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의 사위’ 故 홍문길 전 감독 군산중·고 농구부 창단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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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의 사위’ 故 홍문길 전 감독 군산중·고 농구부 창단 앞장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9.06 11:53
  • 기사수정 2023-09-06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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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1953년까지 감독 생활… 오수철 전 감독과 지역농구 개척
홍 전감독의 아들과 접촉 확인… 祖父의 교회발전 헌신 내용 알려와
군산중·고 개교 100년사 편찬위원회측의 적극 도움받아 확인
홍문길 전 감독
홍문길 전 감독

내달 21일 군산중·고 개교 100주년 행사를 앞두고 군산농구의 시원과 관련된 귀중한 내용이 확인돼 화제다.

‘군산중·고 개교 100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문정일)’는 최근 홍난파 선생의 사위이자 고(故) 홍종필 목사(개복교회 5대 목사)의 아들인 홍문길(1914~ 1984) 전 감독과 얽힌 농구비사(祕史)를 알려왔다.

군산중·고의 농구 비사는 과거 구술과 전언에 의존했었다면 이번의 경우 홍 전 감독의 그 아들과 후배 등과의 확인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잊혀졌거나 누락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

이 과정에서 <투데이군산>은 홍 전 감독의 아들(홍익표 전 연성대 부총장)과 메일을 주고 받은 뒤 각종 언론 보도내용, 군산시사(2000년 편찬) 등을 섭렵해서 정리했다.

군산의 농구역사는 1943년 홍문길 전 감독과 오수철 전 감독(작고)의 노고와 헌신으로부터 비롯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두 사람은 군산 농구의 선구자였다.

홍 전 감독은 1929년, 오 전 감독은 2년 후 각각 평양숭실중에 입학하면서 농구선수로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됐다.

이들이 기록상 군산출신 농구선수의 최초다.

홍 전 감독은 연희전문학교(1935년)에서, 오 전 감독은 보성전문학교로 각각 진학했다.

홍문길이 뛰던 연희전문(현 연세대)은 1935년 전일본농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그 선수들이 주축이 돼 베를린 올림픽(1936년)에 출전했다는 것이 당시 신문보도다. 물론 홍문길의 선수로서 활약상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이와달리 오수철은 보성전문(현 고려대) 농구팀의 일원으로 전일본농구선수권 대회에서 3년 연속(1938~ 1940) 우승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당시 신문들로부터 찬스 메이커로 찬사를 받았다는 게 군산시사(2000년 제작)의 기록이다.

다른 보도에 나온 오수철은 보성전문의 농구 선수로 활약하며 단신의 명슈터로 명성을 떨치며 광복 후에는 전북체육인 가운데 처음으로 런던올림픽(1948년)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아무튼 이들은 전문학교 졸업한 뒤 어느 정도 선수생활 등을 하다가 1943년쯤 군산으로 돌아온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주로 기억에 의존하지만 ‘군산시사’에 따르면 1946년 군산중(홍문길)과 당시 군산상고(오수철)의 농구부를 창단, 각각의 학교에서 지도를 맡았다.

이때부터 군산의 농구는 일반팀에서 학교 중심의 스포츠로 자리잡게 됐다는 평가가 군산시사(2000년 편찬)의 기록이다.

군산시사에 따르면 이들 농구 1세대는 이 시기에 김봉희, 조봉구, 김점봉, 정영만, 조준구, 이명구 등을 육성한데 이어 지역농구발전에 헌신했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년간 군산농구는 전북을 넘어 호남의 왕자로 군림했단다.

이때, 학교에서 육성해 농구선수로 활동한 이들로는 고병업, 김봉원, 박판길(1929~1998: 작곡가), 김갑균, 정규호 등이 있다.

1946년 창단된 군산중·고 농구부는 군산상일고 야구의 인기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수많은 국가대표와 우승 횟수, 에피소드는 그에 못지 않다.

그러면 홍문길 전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나.

군산농구부의 창단에는 우리나라 가곡의 선구자였던 홍난파 선생의 큰 사위이자 일제강점기 개복교회 5대 목사이자 교계 지도자였던 홍종필 목사의 아들.

군산고 농구부 60년사에 따르면 홍 전 감독은 1949~ 1953년까지 감독을 맡은 것으로 나와있다. 그후에도 꾸준히 제자들과 교감해 60·70년대까지 농구발전에 힘써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감독을 맡고 있을 당시 미국 빅토리아 농구단이 군산고를 방문, 꿈나무들과 친선경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다양한 농구 묘기를 보여줬다는 게 그의 아들 홍익표 전 부총장의 얘기다.

홍 전감독은 한전에 다니면서 군산중·고 농구부 발전에 앞장섰고 후에 군산항 하역용역회사인 다유기업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농구협회의 임원으로도 활약했다는 게 아들 홍익표 전 부총장의 증언이다.

이런 내용은 생존 당시 만난 김병남(작고) 전 서해방송 보도국장의 구술 전언과도 일치한다.

2010년 가을, 김 전 국장은 농구부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작곡가 홍난파의 큰사위 홍문길(작고)씨가 1943년 군산중 농구부를 창단, 오늘날의 농구도시 군산을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얘기였다.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그 당시를 소상하게 기억하는 60년대 고교에서 농구선수로 활동한 서울거주 70대의 한 인사도는 “직접 제자는 아니었지만 홍 전감독의 지도로 고대 대신 연세대를 선택해서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면서 홍난파의 큰 사위라는 내용까지 정확히 기억해냈다.

그는 1929년 평양숭실중학교에서 선수로 활약했고, 연희전문(1935년) 선수로 활약하다가 1943년 군산으로 돌아왔다.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면서 3년 뒤 군산중 농구부를 신설해 군산농구를 개척했다.

한편 (사)홍난파가옥 운영이사장이자 손자인 홍익표씨는 난파의 외손자다. 홍문길은 난파의 큰딸(홍숙임: 1918~ 1984)과 결혼, 그의 아들이 홍익표 전 연성대 부총장이다.

# 홍 전감독 아버지 홍종필은 누구…개복교회 목사 등 거친 교계 유명인물

개복교회의 5대목사였던 홍종필(1887 ~ 1935) 목사는 지금은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에 속해 있으나, 당시 강원도 울진군 평해에서 홍재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한양에서 진사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릴 때 한양에서 한성측량학교를 졸업했다. 13세 때 숙부 홍재신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횡포로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자 사촌형 홍종익(洪鍾翊)과 함께 한양에서 내려온 곳이 익산시 웅포면(당시 익산군 옹포면 재리)이었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터전을 내렸는데 농토를 마련해 생활터전을 넓혀 나가는데 성공해 그는 1년에 500석을 생산하는 중농으로 발돋음해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이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얼마 전 개항이 된 군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우연히 최홍서 조사를 만나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 출석한 교회가 군산개복교회였다. 홍종필은 여러 기록과 각종 기독교 신문 보도에 따르면 1903년 사촌형 홍종익이 기독교에 귀의한 내용을 볼 때 이 시기에 전후 홍종철도 기독교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침 김필수 목사가 개복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홍종필 장로는 1923년 신학교를 졸업하자 개복교회의 청빙돼 모 교회에서 목사(개복교회의 5대 목사)로서 사역을 담당했다. 그 후 그는 김필수 목사(1872~1948: 1915년에 열린 제4회 총회에서 한국인 목사로서는 최초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당선)의 후광을 받고 젊은 나이었지만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총회 임원으로 활동을 했다.

다양한 교계 활동하다가 1930년(43세) 9월 제1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병고로 인해 총회장직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1935년 5월 29일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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