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103] 구암 3.1운동 역사공원과 ‘야소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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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103] 구암 3.1운동 역사공원과 ‘야소병원’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3.05.31 10:38
  • 기사수정 2023-05-31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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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소병원의 다른 이름 ‘구암예수병원’ 1896년 4월 본격 진료 시작
형제격인 전주예수병원보다 2 여년 먼저 개원… 상호 활발한 교류
의료선교사 드루이후 45년간 최고의 의료기관… 1941년 강제폐원
구암예수병원 직원 숙소. / 사진= 구암교회 제공
구암예수병원 직원 숙소. / 사진= 구암교회 제공

기독교의 호남 교두보였던 군산에서 최초의 서양식 진료는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와 전킨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군산진영 수덕산 기슭 초가를 매입하여 포교소(교회)를 설립하고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그 역사와 전통을 잇고 있는 전주예수병원보다는 역사가 깊다. 전주예수병원은 1898년 11월 여의사 마티 잉골드가 병원설립과 함께 진료를 시작한 것.

드루와 전킨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주민의 호응이 날로 좋아져 포교소가 발전하면서 하루에 50건 이상의 환자를 돌보았고, 무료 진료여서 계란, 생선, 조개류 등이 감사의 선물로 들어왔다고 한다.

좀더 커지면서 병원이란 이름 구체적으로 붙여진 것은 1899년.

군산이 개항되면서 수덕산 일대가 일본의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군산선교부와 그곳에 있었던 교회나 학교, 병원 등의 이전도 불가피했다.

이에 전도선이 정박하기 편리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현 군산시 구암동) 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耶蘇)’를 붙여 ‘야소병원’이라 했단다.

당시 이곳의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야소병원’은 일제의 탄압이 본겨화되면서 ‘야소(耶蘇)’란 이름 대신 ‘구암병원’ 이라 불렸다. 이 병원의 정식 이름은 프랜시스 브리지 앳킨스 메모리얼병원.

하지만 얼마 후 비상이 걸렸다.

드루 선교사가 1901년 병으로 미국으로 떠나자 이곳은 일시적인 공백상태에 놓여 있었다.

1902년 미국 버지니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Society Lying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다니엘(Thomas A. Daniel)이 1904년 결혼과 함께 군산으로 와 드루와 전킨이 설립한 이 병원을 인계받았다.

다니엘은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와 드루를 대신해서 진료와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선교의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1875~ 1929): 안력산)도 합류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두 달이 못되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귀국한다.

후임자인 다니엘이 물려받은 의료 시설은 낡고 보잘것없었다.

작은 방에서 진찰하는 동안 대기실이 없어 환자들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애타게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다니엘은 환자를 성실하게 돌보다 1910년 전주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급보를 받고 귀국하려던 알렉산더는 독립협회에서 활약하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군산으로 피신해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에게 함께 도미할 것을 제의한다.

1902년 알렉산더와 미국으로 건너간 오긍선은 켄터키주 센추럴 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을 수학,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오긍선은 1909년 군산 등지의 야소병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구암병원은 새로 국면을 맞는데 엄청난 시설 확충과 인술 등으로 급성장기를 맞는다.

구암예수병원 중흥기 이끈 패터슨 의료선교사 사택. / 사진=구암교회
구암예수병원 중흥기 이끈 패터슨 의료선교사 사택. / 사진=구암교회

다니엘 후임으로 의사 패터슨(J. B. Patterson(1876~ 1933): 손배돈)이 1910년 부임하여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했다.

특히 그의 의술에 대한 칭찬과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이 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으로 성장했다. 패터슨이 구암병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7년이었다. 이는 전체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14년 중 절반 가량.

의사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부란도)가 1924년 내한해 구암병원에서 농촌순회 진료를 하는 등 기독교 전파에 진력했다.

그러나 브랜드도 6년 후(1930년) 전주예수병원으로 옮겨가면서 구암병원의 옛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일제의 탄압이었다.

안팎의 어려움 속에 이 병원은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일제는 이곳에서 일하던 의료선교사들을 강제 추방과 함께 폐원해버렸다.

미국인 선교로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근무하던 의사는 윌슨이었고 간호사는 우즈였다.

앞서 일제는 1940년 11월16일 국내 선교사의 절반에 가까운 160명의 선교사와 자녀 49명을 추방했다는 게 한국 기독교사 연구소 자료로 나와있다.

이 병원은 환자들을 정성껏 돌봤을 뿐 아니라 지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약 45년간 문을 열었던 이곳은 약 7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여러 기록들은 전한다.

# 한국인 의사들도 맹활약… 홍복근 원장 등 다수

당시 한국 민중이 그러듯이 구암병원의 어려움도 가중됐다. 기독교와 구암병원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 사상과 일제의 군국주의 간 충돌 때문이었다.

기독교 전도와 의료사업을 병행하던 구암병원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의료 선교사들의 체포와 감금 등에 이어 강제 추방했다. 병원의 문을 닫기에 이른다. 그 후 다시 재개원도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안타까움, 연속이었다.

이후 각지에 있는 선교병원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권을 이양했는데, 일제는 이 병원과 그 관계자들을 계속 감시, 탄압했다.

이곳에는 외국인 의료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월이 가면서 한국인 의사들도 이곳의 발전에 힘을 보탰다.

최초 한국인 의사 오긍선(1909년)에 이어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 홍복근(1937년) 등이 있었다. (이곳의 많은 내용 중에는 조종안 기자의 다수 기사와 각종 언론 등에 나온 내용을 담았다.)

군산예수병원의 오랜 전통을 지킨 대표적인 이가 이곳 의사였던 홍복근 원장(1937~1941년: 군산야소병원 근무).

홍 원장의 부친 홍원경(45년 작고)도 구암병원 의사였는데, 33세 때 영명학교가 앞장선 3·5 만세운동(1919년)에 가담했을 정도로 민족주의자였다(2001년 2월 28일 새전북신문 참조).

홍 원장은 군산예수병원이 강제폐원을 당한 후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이란 간판을 걸고 명맥을 이었다.

이후 구암병원은 명산동소재 명산시장 근처(지금의 공영주차장)로 이전, 1982년까지 진료하다 자진 폐원했다.

홍 원장이 개업한 구암병원의 본래 위치를 놓고 여러 설이 있지만 별다른 증거가 없는 한 서래장터 옆에서 명산동 이주설을 준용하고자 한다.

시인 고은도 군산에서 승려로 있을 때 홍복근 원장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이런 인연 때문에 고은은 자신의 작품 만인보에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담아낸다.

[ (중략)그 병원 명산동으로 옮겨다가/구암병원 중인 된 홍복근 원장//훤한달 밤 대머리에 늘 웃음 피어나/병실 회진할 때/(중략)/몇년 걸린 중병환자더러 이제 얼마 안 있으면/펄펄 날아다닐 것이오/하고/누운 환자들한테 하나하나 힘 넣는다/(중략)

/복도에서 신음소리와 함께/다친 응급환자 들어와도/어서 오시오/어서 오시오/하고 마음 커디랗게 맞아들인다//그 병원에서 낳은 아기/구암쇠야/구암쇠야/하고 안경 속 눈웃음에/봄눈 녹아버린다/아마도 잠잘 때도/웃으며 잠잘 사람/그 사람이 홍복근 원장이다/아마도 꿈꿀 때도/(중략) ]- 고은의 만인보의 내용 중 일부-

한편 구암예수병원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세핑(1880~ 1934)이다.

세핑은 우리에게 서서평이란 한국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온 셰핑은 1912년 조선에 왔는데, 초기에 광주 봉선동의 한센인병원에서 2년, 패터슨 의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군산 구암병원에서 1917년 세브란스병원으로 파견될 때까지 3년을 일했다. 이 무렵 셰핑은 에드먼즈 해리슨 부부와 더불어 3년을 함께 일했다.

서서평의 리더십은 이때부터 두드러졌다. 군산에 간호학교 설립을 청원하고 이에 대한 자금도 선교부에 요청한다.

그녀가 한국에서 의료선교한 지 22년이나 됐고 군산과 광주 등지에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한센인 등에 대한 헌신해온 백의천사였다.

헌신적이었던 세핑의 의료선교에 대한 기억물로 광주광역시 양림동의 양림길에는 세핑 선교사들의 이름을 따 ‘세핑길’ 로 명명되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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