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12] 항일운동· 국난 극복· 민주화 투쟁 앞장선 제일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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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12] 항일운동· 국난 극복· 민주화 투쟁 앞장선 제일고(하)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11.15 14:51
  • 기사수정 2023-11-15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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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기의 영명학교 출신들… 장관· 국회의원· 도지사· 항일지사 등 배출
한국전쟁기… 복교 2년 만에 국난 맞아 극복에 25명 군번도 없이 산화
독재와 맞선 민주화 투쟁… 82년 오송회의 교사들, 그리고 제자들 앞장

항일운동· 국난 극복· 민주화 투쟁 등의 역사적인 가치를 실천해온 자랑스런 학교가 군산제일고다.

그야말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경험한 것과 같은 축소판의 학교다.

여기에다 일찌감치 기독교 정신을 받아들여 미신타파와 근대정신 등을 함양, 민족자주정신과항일운동 등을 바탕으로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곳 출신들은 교사와 의료인, 정치인 등으로 근대와 현대를 연결한 선각자로서 역할을 톡톡히했다.

그들의 활동 면면은 전편 시리즈 등에서 다수 언급한 만큼 이번 장에서는 개괄적인 정리로 가름하고자 한다.

그 주된 내용으로는 △ 여명기를 연 영명학교와 그곳 출신들 △ 한국전쟁 때 학도병 대거 참전 △ 민주화 투쟁과 국가발전 헌신 등이 바로 그것이다.

# 여명기 영명학교 출신들… 항일지사들, 조국 광복에 헌신

군산지역의 항일운동을 언급하거나 다룰 때에는 제일고(영명학교)를 빼놓고 정확한 내용을 다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전국적으로도 항일투사와 민족운동 등의 중심에 있었고 민족의 암흑기에도 그 활약은 대단했다.

영명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은 일제강점기에 모교 교사나 구암병원 사무직원 등으로 군산3·5만세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도내는 물론 강경, 미국(송철 애국지사), 일본(옥구농민항쟁의 주역 중 한사람인 심재순 애국지사) 등 항일운동까지 앞장섰다는 점에서 민족학교로서 대단한 활약했다.

특히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적극 나서 주도했던 인물군에는 영명학교 학생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궁멀예수병원 사무직 9명, 시민 8명, 영명학교 교사 4명, 구암교회 신도 2명 등의 순이었다.

11명의 영명학교 재학생이 징역형을 받았고 교사 4명은 징역 3년~ 1년6개월을 받았단다. 교사 및 궁멀예수병원 사무직 중에는 이 학교 졸업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독립운동 등에 앞장선 이들만도 총 30여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졸업생들은 해방 후 전국적인 정치인(국회의원(제헌의원 포함) 및 장관, 도지사)과 의학자, 목회자 등으로 국가발전에 헌신했다.

이 학교출신 중 유명한 목회자는 박연세 목사(1883~ 1944)와 이수현 목사(1895~1984).

박연세 목사(선생)는 1919년 군산 지역에서 3·5 만세 운동을 주모한 죄로 체포되어 복역한 후, 평양신학교에서 졸업한 뒤 목회자가 됐다. 익산시와 전남 목포시 등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1942년엔 목포 양동 교회에서 신사참배 거부와 설교 내용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재판 중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 목사는 구암동에서 태어나 해리슨(1894~ 1928: 한국 하위렴)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했다. 군산영명학교와 광주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순천매산학교(오늘날 매산고) 교사로 재직했다.

만주신흥군관학교 등을 거쳐 1918년 2월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중앙교회를 거쳐 개복동교회와 군산중앙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45년 목회 중 36년간 군산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전북도지사와 국회의원 등을 지낸 이는 김가전 전 전북지사(1892~ 1951)와 김병수 선생(1898~ 1951: 초대 이리부윤(시장)), 윤건중 전 농림부 장관(1898~ 1987), 이요한 전 전북지사(1899~ 1985), 문병량(1933~ 1996) 전 국회의원(보배그룹 회장) 등이다. 산업보건선구자 의사 ‘최영태 박사(1909~ 1992)’는 국내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은 물론 근대 등산 발전에 앞장섰다.

또한 채금석 선생(1904~ 1995)은 항일운동과 축구발전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금석배가 전국 중고꿈나무의 등용문으로 우뚝서고 있다.

# 한국전쟁과 국난극복 앞장 … 복교 2년 만에 학도병 대거 참전

1950년 6월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다.

청년 학생들이 이때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학교 별로 학도호국단 간부회의를 소집, 결의를 모았다.

학도병 대부분은 20세 미만으로 신체 검사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전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입대, 국난 극복에 뛰어들었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전국에서 가장 많은 참전과 함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지키다가 군번도 없이 산화했다.

전쟁 발발 한달도 안된 1950년 7월 13일이었다.

태극기 머리띠를 동여매고 중앙초등학교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군산지역 6개교 중학생(당시 6년제) 1,000여 명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전선으로 향했다.

이들 학도병들은 제 7사단에 소속되어 낙동강 전선과 포항 전투, 하동 전투 등에서 죽어갔다.

도내에서 참전한 학도병 중에서도 군산출신이 압도적이었다.

도내 530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중 군산출신은 7개교 211명으로 40%를 차지했다.

학교 별로는 군산중 97명, 군산상업학교 45명, 군산사범 29명, 영명학교 25명, 옥구중 11명, 북중학교 3명, 군산동중 1명 등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충혼탑(忠魂塔)이, 월명공원에는 ‘충혼불멸’(忠魂不滅)의 비가 각각 건립됐다.

이중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학교가 영명학교다.

복교한 지 2년도 안된데다 학년당 1~ 2반 체제의 학교에서 25명이 산화한 것은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지 약 8년만에 복교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 5共의 철권통치 속 82년 오송회(五松會) 사건 ‘용공조작’

오송회사건 연루 7명…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군산제일역사관에 나온 오송회 판결문
군산제일역사관에 나온 오송회 판결문

오송회 사건으로 직간접적인 정신적 또는 피해를 본 이들은 오송회 사건 연루자들이겠지만 제자들의 고통도 적지 않았다.

그 제자들은 고교졸업 후 전두환 군부정권의 폭정을 목도하고 대학 진학과 함께 대거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고 전국적인 학생운동진영의 핵심인사로 활동한 이도 적지 않다. 그중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정치개혁운동 등에 뛰어들어 족적을 남긴 이들도 상당하다.

오송회 사건 핵심이자, 제일고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고 이광웅 선생이 오는 12월 하순이면 31주기를 맞는다.

이에 오송회와 관련된 보도를 당시 필자가 근무했던 전북일보의 보도와 관련된 내용 등을 인용했다.

* 오송회 사건의 개요

이광웅 선생은 짐을 정리하다 어렸을 때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을 베껴두었던 노트를 우연히 찾았고 그것을 동료 교사인 박정석 선생이 그 시집을 복사해 가지고 있었다.

한 제자가 복사본을 박 선생에게서 빌려 갖고 다니다 버스에 두고 내렸는데 이것을 입수한 경찰은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교수는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등의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고 진단했다.

경찰은 내사를 시작했고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황윤태, 이옥렬 등 제일고 교사 5명이 ‘5ㆍ18 위령제’를 갖고 평소 자주 모여 ‘정부 비판’ 발언을 했음을 알았다.

이들은 평소 뜻이 맞는 교사들끼리 독서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걸리를 사들고 학교 뒷산에 올라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추모의식을 가지고 시국토론을 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전북도경(오늘날의 전북경찰청)은 1982년 11월 25일 제일고 현직 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총 9명을 ‘오송회(五松會)’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구속했다. 그 과정의 고문과 회유 등으로 고통받은 이들은 엄청났다. 그들이 굴레를 벗어난 것은 20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 오송회 사건 관계자 명예회복

[서슬이 퍼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 그들 모두가 가슴속에 안고 살아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바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교단에 선 젊은 교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시국에 관해, 독서를 통해 그들은 민주화에 대한 뜻을 스스로 지켜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공안당국은 이들을 ‘빨갱이, 간첩’라는 이름으로 교단 대신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들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도 씌워진 굴레, 취직은 물론 조그만 사업도, 여행도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80년대 전북지역의 대표적 공안조작사건인 이른바 ‘오송회(五松會)’사건 관련자 7명이 꼭 20년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2년 1월16일 제35차 회의를 통해 오송회사건 관련자 9명 가운데 7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명예가 회복된 사람은 조성용씨(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 엄택수씨(시민운동가), 이옥렬씨(이리공고), 채규구씨(군산 진포중), 박정석씨(서울 대명중), 전성원씨(약국 운영), 강상기씨(진안 제일고).

오송회사건은 82년 공안당국이 김지하의 ‘오적’시집을 낭송하고 시국에 관한 토론을 위한 군산제일고 전,현직교사들의 모임을 이적단체로 간주해 국가보안법을 적용, 이들에게 각각 징역 1년∼7년을 선고한 사건이다.

명예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성용씨는 “‘오송회’라는 이름은 아예 없는 이름이었다. 수사기관에서 82년 4월19일 교사 5명이 학교 뒷산 소나무숲에서 4.19위령제를 지냈다는 것을 근거로 ‘5명(五)’, ‘소나무(松)’를 따서 임의로 갖다 붙인 것”이라며 이 사건이 당시 공안당국에 의해 조작됐다고 말했다.

수감생활 이후에도 최근까지 겪어야 했던 감시와 차별은 이들 뿐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겪어야 했다. 88년과 99년 각각 교단에 다시 설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일부는 아예 교단을 등져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명예회복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길고긴 굴레를 벗어던진 기쁨과 함께 알 수 없는 착잡함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다.

박정석· 채규구교사는 “늦게나마 명예회복이 된 기쁨이야 말로 할수 없지만 기쁜 소식을 함께 듣지 못하고 먼저간 이광웅선생이 아쉽다”고 말했다.

당시 제일고 교사였던 고 이광웅씨는 독재정권 아래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시집 ‘대밭’등으로 지역문단과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시인이었다. 이씨는 지난 88년 복직했다가 전교조운동으로 다시 해직된 뒤 지병으로 92년 작고했다.

한편 이번 명예회복에서 제외된 이광웅씨와 황윤태씨는 제출서류가 늦어져 위원회 다음 회의에서 심의될 예정이다.] - 전북일보 2002년 1월18일 보도-

* 금강하구둑의 이광웅 시비… 건립 25주년 맞아

금강하구둑의 휴식공간에 가면 한켠에 오송회의 이광웅 시비가 있다.

얼마전, 한 선배에게 전화 벨이 울려 받아보니 이곳의 고 이광웅 선생(전 제일고 교사)의 시비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두 친구와 함께 은사의 시비가 있는 곳에 갔었다.

아쉽지만 나무들이 시비를 가리고 있어 주변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 추후 논의키로했다.

선배와 동기에게 물어보니 이 선생님의 작고 후 지역 시인과 제자 등이 나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억했다. 작년 그의 기일에 30주기 행사도 가졌단다.

이 시기의 연혁은 1998년 5월17일 이광웅 시비건립추진위원회(회장 정양 우석대 교수)가 금강하구둑에서 고 이광웅시인의 시비 제막해서 만들어졌다.

익산 출신으로 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광웅시인은 맑고 투명한 시세계와 양심의 시인으로 평가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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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초기인 82년 이른바 ‘오송회’사건에 연루되어 87년까지 수감생활을 한 바 있는 그는 85년 첫 시집 ‘대밭’을 낸 이후 92년 12월 22일 위암으로 쉰두해(1992년)의 삶을 마감하기까지 세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그의 시비는 1997년 6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회에서 처음 건립문제가 발의되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부터 모금을 한 결과 1998년 5월까지 기금(1,000만원)으로 제막식을 갖게 된 것. 이와함께 절판됐던 첫 시집 ‘대밭’도 이 시기에 재출간되어 제막식과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한편 ‘군산제일역사관’은 2021년 12월 건립됐다.

본관 1층 서편에 교실 2칸 규모로 만들어진 이 제일역사관에는 1911년부터 배출된 군산영명학교 졸업생 명부, 1931년 군산영명학교 졸업앨범, 1921년부터 1940년까지 군산영명중학교 학적부, 1914년 군산영명학교 특별과 졸업증서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내부에 군산제일고 전신인 군산영명학교 공간과 군산제일의 공간, 12명이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실을 분리해 구성했으며, 군산제일중고등학교 설립자인 고 고판남 회장의 유품들도 전시돼 있다.

1919년 군산3.5독립만세운동의 상황과 문용기 열사의 순국 상황에 대한 전시물도 한 면을 차지해 일목요연하게 사진과 기록 등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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