구. / 사진=천도교 옥구교구 홈페이지

동학은 1860년 최제우의 창시 이후 부패한 조선왕조와 외세의 압박에 맞서 동학혁명운동을 일으켜 근대사회로의 전환과 사회변혁의 추동체로 역할을 해왔다.

일본의 국권 침탈과 강압적인 탄압이 이어지자 이름을 바꾼 천도교는 동학농민혁명(1894년)뿐 아니라 1919년 3.1만세 및 6.10만세운동을 일으킨 중심세력이었다.

전북은 물론 군산에서 그 역할은 대단했다.

대야출신 천도교인들은 동학혁명에 이어 항일운동 전선과 사회교화활동 등에서 엄청난 역할을 했었다. 대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대접주와 천도교 옥구교구가 존재했을 정도로 그 세가 상당했을 뿐 아니라 국권회복 및 3.1만세운동에서도 크나큰 활약을 했다.

# 동학혁명 속 군산(과거 옥구)

1895년 2월 군산진 경포에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동학농민군 명단​​​​​​/​乙未二月(1895년 2월) 匪頹囚徒記(비퇴수도기),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소장 고문서/출처=군산시
1895년 2월 군산진 경포에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동학농민군 명단​​​​​​/​乙未二月(1895년 2월) 匪頹囚徒記(비퇴수도기),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소장 고문서/출처=군산시

동학혁명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 접주 전봉준 장군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의미한다.(5월11일은 동학혁명 국가기념일)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해 일본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 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세력과 일본군 등에 의해 압살과 탄압을 당했다.

이후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는 물론이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초토화했다.

이런 핍박 속에 의암 손병희 선생(3대 교주)은 1900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 합법적 종교 교단으로 자리잡는데 힘을 쏟았다.

전신인 동학이 구한말 반외세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듯이, 천도교 또한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에 맞서 항일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 핵심적인 투쟁이 1919년 3.1 운동과 6.10만세운동이다.

김중규 군산시 박물관관리과장은 작년 11월 동학혁명 재조명 세미나에서 “여러 가지 문헌에 따르면 군산지역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50명”이라며 “그 핵심인사 중에는 옥구 대접주 장경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장경화 대접주는 1893년 보은집회에 참여했고, 농민군 2차봉기 때 옥구지역 농민군을 이끌었다. 허진은 옥구농민군 두령으로 전봉준 장군의 백산봉기에 참여했던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연구 조사한 군산 농민운동 핵심 인사들은 1894년 행정구역에 따라 옥구지역 장경화 대접주와 허진 두령 등 5명, 임피는 진관삼· 김해룡 등 30명, 군산진은 좌수 문규선과 김학배 접주 등 15명이다.

이런 내용을 볼 때 대야 동학세력의 위상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 대야의 3.1만세운동 전개… 천도교 주도적 역할

사통팔달의 대야에는 동학혁명과정에서 사회개혁과 외세척결을 내세운 동학교도들이 다수 존재해 민족적인 대의에 직간접적으로 뛰어든 지역 인사들이 적지 않다.

본래 정읍 및 고창, 김제 등의 농민들이 동학세력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는데 이들 지역과 인접한 임피현(오늘날 임피와 대야)에도 그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은 당시 사료들을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김중규 군산시 박물관관리과장이 지난해 말 ‘군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특징’이란 논문을 통해 △ 조선왕조실록(고종 31권) △ 중국의 동정일기(이홍장전집) △ 초토사 홍계훈 자료 △ 군산진의 첨사보고서 △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등을 참고해 입체적으로 접근을 했다.

김 과장은 “군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농민 뿐만 아니라 지역 양반(토반), 중인, 상인 등의 일반 백성들이 참여했다”면서 “오랜 계급사회제도를 극복하고 근대시민사회로 변화시키는 일반 백성들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동학농민운동 실패와 함께 숨어 있던 동학교도들이 천도교로 개칭과 함께 새로운 민족운동의 주체세력으로 본격 등장하는 때가 ‘1919년 3.1만세운동’.

대야만세운동의 구체적인 날짜는 나와있지 않다.

세를 형성하기에 앞서 일경의 감시 때문에 규모가 큰 만세운동으로 확산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야출신 기독교계열 항일투사들의 활약도 있었지만 그와 관련 내용은 후에 다루고자 한다.)

동학 세력이 강한 김제 등과 인접한 사통팔달의 대야는 당시 군산지역의 천도교 중심지 중 하나였다.

대야 출신 장경화는 1893년 동학 대접주로 활약했고 허공집· 김현창 등의 동학교들은 동학혁명(1894) 시기에 입교, 핵심역할을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교세도 나날이 확장됐다.

천도교 옥구교구가 1917년 지경리 우덕실(우덕마을)에 설치됐고, 노춘만· 김유종· 최공훈· 양문옥 등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야출신 천도교도들의 만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은 가열찼다.

#천도교도 노춘만 지사(대통령 표창(1977),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추서)- 노 애국지사는 3.1만세운동의 참여 뿐 아니라 상해임정지지(또는 참여)와 헌금운동 등을 적극 전개했다. 1919년 4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의 실형을 받았다.

이에 노 지사는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박영진· 이중열· 정대원 등의 천도교인들과 함께 익산군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만세시위를 익산군(현 익산시) 전체 지역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1919년 4월에는 당시 옥구군 내에서 이유상· 강성원 등과 함께 대야면· 회현면 등 여러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와 살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활동하다가 1919년 4월 17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투옥됐다.

1921년 음력 3월 하순에는 임정 요원 신정산의 권유로 임시 정부에 가맹자금 100원을 출자하였으며 김유중을 권유하여 가입시킨 후 자금 40원을 받아 신정산에게 전달했다. 또한 192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는 전령준 외에 23명을 임시 정부에 가입시키고 운동자금 2,410원을 조달했다.

#천도교도 강문주 항일지사(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 지사는 1919년 의군부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1921년 이래 전북 지방에서 지하 조직을 조직하고 지하 조직을 통해 임시 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했다.

1920년 8월에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지방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뒤이어 습격한 일본군과도 치열한 격전을 폈다. 이후 의군부는 본부와 중부의 병력을 통합하여 군세(軍勢)를 확충하고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와 협력하며 대일 항쟁을 계속했다.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당시에는 북로 군정서·대한 독립군과 함께 작전 구역을 분담, 일본군을 협공·섬멸하는데 기여했다. 청산리 전투 후 노령(露領) 방면으로 이동한 의군부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의 수난을 겪었으나 군용을 재차 정비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천도교도 최공훈(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 지사- 최 지사는 1919년 3월 서울에서 천도교 전주교구로 전달된 독립선언서와 독립 운동의 방법 등에 대한 연락을 동지인 옥구군 천도교 교인 노춘만· 신현성(申鉉成)· 김종수(金鍾洙) 등과 함께 전달받아 3·1독립운동을 계획 추진했다. 군산· 옥구지구 독립만세 운동을 노춘만 등과 함께 추진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 행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3월 17일 광주지법 군산 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21년 3월 하순 당시 옥구군 대야면 지경리 천도교구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원 신정산(申定山)으로부터 독립 사상의 선전과 군자금 모집 등에 힘써 줄 것을 권유받고 뜻을 함께 하여 1922년 10월까지 활동했다.

#지경리 금반마을의 천도교 유허비

금반마을의 천도교 옥구교구내 있는 종법사 유허비. / 사진=투데이군산
금반마을의 천도교 옥구교구내 있는 종법사 유허비. / 사진=투데이군산

대야면 지경리 금반마을에는 다른 곳에서 매우 보기 드물게 천도교 옥구교구(1988년 5월 설립)가 위치해 있다.

곧바로 찾기 힘들어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들판의 이곳 저곳의 동네를 돌다 들판 한가운데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특이한 종교시설을 찾았다.

도착해보니 일반 종교와 다른 교당(또는 교회)이 있었는데 이곳이 ‘천도교 옥구교구’란다.

교당 옆에 ‘종법사 월당 선생 유허비’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국한문 혼용체로 월당 최열경 천도교 종법사의 일대기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는 월당 최열경(작고)의 천도교 입교와 3.1만세운동, 국권회복 운동, 학산 정갑수와 시제지의를 맺는 등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그가 스승처럼 흠모하면서 따르던 학산 정갑수(丁甲秀)는 김낙철의 제자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호남의 천도교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

학산은 부안 대접주이자 천도교 최고 지도자였던 김낙철(1858~ 1917)의 사위로 장인이 죽은 뒤 호남지방의 교인들을 순방하면서 포덕과 교화에 힘썼다.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여러 차례 거사자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고, 3.1운동 이후에는 유격대 조직과 세력확장 준비 중에 조직원들의 대거 구속으로 무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천도교 옥구교구는 옥구 집강소(동학의 자치기구)의 단초?

왜 대야면 지경리에 천도교 옥구교구가 있는 걸까.

천도교 옥구교구(설립연도 1917년)는 지경리 우덕실(우덕마을: 대야터미널 뒷 동네)에 있다가 나중에 일경의 감시와 교인 탄압 등에 교구 건물을 매각했다.

후에 월당 최열경 종법사가 1953년 지경리 금반마을 자신의 집에 교구 재건을 위해 교당 신축과 신도 확장 등에 나섰다. 그후 교당 노후로 인해 1988년 5월 중앙총부의 도움으로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엄청난 교인과 항일운동 등을 주도한 옥구교구는 일제강점기와 대한제국시대엔 교구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교구의 존재와 종법사의 반열에 오른 인물, 옥구포 대접주 장경화(張景化)가 1893년 동학 대접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여기에다 동학농민운동(1894) 시기에 허공집· 김현창 등이 천도교(동학)에 입교, 핵심역할을 했다는 내용은 물론 3.1운동 당시에 대야의 천도교 세력의 만세운동 응집력 등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지난해 말 김중규 군산시 박물관관리과장은 관련 세미나에서 발표한 ‘군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특징’이란 논문을 통해 군산지역(과거 옥구와 군산시)의 집강소(동학 농민군의 자치기구) 위치가 여전히 알수없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이곳이 그 단초를 말해주는 매개체 가능성은 아닐까.

그 가능성으로 볼 때 첫째, 대야지역이 천도교 교구와 교세가 대단했단 점과 둘째, 토반 또는 잔반 계통의 양반이나 농민들, 아전 등의 세력까지 공히 존재했던 임피현이란 점에서 볼 때 시사하는바 적지 않다.

#동학세 강한 대야면… 이길여 회고록(김충식 대담) ‘묻다’의 내용 중

대야가 낳은 이길여 가천대 총장의 자신의 회고록 ‘묻다’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이상제 선생)가 천도교의 경문을 외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는 것을 회고한 바 있다. 자신의 집에 동학(교도) 손님들이 자주 방문했고 차를 나르는 일은 어머니 몫이었다는 것.

동학 손님이자 중간간부였던 ‘김선생’의 일화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함께 나간 그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표정이 한동안 어두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총장의 회고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에 관여하셨다면 아마도 재정부분을 맡으셨을 것이라고…

대야의 중농에 이런 사상과 집안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 지역의 동학 또는 천도교 세력의 움직임이나 분위기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는 추론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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