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17] 개정면의 동네들과 성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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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17] 개정면의 동네들과 성씨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2.29 12:08
  • 기사수정 2023-12-29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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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현 서삼면(조선)→ 개정면(일제)→ 개정리(73년 7월1일)→ 현재
창녕 성씨· 남원 양씨· 전의 이씨 등 군산지역 주요 성씨들의 고장
고향에서 잊혀진 국민가수 ‘서수남’ 아시나요
군봉공원에서 내려다 본 개정 들녁.
군봉공원에서 내려다 본 개정 들녁.

개정면은 본래 마한의 땅이었다. 조선시대 임피현 서삼면에서 개정면으로 바뀐 뒤 일제강점기엔 개정면이란 행정구역으로 설정됐다. 개정리는 군산시로 편입(1973년 7월1일)됐고 도농통합으로 1995년 1월1일 개정면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6개 법정리 28개마을로 이뤄졌다.

개정면(開井面)은 원래는 서삼면(西三面)과 서사면(西四面)의 9개동리였다.

샘정(井)자 마을인 동정리(洞井里)와 개정리(開井里)와 정수리(井水里)가 있다.

옛 노인의 말에 의하면 개정리쪽에 우물이 있었는데 풍수설에 그샘을 덮는 것이 좋다하여 덮었었다. 그리하여 덮을‘개(蓋)’자 ‘개정(蓋井)’이었다.

그런데 그후 크게 가물어 다시 그샘을 판데서 열을 ‘개(開)’자 개정(開井)이 된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해오는 말이고 개정이라는 말은 우물과 연관이 있기는 하나 開井帝에 연유된다.

옥구군지에 재군 이십리 개정리(開井里)에 개정제가 있는데서 개정리의 명칭이 생겼고 또 개정리에서 개정면의 명칭이 생겼다고 본다.

개정면을 다루면서 기억해야 할 인물은 많지만 우선적으로 공간적인 의미를 둬 가수 서수남을 다루고자 한다.

# 개정 출신 가수 서수남

서수남은 고향에서 철저하게 잊혀진 국민가수다.

어린 시절이 좀 어두운 편이다.

그는 1943년 2월 경기도 경성부 창신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아버지 서사문과 어머니 박순금의 3대 독자이자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고 100일이 지나고 사망하였기에 홀어머니와 단둘이 같이 지낸다.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계동리 출신인 부친은 서수남의 조부 때부터 대대로 이어온 한학자 집안이었는데,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49년 서울창신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군산시 개정면 통사리 동화마을의 할머니 집에 맡겨졌고, 이 곳에서 살면서 발산초와 이리동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졸업 후 다시 상경하여 어머니와 살 수 있게 됐고 서울공업고 화학과를 다녔다

한양대 화학과 졸업 후 MBC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에서 하청일과 함께 ‘서수남· 하청일’ 콤비로 본격적으로 데뷔하였다.

1969년 동물 소리를 흉내낸 ‘동물농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곡은 미국의 포크그룹인 브라더스 포의 노래인 ‘DO ADORE HER’를 번안한 것.

이 곳은 원래 1964년 서수남이 결성한 4인조 아리랑 브라더스의 곡이었다.

아리랑 브라더스는 한국의 브라더스 포를 꿈꾸며 국내 최초로 뉴웨이브 장르의 시도를 하였던 컨츄리 포크 그룹.

중앙대에 재학중이었던 하청일을 만나고 서수남 자신이 소속된 대한합창단 단원인 박창학, 서울대의 음대생이자 칠성 사이다 사장의 아들인 최용삼이 합류했었다.

1975년에는 ‘과수원 길’이라는 곡이 유행하며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곡은 서수남 하청일 듀오의 자작곡이 아니라, 원래 있던 동요를 불러 인기를 끈 것이다. 즉 교과서에 실린 게 먼저이다. 또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던 현직 수녀 가수 싱잉 넌(Singing Nun)의 ‘도미니크’도 번안해 불렀다.

사실 ‘서-하 듀오’는 지금으로 보면 컬투와 비슷한 개그와 노래를 동시에 하는 코믹 듀오였고, 무대에서도 노래만이 아니라 개그도 같이 선보이는 형태였다.

동요와 코믹송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70년대 어린이날 행사에 단골로 나왔으며, 옷차림도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특이한 것을 자주 입었다.

키가 큰 서수남은 카우보이 모자에 체크무늬 셔츠와 조끼 차림을 즐겨 했다. 토이스토리의 우디 복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상대적으로 단신인 하청일은 청바지 재질의 멜빵바지를 많이 입었다.

고향과 거의 인연을 끊겼지만 그를 기억하는 동년배들이 적지 않다. 그 때문에 고향에선 그를 그리워한다. 그는 여전히 현역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 개정면의 여러 성씨들… 수백년간 집성촌 이뤄

개정면 발산리로 들어가는 길.
개정면 발산리로 들어가는 길.
개정면의 옛 일양약품 공장 주변과 마을. / 사진=개정면사무소 제공
개정면의 옛 일양약품 공장 주변과 마을. / 사진=개정면사무소 제공

아래 내용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이종예 전군산시청 국장 등 인근 원로들의 구술을 참조했다.

창녕 성씨

16세기 중엽에 성수번(成秀蕃)이 경기도 용인에서 군산시(옛 임피현)동일면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성수번의 후손들이 임피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였다. 그 중에 개정면 일대에 형성된 집성촌이 가장 오래까지 남아 있다.

개정면 일대 창녕 성씨(昌寧 成氏) 집성촌은 16세기 중엽에 성수번이 경기도 용인에서 군산시(옛 임피현) 동일면으로 이주하면서부터 형성됐다. 성수번은 조선 시대 임피에 세거한 창녕성씨 좌랑공파의 입향조이다. 좌랑공은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 성사준이고, 성사준의 6세손이 성수번이다.

성수번의 셋째 아들 성봉천(1534~ 1593)의 생애로 보아, 성수번이 임피에 입거한 시기는 16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성수번은 선무랑, 통예원 인의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1562년(광해군 14) 예조판서에 추증됐다.

남원 양씨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서수면, 옥서면, 개정면, 대야면, 성산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남원 양씨들은 고려가 멸망하자 옥구현 동면 풍촌리에 입거한, 삼중대광(三重大匡) 우정승을 지낸 양의생(남원 양씨 시조의 7세손)의 후손들이다.

형성 및 변천

남원양씨 시조 양주운(梁朱雲)의 7세손인 양의생(梁宜生)은 고려조(高麗朝)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삼중대광 우정승 겸 판위위시사에 이르렀다. 고려 말에 국세가 기울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뜻을 같이 하는 8명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남쪽의 옥구현 동쪽 풍촌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자취를 감추었다.

양의생이 고려 말에 옥구현 풍촌리에 입거한 이후 양의생의 후손들이 개정면 통사리를 중심으로, 서수면 서수리· 마룡리, 옥서면 옥봉리· 선연리, 대야면 지경리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양의생의 아들 양권(梁權)은 1401년(태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했고 홍문관 교리, 이조 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양권이 이조 판서를 지냈다는 이유로 후손들은 자신들을 남원양씨 이조판서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전의 이씨

전의 이씨(全義 李氏) 전서공파 후손들이 15세기 말 경에 어머니인 인동 장씨와 아들 이수인(李守仁: 시조 이도(李棹)의 12세손)이 예산에서 임피로 들어와 거주한 이후로 군산시 개정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였다. ‘전서공’은 이수인의 고조 이화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시조 이도(李棹)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세운 공로로 삼한 개국 익찬 2등 공신에 녹훈(錄勳)되었고, 전산후(全山候)에 봉해졌으며, 시호로 성절(聖節)을 수여 받았다.

왕건이 남쪽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금강에 이르렀지만 강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강을 건너는 계책을 제시하여 도(棹)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한편, 임피에 세거한 다른 전의이씨 전서공파가 있다. 이들의 임피 입향조는 16세기 전반 경에 연일에서 임피로 입거한 이기형(李祺亨: 1582~?)이다. 이수인과 이기형의 가계는 전서공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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