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15] 한국의 슈바이처 '쌍천'과 그 기억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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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15] 한국의 슈바이처 '쌍천'과 그 기억들(상)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2.05 10:47
  • 기사수정 2023-12-05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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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천 이영춘 박사… 농촌 보건위생 선구자로 농촌 보건에 헌신
군산간호대학교… (재)한국농촌위생원(51년) → 개정간호학교(62년)
→ 개정간호전문대(79년)→ 군산간호대(98년) → 현재(2012년)
군산간호대학교 전경
군산간호대학교 전경

최근 1세기동안 군봉공원의 안자락에서 가장 특징적인 공간 중 하나가 아마 군산간호대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는 건물이란 구조물보다는 특정 인물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어서 군산의 테마핵심공간으로도 부족함이 없다하겠다. 이 때문에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용솟음을 치고 있다.

본래 개정면이었지만 도심팽창 과정에서 개정동이란 법정동으로 새롭게 변신한 것이다.

# 한국 슈바이처 이영춘(1903~ 1980) 박사의 삶과 군산과의 인연

군산을 기억하는 외지인들은 보통 두 가지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젊은층보다는 장년층들이 주로 기억하는 것이겠지만…

장년층들은 역전의 명수 군산상일고(직전의 군산상고)를, 또 다른 이들(주로 식자층)은 쌍천 이영춘 박사 등을 어김없이 기억해낸다.

이 박사는 군산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랑스러운 군산인이자 한국의 슈바이처와 같은 분이다. 이영춘 박사를 모르는 군산사람들은 거의 없겠지만 그의 삶과 군산에서의 족적들을 통해 그의 업적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이 박사와 떼려야 뗄수 없는 곳이 군산간호대와 이영춘 가옥, 모세스 영아원, 옛 개정역 등이다.

이 박사는 본래 구마모토 농장의 의사로 군산과 인연을 맺었지만 해방 후 족적 중 핵심적인 공간은 군산간호대와 옛 개정병원이 아닐까 싶다.

이 대학교는 1951년 7월에 재단법인 한국농촌위생원(초대이사장 이영춘)에서 설립한 사립 대학교.

농촌위생연구소 고등위생기술원양성소로 개교한 이후 1953년 개정간호고등기술학교(3년제), 1962년 개정간호학교(초급대학과정, 수업 연한 3개년)로 개편된다.

1974년 3월에 학교법인 세대학원(현 경암학원)이 설립되고 세대제지의 고판남 명예회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개정간호전문학교란 이름으로 설립됐다.

1979년에 개정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됐다가, 1998년 5월 군산간호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의 군산간호대로 개편된 것은 2012년 1월이다.

앞서 이 대학은 2011년 기존 3년제에서 간호학과 학사학위(4년제) 과정으로 확대돼 간호학 특성화 전문대학교(간호학과 단일학과 편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면 쌍천 이영춘은 누구인가.

# 국내 ‘양호실 운영·의료보험사업’ 초석 마련한 한국의 슈바이처

만화로 스토리텔링한 이영춘 박사의 업적
만화로 스토리텔링한 이영춘 박사의 업적

이영춘은 1903년 평남 용강군 귀성면 대령리에서 부친 이종현과 어머니 김아옥의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평양고보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황해도에서 평산의원을 개업했다가 3년 만에 문을 닫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강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는 평양고보시절 일본인 은사의 소개로 당시 옥구군 개정면(지금은 개정동) 소재 구마모토 농장직영 의료시설의 자혜진료소장으로 1935년 부임하게 된다.

물론 농장주 구마모토는 소작인들 위한 자혜적인 사고로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들이 질병을 앓아 노동력을 상실할 경우 쌀 생산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이영춘 박사를 초빙한 것.

이렇게 해서 그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군산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부임하자마자 농장사무실 일부를 개조한 뒤 자혜진료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농촌 의료에 첫발을 내디뎠다. 방문환자뿐 아니라 인근 대야와 정읍 화호 등을 오가면서 밤늦게까지 진료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혹한 수탈로 몸과 마음마저 고통을 받는 동족의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수 십리 길을 자전거로 타고 다니는 것을 마다않고 무료진료 왕진을 다녔다고 한다.

또 진료 후 소작농이 아닌 일반 농가 분만환자까지 돌봤고 귀가해서도 진료기록을 보완하고 진료소 운영계획은 물론 끊임없는 연구 등으로 새벽까지 불을 밝히는 생활 연속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1939년 우리나라 양호교사제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개정초등학교(당시 개정보통학교)에 위생실을 운영했고 대야초등학교(1941)와 정읍 화호초등학교(1942) 등에 위생실을 신축해 기증, 우리나라 아동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해방 후에도 도립 군산병원장을 겸임하면서 개정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한 뒤 결핵과 기생충 등의 퇴치에도 앞장섰다. 1951년 전문 의료인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정고등위생양성소를 설립한 뒤 오늘날의 군산간호대학(옛 개정간호대학)으로 성장, 발전하는 초석을 다졌다.

군산과 인연을 맺은 뒤 군산은 물론 익산과 김제 등에 이르기까지 300만 명이 넘는 환자의 무료 진료와 각종 의료활동 등의 업적 때문에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로 추앙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로 명성을 얻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학자로서 길을 포기한 채 가족에게 번듯한 건물 한 채 남기지 않고 평생 농촌 보건을 위해 전념해온 진정한 의료인이었다.

그는 천식으로 생을 마감하기 7년 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조합사업을 시작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73년 옥구군 관내 2,000여명의 군민들에게 50원씩 조합비를 내고 무료진료를 받는 의료조합사업을 시작, 오늘날 의료보험의 초석을 만들었다.

그의 삶은 농촌 보건사업에 헌신해왔을 뿐 아니라 수많은 학교와 개정병원 등을 설립하는 등 전북과 충남 등은 물론 국내 의료발전에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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