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18] 충절과 호국의 기상이 어린 ‘개정면’
상태바
[군산을 걷다 #118] 충절과 호국의 기상이 어린 ‘개정면’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4.01.09 14:16
  • 기사수정 2024-01-09 14: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호 장군 유지’ 1976년 4월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32호 지정
1921년 건립된 ‘진남정’ 100년 넘긴 호남명문 ‘사정(射亭)’ 중 하나
경포천변→ 월명동 산자락→(임시 오식도동)→ 개정 발산리 이전사
최호 장군 유지로 향하는 도로. / 사진=투데이군산
최호 장군 유지로 향하는 도로. / 사진=투데이군산

개정면은 충절과 호국의 기상이 어린 고장이다.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최호 장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최호장군 유지(崔湖 將軍 遺址)가 바로 그곳.

이곳에는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우 충의사(忠義祠)와 장군의 묘소, 그리고 유물전시관이 있어 참배객들의 발길이 잇따르고 있다.

최호 장군의 기상을 잇기 위한 국궁 활터인 진남정도 눈길을 모은 곳 중 하나다.

과거 경암동(또는 구암동)에 세워졌다가 월명동으로 이전, 현재는 개정면 발산리에 위치한 근대기 활터가 진남정.

진남정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활터로서 몇 차례의 이전 과정을 거쳐 최근에 군산 도심 외곽에 새롭게 조성했다.

진남정은 국도 26호선을 타고가다 최호 장군 교차로를 지나 대황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최호장군길을 따라가면 최호 장군유지가 있고 그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월명동에 있던 진남정은 대학로 명산사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월명로를 타고가다 현대오솔아파트를 지나 서쪽의 월명 1길을 따라가면 군산여고와 가까운 산자락의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이 학교와 인접한 국궁 활터인 진남정이 있었지만 장소가 비좁은데다 민원 발생 등을 이유로 개정면 발산리 최호 장군 유지의 동편으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최호 장군 유지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최호 장군 유지는 조선 중기의 무신인 최호 장군(1536∼159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최호 장군의 사당(충의사).  / 사진=투데이군산
최호 장군의 사당(충의사). / 사진=투데이군산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됐다.

최호 장군 유지는 사당, 유물전시관,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의 유지에는 장군의 위패를 모신 불천지조사당(不遷之祖祠堂)은 장군의 후손 최호선이 영조 5년(1729)에 세운 것으로 1906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최호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교지를 비롯하여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교지(敎旨)와 1596년에 선조가 하사한 삼인보검(三寅寶劍)이 보존되어 있다.

* 최호 장군은

최호 장군은 선조 9년(1576)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27년(1594)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됐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했다.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해전에서 원균 등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선조 37년(1604)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2등에 추록되고 충원군에 봉해졌다. 1615년 찬집청(撰集廳)의 주청으로 임난공신록에도 추록됐다.

한편 사당 뒤에 있는 반월산에는 최호 장군을 비롯한 그의 아버지와 아들, 손자에 이르는 4대 봉군의 묘가 있다.

최호 장군 묘역.
최호 장군 묘역.

# 진남정(鎭南亭)은

[100년의 역사, 진남정은 멈출 수 없다. 진남정은 단순히 활만 쏘는 활터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득한 문화의 터전이다.

지난 2003년 3월 23일 국궁신문 사랑방 코너에 ‘진남정 100년의 역사, 멈출 수 없다’ 라는 제목으로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군산시에 있는 진남정의 폐정 위기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소개된 바 있다.] - 동호인들의 글 등 참조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진남정은 호남 7정 대회를 주도적으로 창설한 오랜 전통의 명문사정(射亭).

진남정의 만들어진 얘기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1921년 경암동에 만들어졌다는 얘기와 일부는 구암동(현 하구둑부근)에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이는 아마 같은 장소인데 당시 행정동의 개념이 오늘날처럼 명확하지 않아 생긴 오해로 보여진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경포천변에 건립했다가 하천범람으로 약 6~ 7년간 운영하다가 1928년 월명동 35의 2일대에 위치한 월명공원 부지로 이전했다는 내용으로 정리돼 있다.

새롭게 사정이 만들어질 당시 공원부지였던 진남정의 과녁터 부근에 한국전쟁 이후 주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수차례에 걸쳐 당국의 양성화 조치에 따라 활터 부근 일부 토지가 개인소유로 변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소음 등 잦은 민원이 발생, 활터 운영이 어렵게 돼 이전을 적극 추진하게 된 것.

이에 2006년 최호 장군 유지(遺址)의 동편으로 이전했고 본래 월명동 부지는 군산시에 기부채납(寄附採納), 현재는 공원부지로 변해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곳으로 이전하는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지역에서 오랜 언론인 생활에도 진남정을 방문하지 못해 친구와 함께 최호 장군 유지가 있는 광장에 주차하고 산길의 이곳 저곳을 오가던 끝에 소나무숲과 대숲을 끼고 있는 진남정을 찾아냈다.

최호 장군의 묘역에 참배하고 나서 야산인지, 구릉인지 원발산 중턱쯤 양쪽 두 갈래 길로 나뉜 지점에서 진남정(鎭南亭)이라 쓰인 표지석을 만났다.

이곳으로 이전하는 과정은 월명동시대 마감을 앞두고 오식도에서의 2년여간 시간을 보내고 천신만고 끝에 마련했다.

* 형태 및 준공

진남정. / 사진=투데이군산
진남정. / 사진=투데이군산

개정면에 새로 조성된 진남정의 사대는 철근 콘크리트조 2층 건축물로 지붕 등에서 부분적으로 전통 목조 건축물의 형태를 적용했다.

과거 월명동에 있던 진남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건물로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높고 기둥을 세운 후 소로 수장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새로 조성된 진남정은 원발산 마을 북쪽의 최호 장군 유지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북축으로 길게 활터를 조성하여 북쪽에 사대를 두었다.

8,200여㎡의 부지에 들어선 2층 규모의 사정(射亭)은 2006년 준공됐다.

겉보기엔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내부와 사대는 목조기와 구조의 전통양식을 갖춘,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2층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은 정남향으로 서 있다. 오른쪽을 벽처럼 두른 편백나무 숲은 멀리 들판을 가로지른 바닷바람을 막고 비스듬히 경사진 왼쪽은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진남정의 사대에 오른 동호인들이 마음을 모아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진남정의 사대에 오른 동호인들이 마음을 모아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 사진=투데이군산

각궁의 경우 나무와 물소 뿔 및 쇠심줄, 대나무, 뽕나무, 신우대, 버드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천연재료만으로 만들고 꿩깃대를 끼운 것이 특징이다.

이런 재료로 만들어져 장력이 뛰어나며 최대 사거리 300m, 유효 사거리는 145m 내외에 이르는데다가 파괴(살상)력도 양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한편 100년 역사의 호남 7개 명문사정은 강경 덕유정, 황등 건덕정, 익산 송백정(옛 이화정), 김제 홍심정, 부안 심고정, 정읍 필야정, 군산 진남정을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