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10] 전국 유명 인사와 인연이 깃든 구암동산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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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10] 전국 유명 인사와 인연이 깃든 구암동산 주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7.24 19:23
  • 기사수정 2023-07-24 1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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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관료)· 체육· 예술인 등 전국적인 인물들 키운 인물의 고장
채금석… 항일운동· 군산축구의 선구자로 위엄
김기창· 박래현 화가 부부… 전쟁기 작품 활동공간
강봉균… 외환위기 극복 큰역할· 정치행보 오점

구암동산은 선교스테이션의 중심지로 근대문물과 기독교 사상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곳이다. 하지만 이곳을 거쳐 갔거나 인연이 있는 인사들은 항일운동 전선에 앞장섬은 물론 해방 후 각 분야에서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그동안 이곳을 거쳐간 항일애국투사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던 만큼 아무래도 이곳과 인연이 있었던 정치(관료)인· 체육인· 예술인 등의 행보도 다루고 마무리해야 할 듯 싶다.

이들 중에는 부모· 형제들과 함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극히 일부 인사는 잠시 거쳐간 이도 있다. 연령별 순서에 따라 이곳과 인연이 있는 인사들을 다뤄고자 한다.

이들은 대부분 구암동산 주변에 있는 구암동 261~ 398번지 일대에서 생활을 했단다. 오늘날은 그 흔적이나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있어 안타깝게 하고 있다.

#채금석(1908~1995)

채금석 선생이 어린시절부터 이사와 생활했던 곳이지만 지금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사진= 군산시 제공
채금석 선생이 어린시절부터 이사와 생활했던 곳이지만 지금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사진= 군산시 제공

영원한 축구인 채금석은 1908년 4월 9일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 마동마을에서 출생했지만 전가족이 구암동으로 이사,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생활했었다.

이곳에서 정착한 채금석 선생이 축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소년기. 아마도 교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영명학교 등에서 선교사와 학생들간 축구경기에 심취한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해서 축구의 기초를 다져 작지만 다부진 체격과 주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1920년 창단된 평화축구단은 20여명으로 구성된 군산 최초 조선인 체육단체로 1930년 7월 출범하는 군산체육회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23년에 열린 전조선 축구대회에 출전, 뛰어난 패스 감각과 빠른 주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

2년 후 경신학(5년제)에 입학한 그는 김용식과 함께 경신중 축구를 이끌며 조선축구대회 2년 연속 우승을 견인했다.

하지만 4학년 때인 1929년 광주학생의거사건과 관련, 일본 관헌 폭행사건으로 퇴학을 당한다.

이후에도 계속 평화축구단 등 여러 축구조직을 만들어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1930년 11월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경·평전(경성·평양 축구대항전)에 경성팀 우승(전적 2승 1패)을 이끌었다. 몇 년 후 제15회 전(全)조선종합경기대회(1934)와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경성축구단의 우승 견인했다.

또한, 1935년 일본에서 개최된 제8회 명치신궁경기대회 겸 베를린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2관왕의 주역이었다.

문제는 그때 베를린올림픽(1936) 후보로 발탁됐지만 일경 구타사건 경력이 밝혀져 탈락, 아픈 마음을 간직한 채 귀향하게 된다.

그후 그는 군산시 축구팀(일반부), 구암동 축구팀(청소년), 배달성냥회사 축구팀, 영명고교 축구팀, 구암초 축구팀 등을 만들어 고향은 물론 우리나라 축구발전에 매진한다.

새벽마다 볼을 듣고 운동장을 찾았던 채금석, 그는 쉰셋 나이에 전국체육대회 전북대표팀(일반부) 선수로 출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남긴다

그는 평생을 축구공과 함께 살아온 축구계 원로로 고향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줬다. 비록 일제강점기엔 선택의 여지없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운동장을 누볐지만, 승리의 기쁨만 이 아니라 축구 경기의 표상을 뛰어넘어 하나의 정신적 의미를 심어줬다. 그는 축구와 함께 살았고 죽는 날까지 축구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타계했다.

이에 군산시는 1992년 그의 이름을 딴 ‘금석배’를 창설하여 한국 축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채금석의 정신를 기리고, 군산과 전국의 우수선수 발굴을 목적으로 매년 열리는 학생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군산에선 잊혀진 우향 박래현 화백(1920~ 1976)

 남편 김기창 화백(1913~ 2001)과 한국전쟁기 피난생활

군산출신 박래현 화백과 김기창 화백이 한국전쟁기에 3년간 살았던 거처. / 군산시 제공
군산출신 박래현 화백과 김기창 화백이 한국전쟁기에 3년간 살았던 거처. / 군산시 제공

사실상 군산 출신이지만 군산에선 철저하게 잊혀진 천재화가이자, 여성화가의 반열에 오른 이가 있다. 그가 우향 박래현.

군산을 우향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어린시절과 요즘 초· 중· 고교를 군산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물론 학제는 다소 오늘날과 다르다.

‘박래현의 부모님은 결혼을 결사반대하여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김기창은 아예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친구들만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세간에서는 장애 화가와 엘리트 여성화가의 만남을 대서특필했다.’

운보와 우향의 인연은 1943년 김기창이 30세 되던 해였다.

운보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재능있고 인격이 훌륭한 박래현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박래현은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나 군산에서 성장했고, 도내에서 상당기간 거주한 뒤 경성관립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부모와 남매들이 살았던 곳이라 사실상 우향의 고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박래현이 일본여자미술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잠시 서울에 머물 때였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박래현은 학교 선생이었던 아는 언니의 가정방문을 따라가서, 방문 학생의 오빠인 김기창을 만나 처음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이들은 3년간의 필담 연애 끝에 1946년 결혼식을 올렸다.

우향은 1944년 도쿄 여자 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1956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노점(路店)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동양화가 김기창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동양화의 형식을 벗어난 조형실험적인 작품과 추상적인 작품들을 함께 제작했으며, 판화와 오브제 작업도 했다.

박래현은 해방 후에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한 새로운 동양화풍으로 1956년 대한미협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추상화의 물결이 일자 김기창과 함께 동양화의 추상을 이끌었고,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방문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뉴욕에 정착,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영역을 확장했다.

7년 만에 귀국하여 개최한 1974년 귀국판화전은 한국미술계에 놀라움을 선사했으나, 1976년 1월 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그러면 운보와 군산은 무슨 인연이 있었나.

당시 한국전쟁의 암운을 피해 처가인 군산으로 피난 갔던 운보는 예수의 고난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적 성화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처가의 창고를 빌려 고달픈 전쟁살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운보가 군산으로 피난와 생활한 기간은 1951년 1.4후퇴부터 약 3년간.

우향의 본래 고향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가족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남동생은 군산에서 교직생활을 한 이도 있다.

그곳에 있던 구암교회를 부부가 다녔는데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미국 선교사의 권유도 더해졌다. 운보는 ‘예수의 성체가 꿈에도 보이고 백주에도 보였다’고 할 정도로 작품제작에 몰입했다. 물론 이 시기에 생계를 위해 미군비행장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이때 1여 년에 걸쳐 탄생한 것이 판화작품 ‘예수의 생애’ 시리즈 중 하나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운보는 예수와 당시 등장인물, 배경을 모두 한국인과 한국 복식(服飾), 배경으로 바뀌어서 성경의 내용에 따라 29점을 그렸다.

‘예수의 생애’는 기독교가 토착화를 드러내는 한국적 성화로 가치가 높다. 빠르고 부드러운 운필과 뛰어난 구성력 등 운보의 회화적 성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복색의 인물들과 전통 한옥이 세필로 묘사돼 생생한 느낌의 풍속화를 연상시킨다.

한국 미술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예수의 생애’는 청각장애를 예술로 승화시킨 운보의 대표작.

운보의 ‘예수의 생애’ 전작이 독일 문화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이는 2017년 국민일보의 기사 내용이다.

신약성경의 주요 장면들을 30점의 화폭에 압축적으로 담은 이 전작은 독일연방정부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루터 이펙트 기획전’에 초청돼 2017년 4월 12일∼11월 5일 독일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주요 섹션인 ‘한국-기독교 부흥의 땅(Korea―Boom Land of Protestantism)’에 전시돼 한국 개신교의 전파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이 연작은 1954년 4월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에 있는 화신화랑에서 첫 전시를 했다. 이때 독일의 한 신부가 ‘다 좋은데 예수의 부활 장면이 빠졌다’며 1점 더 그리기를 권하자 운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3년 뒤 운보는 ‘부활’을 완성해 화룡점정을 찍었다고 전해진다.

#강봉균(1943~2017)

강봉균 전 장관이 어린 시절부터 보냈던 생가지 주변. / 사진=군산시 제공
강봉균 전 장관이 어린 시절부터 보냈던 생가지 주변. / 사진=군산시 제공

군산 출신인 강봉균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경제부장관,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국회의원 3선을 지냈다. 나중에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역임했다.

강봉균 전 장관은 어떤 인물인가.

외환위기 극복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강 재정경제부 장관이 2017년 1월 31일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경제관료를 역임하였다. 유달리 아이디어가 많고 머리 회전이 빠르다고 해서 꾀주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1943년 군산에서 태어나 군산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뒤늦게 22살의 나이로 서울대 상학과(경영학과)에 합격했고, 행시 6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김영삼 정부였던 1996년 8월에 정보통신부 장관에 취임해 외환위기가 한창이었던 1998년 2월까지 정보통신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경제수석을 거쳐 1999년 5월에는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경제 사령탑에 올랐다.

그는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재벌 개혁과 부실 기업과 금융회사의 구조조정을 이끌며 경제회복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경기부양을 위한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사용한도 폐지나 길거리 카드회원 모집 등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으로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2002년 재·보선에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해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리고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후보의 경제 분야 공약을 주도하면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18대까지 내리 3선 의원을 지낸 뒤에는 고향인 군산대에서 석좌교수로 지냈다.

고향에서 비난을 받게 된 것은 민주당인사로 활동하던 그가 2016년 4.13 총선에서 갑작스럽게 새누리당에 입당해 공동선대위원장을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밖에도 이곳에 살았던 인사들 중에 유명인 중에 빠진 이는 양기준· 기철 형제.

이들 형제는 구암교회를 다니던 부모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구암교회와 영명학교를 다닌다.

이곳에서 전국 최초의 야구를 시작한 이들로도 알려졌다. 3.1운동 때는 구암병원 사무직원으로 근무하면서 항일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들 중 한명은 훗날 의사로서 활동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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