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7] 항일정신의 산실 영명학교 빛낸 인물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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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7] 항일정신의 산실 영명학교 빛낸 인물들(3)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7.06 11:01
  • 기사수정 2023-07-07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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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보건선구자 의사 ‘최영태’…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 근대 등산 발전 앞장
옥구 농민항쟁 주역 심재순 지사… 일본 동경서 이엽사 농장 소작쟁의 독려
미주항일운동 앞장선 송철 지사… 캘리포니아대 졸업 후 대한인동지회 맹활동
1931년 영명학교의 학생 및 교사들/사진 출처=군산제일역사관
1931년 영명학교의 학생 및 교사들/사진 출처=군산제일역사관

군산영명학교 출신의 항일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였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국내외를 넘나들을 정도였다.

이들 중 핵심인사는 전편에서 다뤘던 김가전 선생(전북지사 역임)의 상해 임정활동 사례도 눈에 띄지만 일본이나 미주항일운동에 헌신이도 있다.

이뿐 아니다.

국내의 경우 전북도내 뿐 아니라 제주도, 서울 등 전국을 무대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이미 다룬 전남 목포에서 목회활동 중 순국한 박현세 선생(목사)과 강문호· 강규언 등의 지사는 제주도에서 항일운동은 물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었다.

일반적인 항일운동 이외에도 우리나라 산업보건분야의 선구자이자, 세균학의 권위자로 활동한 이도 있다.

그가 의사로 맹활동한 최영태 박사다.

그는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과 대학 재학 시절 근대등산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진폐증 등에 대한 연구로 산업보건분야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 국내 의학발전 선구자들

항일정신의 메카라는 영명학교 이미지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 이가 최영태 박사다. 최박사는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과 함께 진폐증 환자 보호에 앞장선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가계도 역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최 박사의 조부는 지경교회(옛 만자산 교회) 설립에 앞장선 최흥서 장로(1860~ 1937)다. 최 장로는 김제 만경출신으로 기독교 신앙과 근대학문에 눈을 떠 대야로 이주한 근대기 신앙인이다. 그는 선교활동과 민중계몽운동(야학설치 운영)에 앞장선 인사였다.

그의 아들은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최주현으로 의사면허를 딴 뒤 대야 삼성병원을 운영했고 큰아들 최영태는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거쳐 세브란스 의전 학장을 지낸 세균학 권위자로 성장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작은 아버지(최영환)도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후 경기도 파주에서 병원을 개원했단다.

최영태 박사의 업적은 대단하다.(디지털 의사신문 2011년 8월11일자 참조)

▲최영태 의사(1909~ 1992) - 발진티푸스 백신 개발, 초대 산업보건협회장

최영태는 조부와 부친 등 집안의 영향으로 당시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영명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1930)를 졸업한 후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전공생(기초의학교실 조교)으로 재직하면서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았다.

국내로 돌아와 세브란스 의전 미생물학교실 교수 등을 거쳐 학장이 됐다.

세계2차대전 중에는 페스트 등 방역연구에 힘써왔고 해방후엔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학위(MPH)를 취득, 1949년에는 보사부 방역국장으로 재임하는 등 우리나라 전염병 예방에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최영태는 산업보건과 거리가 먼 분야에 종사하였으나, 1952년 대한석탄공사 보건관리실장으로 일하면서부터 산업보건 특히 광산근로자에서 발생하는 진폐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대한석탄공사 산하 장성광업소, 함백광업, 그리고 영월광업소 근로자를 대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규폐증(진폐증의 일종)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1956년 석탄(石炭) 2호에 발표했는데 이는 진폐증에 관해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보건 분야의 첫 논문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후 노동청 산업보건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특히 진폐증 환자의 보호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진폐증의 국제분류법 활용, 진폐증의 장해등급 판정, 합병증 그리고 단일광산에서 일하지 않고 여러 광산에 종사한 근로자에서 발생한 진폐증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한계 등이 그의 재직 중에 이루어진 일이다.

진폐증과 그 합병증으로 입원대상으로 판정된 환자들을 노동청으로부터 위임받고 가톨릭의과대학 성모병원에 직업병 클리닉을 개설, 진폐증 환자의 임상적 관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는 1965년의 일이었으며 진폐증환자 치료의 출발이었단다.

1963년 보건사회부에서 주관한 보건관리자 직무교육에 참가한 사업장 보건관리자와 보건관리요원 그리고 강의를 담당한 강사진 등 38명이 같은 해 보건연수원에 모여 대한산업보건협회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최영태 박사가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결코 화려하지 못했던 우리나라 산업보건의 첫 거름이었다.

그 후 1980년 회장 직을 사임할 때까지 17년간 회장을 연임한 것만 보아도 그가 산업보건에 얼마나 큰 관심과 열의를 가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한예방의학회장, 아시아 산업보건학회 수석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1970년대 아시아 산업보건학회를 서울에 유치한바 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사정으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도미한 후 미국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최영태 박사와 관련된 내용 중에 재미난 기록이 세브란스 의전 등산부 활동인데 월간 산와 연세산악회 회사(會史) 자료 등의 책자에 나온 대학 시절 등반 사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산악부는 1936년 7월 10~31일 사이에 최영태 외 6명이 태백산과 금강산을 등반했고, 1937년 7월 2개조로 나누어 한조는 오대산과 장백산을 등반, 다른 한조(임명소외 4명)는 태백산, 설악산, 오대산, 장백산,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한편으로는 산간마을의 산촌위생실사(무의촌진료사업)를 병행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서의 활동이 우리나라 근대산악운동(등산)을 발전시킨 사료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학교측은 1928년부터 근대등산활동의 시작을 세브란스의전 등산부로 보고 있다.

▲정공선(1885~1952): 한국인 첫 김제의료발전 헌신

정공선은 옥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군산 구암동에 머물고 있는 부위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됐다.

군산영명학교에 진학,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한 정공선은 학교장의 추천으로 군산 예수구암병원에서 원장 패터슨(Dr. J. B Patterson) 의료선교사의 조수로 일하게 됐다.

원래 머리가 영특했던 정공선은 영명학교에서 익혔던 영어 실력 덕분에 병원에 있는 약명을 거의 암기했다. 이에 놀란 원장 패터슨은 매주 토요일 농촌으로 무료 진료를 나갈 때마다 정공선을 대동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는 패터슨을 주의깊게 지켜보며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을 때마다 재빨리 챙겨 준비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정공선은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가정 형편상 어려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의사면허를 취득한 그는 패터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당시 군산 선교부의 선교구역이었던 전북 김제구역에서 의료활동을 하게 했다.

당시 패터슨 의료선교사는 자신의 구역이었던 김제 만경지방에 병원이 필요하다면서 ‘만경의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개업했다. 이것이 김제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서 문을 열게 된 병원. 그는 김제지역에서 의료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김제시내로 이전하여 벽성의원을 개원하게 됐다.

특별히 김제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자연히 벽성의원은 수많은 환자들로 붐볐다. 이곳에서 의료인으로 맹렬히 활동했다.

# 항일투쟁 전선의 선구자

▲심재순(1899~ 1939)

심재순은 1927년 군산시 서수면에 있던 일본인 농장인 이엽사 농장에서 소작 쟁의가 일어나자 일본 동경에서 항일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하여 국내로 발송하였다. 또한 1930년 9월 고향인 군산으로 돌아와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심재순은 임피보통학교 졸업 후 군산영명 학교에서 2년간 수업하고 서울에 와 대동 인쇄 주식 회사에 다니면서 부기 학교에 통학했다.

1925년 5월 부기학 연구 목적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츠카하라 경영의 춘양당(春陽堂) 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 경부터 일본인 가나자와[金鐸]가 경영하는 인쇄소 동성사(同聲社)에 취업하여 문선공(文撰工)으 일했다.

심재순은 이 인쇄소에서 주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던 중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게 됐다. 이로 인해 그는 독립 실현의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경 군산시 서수면의 이엽사 농장(二葉社農場)에서 소작 쟁의가 일어나자 1927년 12월 일본 동경에서 ‘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인쇄하고 투쟁에 나섰다.

심재순이 작성한 이 글은 전라북도 군산, 충청남도 강경·논산 등지에서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인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은 농민 조합을 조직하여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재순은 이 글을 국내의 신현국(申鉉局)· 심상악(沈相岳)· 심상호(沈相鎬)· 황봉규(黃琫珪)· 심호택(沈鎬澤)에게 발송했고, 특히 신현국은 이엽사 농장의 소작 쟁의에 관련된 농민들에게 이를 배부했다.

1928년 1월 일본 동경에서 김병우에게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심재순은 1930년 9월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고향으로 와 항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31년 8월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강문호

3·1운동 당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태생인 강문호(康文昊)는 기독교 신자로서 같은 제주 출신인 강규언(姜圭彦)과 함께 군산영명학교에 다니던 중 만세 운동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재판정에서도 방청석의 시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강문호는 창씨개명 및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오베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목사로 서품되고 경남 거창, 전남 무안, 서귀포, 한림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은 강목사의 인품을 듣고 제주도지사의 취임을 종용했으나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제 강점기 한림신사가 있던 자리에 한림교회를 크게 지어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섰으며 제주 지역 기독교 활동에 매진하다 1986년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항일 운동 대한 공훈으로 1980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송철(1896~1986)

다른 이름은 철(喆)· 휘규(彙圭)이며, 1896년(고종 33) 1월 23일 충청남도 금산(당시 전라북도 금산군)에서 태어났다.

전주신흥학교와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191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州)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전기수력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직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가담해 1929년 북미총회가 결성될 무렵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석하였고, 이어 북미총회의 재정 분야를 담당한 뒤 총회장으로 활약했다.

1941년 4월 재미 각 단체가 연합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열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자 이에 가담해 로스앤젤레스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조직한 경위군(警衛軍:일명 맹호군)의 참위(參尉)로서 재정 분야를 담당했다.

1943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기관지 북미시보(北美時報) 발행에도 참여했다.

1944년과 1945년에는 3회에 걸쳐 300원의 군자금을 출연하고, 1945년 7월에는 동지회 미국대표대회에 몬태나 지역 대표로 참석하는 등 미주 지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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