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욱의 望市作記] 전성시대 ‘선유도’와 宋사신 ‘서긍’ 연계한 스토리텔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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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욱의 望市作記] 전성시대 ‘선유도’와 宋사신 ‘서긍’ 연계한 스토리텔링하자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1.15 15:26
  • 기사수정 2024-01-15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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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속 방문 ‘20여일’…등장한 망주봉· 숭산행궁 등 눈길
김부식과 서긍의 만남 관련 기록 등 구체적인 역사 의미 되살려야
고려 관문항구으로써 고군산군도 위상… 시, 타지자체 벤치마킹을
고려도경.
고려도경.

고군산군도의 핵심인 선유도와 송나라 사신 ‘서긍’의 역사적인 의미를 연계하는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곳에는 한중간 오랜 역사와 다수의 문화유산들이 있지만 변변한 기록 표지판이나 이를 알리는 내용들도 없어 뜻있는 이들의 안타까움만 가득하다.

다른 지자체들은 그들과 관계된 역사적인 의미를 되살려 적극적으로 한·중간 교류의 장 또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왜 선유도(또는 고군산군도)인가.

고려도경의 저자 송의 서긍(1091~ 1153)이 1123년 6월 국신사 대표로 고려를 방문했을 때 고려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영접한 곳이 바로 이곳 선유도 주변 항구였다. 정확히 말하면 망주봉 동쪽 객관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때 고려 조정 영접단의 대표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김부식과 서긍이 만나 양국간 현안인 외교와 국방문제를 논했을 첫 만남의 장소가 군산도였는데 지금의 선유도였다. 고려시대 선유도의 정식 이름은 ‘군산도’였다.

기록을 고려할 경우 서긍은 군산도에 도착했을 때와 돌아갈 때 풍랑 때문에 이곳에서만 20여일가량 보냈단다.

901년 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단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군산군도였다는 점에서 이곳의 역사적인 의미는 적지 않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익산 국립박물관의 최근 특별전시를 보면 고려시대 군산의 위상은 그대로 드러난다.

1123년 군산(군)도를 방문했던 서긍은 이곳을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산’과 같다고 표현했다. 군산이라는 이름 역시 바다 위의 섬들이 산과 같아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별전시의 2부인 ‘바다 위의 성’으로 역할을 한 고군산군도는 역사상 가장 주목받았던 고려시대였다. 11~ 13세기에는 수많은 송나라 상인과 사신들이 고려를 왕래하던 시기다.

역사서에 기록된 송나라 상인만 해도 무려 5,000명에 이르고 널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고려를 방문했다. 당시 고려는 바다를 통해 개방적이고 국제적 문화가 꽃피었던 문화적 황금기를 누렸다.

이 시기의 군산도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관문 항구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진=선유도 해역에서 조사 중인 발굴바지선(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사진=선유도 해역에서 조사 중인 발굴바지선(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당시의 우리나라 서해 바닷길 곳곳에는 11~13세기 문화적 르네상스를 누렸던 해양 실크로드 문화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양실크로드는 흑산도- (위도)- 선유도- 예성항 벽란도로 이어졌고 그 중심에 선유도가 있었다. 실제로 선유도 망주봉 인근에도 최고급 고려청자와 기와가 다량으로 산포돼 있고 대규모의 객관 유적이 있다.

하지만 선유도는 그 위상에 걸맞은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와 달리 전남 해남군과 완도군은 역사적인 사실과 의미를 한껏 살리고 있는 것과 상당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해남군은 웡위안현과 1999년 자매결연한 데 이어 2023년 8월 국제우호도시협약을 체결해 산업·교육·문화·관광·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촉진하기로 했다.

완도군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묘당도에 세웠던 관왕묘(關王廟·삼국지에 나오는 무장 관우 사당) 복원을 추진하고 이순신· 진린 추념식을 개최하는 등 현양 사업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1598년 12월16일)를 다룬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감독 김한민)가 해를 넘기면서도 흥행 가도에 있다.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정재영이 연기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다.

영화 ‘노량’에서는 뇌물을 받고 왜군의 퇴로를 열어주려다가 마음을 바꿔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는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에 감복한 뒤 그의 공적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해 깃발, 도장, 병풍 등 8가지 하사품을 내리도록 하는가 하면 그가 전사하자 통곡하며 추모시를 짓기도 했다.

둘의 우정은 후손에게도 이어졌다.

중국에 개선한 진린은 벼슬이 계속 높아져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아버지를 따라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아들 진구경은 여진족(청나라)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손자 진조(진영소)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원수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면서 1644년 조선으로 망명했다.

할아버지가 주둔하고 왜와 싸웠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서 경주 이씨와 결혼해 살다가 전남 해남군으로 이사했다.

최근 중국의 고위정치지도자들까지 이런 역사적인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2014년 방한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서울대에서 “명나라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으며,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 살고 있다”라고 강연했다.

이후 주한 중국대사 추궈홍과 싱하이밍도 각각 2015년과 2020년 해남을 찾았다.

이밖에도 광동 진씨 종친회는 이순신 후손인 덕수 이씨 종친회와 교류하는 한편 1994년 진린의 고향 광둥성(廣東省) 웡위안현(翁源縣)을 찾아 후손들과 만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양국을 교환 방문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송나라 서긍은 송나라 화주(和州) 역양(歷陽) 사람인데 오현(吳縣)으로 옮겨와 살았단 역사서 등을 고려, 군산시 등이 나서 그곳과 향후 교류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자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한편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이 ‘광동 진씨’의 최대 집성촌이다.

한국의 진린의 손자인 진조 후손들은 진린을 시조로 모시고 그의 고향을 따서 ‘광동 진씨’라고 부른다. 전국의 씨족 3,000여 명 가운데 56가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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