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독립유공자의 기준은… 지역출신? 아니면 지역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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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독립유공자의 기준은… 지역출신? 아니면 지역항일운동?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8.14 18:31
  • 기사수정 2023-08-14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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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세부 자료 등 부정확하거나 군산중심 활동인사들 다수 제외돼
독립유공자현황(115명)… 국내항일 49명, 3.1운동 35명, 의병 10명 등
출신학교· 고향 등 구분관리 통해 지역항일운동 저평 확대될 것
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군산 3.1운동역사공원 입구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군산 3.1운동역사공원 입구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역사공원 상단에 있는 3.1운동발상지 조각상. / 사진=투데이군산
역사공원 상단에 있는 3.1운동발상지 조각상. / 사진=투데이군산

“지역에서 태어나야 하는것인가, 아니면 지역에서 항일운동 등을 해야만 하는가?”

광복 78주년을 맞아 군산의 전체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다.

특히 군산독립유공자들을 놓고 축소적인 접근을 하는 ‘지역 태생’을 기준으로 해야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해 ‘다른 지역출신’이라도 군산에서 활동한 근거가 분명하면 군산독립운동가의 범주에 넣어서 관리해야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지적이 바로 그 이유다.

이는 군산출신이지만 다른 곳에서 항일애국운동을 할 경우 그곳의 역사에 기록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군산시 독립유공자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체 독립유공자는 115명으로 잠정집계되어 있다. 이를 운동계열별로 분류하면 국내항일운동이 49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3.1운동계열 35명, 의병 10명, 학생운동 6명, 의병활동 4명, 일본 및 중국 방면 각 4명, 임시정부 2명, 중국방면1명 등의 순이었다.

이는 단순하게 군산(과거 옥구)에서 태어난 유공자라는 기준이라는 내용에선 부합한 말이겠지만 군산항일운동의 성격을 왜곡하거나 축소하는 잣대라는 점에서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여기에다 군산출신으로 되어 있지만 독립운동의 업적이 다르게 기술된 내용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라는 얘긴가

군산이 자랑하는 ‘한강이남 최초 3.1운동(또는 3.5만세운동)’이 근본적으로 주요 내용에서 크게 축소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군산 3.1운동의 주요 흐름도는 김제출신 김병수 선생(당시 학생) 또는 대야출신 이순길 지사→ 박연세· 김수영· 고석주· 이두열 등 교사→ 석방을 요구하는 다수 학생 및 시민들의 항의시위로 촉발됐다. 이 여파가 군산과 전북도는 물론 인접 권역까지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에는 군산출신은 아니지만 영명학교 졸업생이거나 교사와 멜볼딘여학교 교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다.

다른 곳에서 군산으로 유학 온 영명학교 및 멜볼딘여학교 학생들이 군산은 물론 익산과 전주, 논산, 제주 등 전북과 충남, 제주 등지에서 3.1운동을 했거나 주도했다는 사실을 국내 3.1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배경에는 특정 학맥과 종교적인 내용 등에서 비롯되기에 이를 포함시킬 당위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군산의 독립유공자현황의 오류는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다.

고석주(高錫柱: 1867~ 1937) 선생의 기록보면 더욱 심각성을 지니고 있다.

군산 3.1만세운동의 주역 중 한분인 고석주 선생의 출생이 군산시 기록에는 ‘1867~ 미상’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도 버젓이 똑같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일보와 해당 지역언론 등은 2017년 11월3일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 서거 80년만에 현충원 안장 기사를 잇따라 보도한 바 있다.

그 기록은 이렇다.

충남 논산시 은진면 태생인 고석주 선생은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해 신민회, 대한자강회, 국민회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고 선생은 1919년 군산 3ㆍ5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체포돼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출감 뒤 1929년 10월 서천군에 판교교회를 세워 교육사업 등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하다 1937년 7월 별세, 판교면 복대리 공동묘지에 안치됐다. 정부는 고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기록이 틀리지 않다면 군산시와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는 얘기 아닌가.

공훈전자사료관의 내용도 하와이 신민회 등의 기록 미주독립운동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뤄 이를 보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기록들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류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 독립운동사의 정확한 기록과 역사적인 의미를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는 군산출신과 지역 학교출신들을 망라해서 항일애국지사들의 정확한 사료검토와 활동 내용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군산출신은 아니지만 지역학교 출신들의 경우 다른 곳에서 항일애국운동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란 논리다. 

둘째로는 이들 자료들이 정리되면 그동안 자료들보다 출신지역과 항일운동 내용 등의 정확하 내용들을 적시하는 군산시홈페이지에 ‘항일운동전자사료관’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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