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코흘리개 시절 '공치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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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코흘리개 시절 '공치기'의 추억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6.01 08:26
  • 기사수정 2022-01-14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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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군산공설운동장(사진제공 신철균)
1960년대 군산공설운동장(사진제공 신철균)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0년대 후반.

당시 권구(공치기)에 필요한 고무공은 문구점에서 한 개 50환(지금의 5원)씩 하였다. 현금이 워낙 귀했던 시절이어서 아이들 대여섯이 하루 용돈을 모아야 겨우 장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친구는 항상 당당했고, 인기도 좋았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상대와 캐치볼을 할 수 있었고, 실력이 조금 모자라도 시합 때 선수로 선발되는 특전도 주어졌다.

공치기는 동네 골목이나 신작로 너머에 있는 공설운동장에서 하였다.

한 팀 선수는 세 명도 좋고 열 명도 좋았다. 운동장에 모인 아이가 몇 명이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던 것.

수비도 타자도, 주자도 실수의 연발. 그럼에도 스릴과 박진감이 넘쳐났다. 시합하기 전 편짜는 과정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과정은 내 존재를 동네 형들에게 알리면서 공치기 실력을 인정받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20명쯤 모이면 팀을 나누기 위해 스탠드 벽에 나란히 기대고 선다.

그리고 꼬마대장(주장) 두 명이 눈을 가리고 교대로 ‘왼쪽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라고 하며 자기 팀 선수를 지명한다.

아이들은 그때마다 자리를 옮겼다. 공평을 기하기 위함이었으나 먼저 뽑힌 친구와 같은 팀에서 뛰고 싶은 마음에 몸짓 발짓으로 사인을 보내는 얌체도 있었다.

‘가위바위보’로 선수를 지명해서 팀을 나누기도 하였다.

요즘의 '드래프트' 방식이다.

그때는 아이들이 주장 눈치 살피기에 바빴다.

한 사람 호명할 때마다 희비가 교차했다.

눈치싸움도 종종 일어났다.

펀치가 약하거나 동작이 굼뜬 아이들은 늦게 호명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해했다.

선수가 정해지면 약하게 구성된 팀 주장 건의로 선수를 한두 명 맞교환했는데, 그때 방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시합에 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드래프트가 끝나면 시합에 들어가기 전 양측 합의로 경기 횟수와 룰(rule)을 정했다.

수비가 땅볼을 잡아 1루나 2루로 달리는 주자를 맞히면 아웃. 타자가 헛스윙했을 때 주자가 베이스에서 발을 떼도 아웃됐다.

도루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원만한 진행을 위해 타자가 아무리 공을 멀리 날려도(그라운드홈런) 홈인을 못 하고 3루에서 멈추기로 합의하였다.

타자가 세 번 헛치면 아웃이고, 공수 교대는 공식 야구 경기처럼 스리아웃 되면 하였다.

수비가 공을 패스받아 주자를 터치해도 아웃됐다.

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때 ‘공이 먼저냐’ ‘주자가 먼저냐’로 다툼이 일기도 하였다.

6~8명이 골목에서 할 때는 전봇대와 판자 울타리 기둥이 베이스가 됐으며 1루와 2루만 정해놓고 하였다.

야구처럼 상대 팀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던져주는 방식(넣어주기)도 있었으나 ‘스트라이크냐’ ‘볼이냐’로 의견이 자주 엇갈려 선호하지 않았다.

베이스는 운동장 축구 골대나 큰 돌멩이, 책가방 등을 사용하였다.

공치기는 공격 범위가 좁았다. 베이스와 베이스 거리가 짧은 데다 타자는 2루와 3루 사이로만 공을 쳐 내야지 1루와 2루 사이로 굴러가면 파울볼이 됐던 것.

볼을 높이 날리기보다는 빨랫줄처럼 직선으로 뻗어나가야 강타자로 인정받았다.

잡기 쉬운 땅볼을 자주 흘리는 친구에게 ‘너는 기(게)만 잡는 놈!’이라며 놀려대던 일들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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