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8강] 옛 군산역~영동~중앙로 2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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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8강] 옛 군산역~영동~중앙로 2가까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9.21 13:00
  • 기사수정 2022-09-21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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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군산역 부근 풍경

군산역(群山驛)은 1912년 3월 6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당시에는 초가집도, 인적도 뜸한 지역으로 옥구군 미면에 속해 있었다. 경포천 지류를 끼고 서래산과 팔마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역사(驛舍)는 사각형 모양 지붕에 일본 전통양식 2층 높이의 목조건물로 구조와 외관이 북한의 평양역과 같아 그 자체만으로 볼거리였다 한다.

1916년 제작된 군산부 지도를 보면 군산역 부근(지금의 대명동, 신영동 금암동, 장재동, 미원동, 중동, 경장동, 조촌동)은 논과 갈밭이었다. 내항선도 째보선창 부근에서 멈추었다. 지금의 중동 로터리에서 구암동까지 길은 제방(뚝 길)으로 표기해놓았다. 따라서 승객들은 합죽선처럼 펼쳐지는 갯벌과 은빛 반짝이는 금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하며 기차여행을 즐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1923년 지도는 사뭇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철로가 내항 깊숙이 연장되고 기존 도심지와 군산역 사이(대명동, 신영동)에 시가지가 조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원도심권이 지금의 월명동, 명산동, 신흥동까지 확장되고 승객이 4배로 증가한 시기로 경제성, 편리성 등을 들어 군산역을 세관 부근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본인 중심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흑백사진을 통해 보는 일제강점기 군산역 광장은 지프차 한 대와 인력거 5~6대가 출구 쪽에 대기하고 있고, 손님을 태우고 출발하는 인력거꾼과 짐을 기다리는 지게꾼도 보인다. 기차가 도착한 후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오간다. 갓을 쓴 두루마기 차림의 노인, 중절모에 양복 차림의 승객들은 시대극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명치정, 구 경찰서 오거리 등에 인력거 차방(車房)이 여러 곳 있었다. 시내 요금은 50전으로 인력거를 끄는 노동자(인력거꾼)들은 대부분 조선인으로 생활이 비참했으며 자체적으로 만든 조합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차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차가 도착할 즈음이면 역으로 몰려들었다.

군산역에는 목조로 된 공중전화부스에 전동식 전화기도 설치하고 통화료를 받았다. 지금의 대명동 부근에 여인숙 골목이 조성되고, 호객꾼들이 자신의 여관 이름이 적힌 대나무로 만든 일본식 등(燈)을 들고 손님을 잡아끄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00년 화재사건 이후 사라진 대명동 윤락가(히빠리마찌)도 이때 생겨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군산역 광장에는 우(牛)시장과 재래식 오일장(1일, 5일)이 섰으며, 팔마재 쪽에는 고치를 말리는 건견장도 있었다. 마츠리 축제(10월 1일) 때는 일본인들이 군산 신사의 신을 모신 금상여를 메고 명치통(중앙로 1가), 소화통(중앙로 2가)을 지나 군산역 광장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갔는데, 이때 스모 경기도 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만남과 이별의 장소였던 군산역 광장. 광복 후에는 학도병 출정식, 군인들 열병식, 우승컵을 가슴에 품고 금의환향하는 선수들 환영식, 익산·전주행 합승 총알택시 정류장, 약장수 단원들의 연극무대, 선거철에는 후보들의 유세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동 로터리와 연결되는 4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그 시절 모습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일왕(日王) 이름의 도로명, ‘명치정’과 ‘소화통’

▲ 아라이 자전차점 모습(1944)/사진=조종안 기자
▲ 아라이 자전차점 모습(1944)/사진=조종안 기자

광복 1년 전(1944) 사진이다. 위치는 군산부 소화통 1정목(군산시 중앙로 2가). 가게 주인은 이규철(1912~1945). 처음 보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소유 상가 모습이다.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건물은 아라이(アラヰ) 자전차점. 방화수가 담긴 드럼통, 낯모르는 배우 사진이 들어간 영화 포스터, 일본어 간판 등이 시대를 반영한다.

고무신과 함께 신문물의 상징이었던 자전거. 1930~1940년대 국내에서 유통되는 자전거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군산의 양조장과 대형 방앗간들도 짐자전거를 대여해서 막걸리와 쌀을 배달했다 한다. 광복 후에도 자전거는 남자들이 꼭 소유하고 싶은 물건 중 하나였다. 따라서 지금의 외제 승용차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규철은 1932년 지금의 군산시 장미동 '정미소 거리'에 '전북자전차점'을 열었다. 그는 착실히 돈을 모아 1944년 소화통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그때 상호도 '아라이 자전차점'으로 바꾼다. 상호 변경에서도 식민지 백성의 아픔이 묻어난다. 총독부 명령으로 '전북'을 '아라이'로 바꾼 것. 당시 자전차점은 경찰서가 발행하는 허가증이 있어야 영업할 수 있었다.

일제 탄압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더욱 강화됐다. 1942년 7월 소화통 2정목에 있던 동부교회 최상섭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군산경찰서로 연행되어 문초를 받았다. 장로들도 잡혀가 고초를 당하였다. 빼앗긴 찬송가도 300여 권에 이른다. 그 후 고등계 형사들 감시 하에 예배를 봐야했고, 일제는 협력하지 않는 목사를 '미국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강제 사임시켰다.

이규철은 광복(1945)이 되자 상호를 '조화(朝和) 자전차점'으로 다시 바꾼다. '朝和'는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사는 세상이 됐다'는 의미였다. '朝'는 조선, '和'는 일본을 상징한단다.

민간 의용소방대원이었던 그는 그해 11월 일제가 묻어놓은 포탄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군산경마장 화재사건 때 인명을 구조하다 순직한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셋. 군산 월명공원에는 그를 포함한 희생대원 9명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군산소방서는 매년 11월 30일 추모제를 지낸다.

#명치정은 일본인 거리, 소화통은 조선인 거리

▲ 최근 중앙로 2가 모습(구 경찰서 방향이다. 오른쪽 하얀 상가 건물이 아라이 자전차점, 두 번째가 평양관이 있던 건물이다.)/사진=조종안 기자
▲ 최근 중앙로 2가 모습(구 경찰서 방향이다. 오른쪽 하얀 상가 건물이 아라이 자전차점, 두 번째가 평양관이 있던 건물이다.)/사진=조종안 기자

아라이 자전차점 오른쪽 길은 조선인 상점이 많았던 영정(榮町·송방골목)으로 통하는 골목길이다. 골목에는 1944년 4월 서울 이남에 최초로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에 들어선 대형 제지공장(북선제지·페이퍼코리아 전신) 일본인 직원 사택(長屋) 7, 8채가 있었다. 1944년 당시 자전차점 부근에는 영신유치원, 영취루(중화요릿집), 희소관(구 남도극장) 등이 있었다.

소화통(昭和町)은 군산의 도로 중 가장 늦게 개설됐다. 1924년 시가지 지가(地價) 조사에서 제외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구간은 경찰서 로터리에서 구복동, 대정동(큰샘거리), 장재동 일대를 관통하며 군산역까지 이어진다. 1928년 공사를 시작, 구릉지를 절개하는 등 난공사 끝에 1930년대 초 완공된다. 1935년 7월 포장을 완료, 군산의 중심도로 위상을 갖추게 된다.

명치정, 소화통 모두 일제가 자국 왕의 이름을 붙인 도로명이다. 그중 명치정은 일본인 거리 소화통은 조선인 거리로 불리었다. 명치정에는 부청(시청)을 비롯해 경찰서, 우체국, 공회당 등 공공기관 건물과 일본인 상가가 즐비했다. 소화통에는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단체 사무실과 학교, 상가 등이 많았다. 군산을 무대로 1930년대 식민지 암울한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 <탁류>에서도 느껴진다.

소화통은 명치정과 함께 군산의 동맥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인 전군도로(1908년 개통)와 곧바로 연결되어 광복 이후 전주-군산 자동차전용도로가 개통되는 1990년대 초까지 군산의 현관 역할을 하였다. 이는 군산의 도시 발전이 그만큼 늦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 콩나물 고개와 연결되는 ‘뼈병원 골목’(최근 모습)
▲ 콩나물 고개와 연결되는 ‘뼈병원 골목’(최근 모습)

"정주사는 요새 정거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 난 소화통이라는 큰 길을 동쪽으로 한참 내려가다가 바른손 편으로 꺾이어 개복동 복판으로 들어섰다. 예서부터가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 채만식 소설 <탁류> 42쪽에서.

소설에서 '새로 난 큰길'로 묘사되는 소화통은 주인공 초봉이의 출퇴근길이다. 그의 동생 형주의 등굣길이기도 하다. 아라이 자전차점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뼈병원 골목'(임정골 의원 골목)은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와 곧바로 연결되고, 한참봉 쌀가게는 그 고개 아래에 있었다. 서천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강을 건너온 정주사가 처음 집을 마련한 동네도, 초봉이와 고태수가 신혼살림을 차린 동네도 '큰샘거리'이다.

소화통에는 동일은행 군산지점,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 군산세무서, 수리조합 군산출장소, 충남정미소 매가리 판매소, 세창의원, 군산 농구구락부, 군산 중앙소비조합, 오리엔탈 기악상점, 평양관(한식당), 군산식당 등이 있었다. 주민과 중앙지 기자들이 1932년에 창간한 격월간지 <군산춘추> 사무실과 '조선인 음식점조합 회관'도 있었다. 음식점조합 조합장은 냉면으로 유명한 '강경옥' 주인이었다.

▲ 군산공립보통학교 조회광경(192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 군산공립보통학교 조회광경(192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군산 공립보통학교는 1907년 개교한 조선인 학교였다. 1909년 남녀공학이 되고, 3·1독립 만세운동 때는 건물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는다.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의 압력과 회유에 넘어가자 독립에 저해되는 친일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한 학부모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것. 재학생 70여 명은 연서로 자퇴서를 제출하며 항거하였다. 이 사건은 1919년 설애장터 만세운동(3·5 만세운동)과 더불어 군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으로 기록된다.

'어제는 영정(송방거리)에 카페가 늘었고, 오늘은 소화통에 음식점이 생겼다.'

1935년 당시 군산에 떠돌던 탄식조 유행어다. 초등학교 입학조차 어려운 조선 청소년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방황하고, 유흥문화에 쉽게 감염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개탄하는 다른 표현이었다. 당시 군산 인구는 약 4만(조선인 3만, 일본인 1만)으로 일본인 학교는 공립중학교, 고등여학교, 상업보습학교, 가정여학교, 청년 훈련소, 심상고등소학교 등이 있었다. 반면 조선인 학교는 공립보통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 군산 최초 한정식당 평양관

▲ 평양관 주인 이근삼 가족사진(193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 평양관 주인 이근삼 가족사진(1930년대)/사진=조종안 기자

평양관(平壤館)은 군산 최초 한정식 전문식당으로 알려진다. 이근삼(1889~1948)은 평양이 고향으로 1920년대 초 군산부 구복동(아라이 자전차점 옆 2층 건물)에 평양관을 개업하였다. 그는 조선인 상점 주인들로 구성된 '군산상업친목회' 회장을 지냈다. 일본인 미곡 중개업자들의 횡포로 억울하게 피해 보는 조선의 소작농과 소상인들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1920년대 군산은 일본인 악질 농장주들을 옹호하는 소작조합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횡포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옥구농민항일항쟁'이다. 이근삼은 1929년 10월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과 간담회를 열고 군산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연미중개점(延米仲介店) 철폐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근삼은 조선 청년 노동자들과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9월부터 노동야학과 소년단체 후원 사업을 펼치는 군산 노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냈고, 1926년 3월 시내 학원(광동학원, 한송학당, 영신여학원 등)과 노동청년회 보조금 모금 운동에도 앞장섰다. 1931년에는 경영난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군산 중앙유치원 정리위원을 역임하였다.

경술국치(1910) 이후 왕으로 강등된 순종황제가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 조선 팔도는 슬픔에 잠겼다. 장례 과정에서 대·소여를 인도할 봉도단(奉悼團)이 학교, 단체, 지방별로 조직되었다.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졌던 장례식. 군산에서도 상민(商民) 봉도단 열 명이 정해졌는데, 이근삼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관은 광복 후 군산에서 으뜸 한정식 전문식당으로 손꼽히던 청춘옥(靑春屋) 전신이기도 하다. 이근삼 아들(이보국)이 1930년대 후반 개복동 군산극장 앞에 개업해서 가업을 이은 것. 청춘옥은 1960~1970년대 총각 봉급쟁이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식당, 결혼식 피로연을 열고 싶은 식당으로 꼽을 정도로 유명했다. 청춘옥은 1990년대 중반 문을 내린다.

지역별 키워드

ㆍ영동: 구세군, 갑자옥 모자점, 풍천백화점(광복 후 중앙백화점), 천양사(정찬홍), 천일당은방, 삼광양화점, 광성양화점, 영정우체국, 형제상회(대륙고무화, 별표고무신), 동아상회(양복부, 양화부, 양품부), 양말공장(平壤洋襪所, 金光洋襪司), 군산문화사(유선방송국), 문학서원, 금희당, 이시계점(富田屋백화점), 개성상회, 인성상회(철물점), 천지상회(옷감집), 금성사(주단집), 형평사(백정들 단체), 영정파출소, 벽파여관, 중야악기점, 군산무선전기상회(1949, 가두선전, 확성기, 전축, 자가발전기), 영동야시장, 한양사진관, 원료정(요릿집), 영월각(迎月閣), 산본염료점(염색소), 조선일보 군산지국, 한호예기조합, 홍풍행(잡화점), 북경반점.

ㆍ중앙로2가: 동일은행(훗날 조흥은행), 군산세무서, 수리조합 군산출장소, 충남정미소 매가리 판매소, 군산 농구구락부, 군산 중앙소비조합, 오리엔탈 기악상점, 평양관(한식당), <군산춘추>(격월간지) 사무실, 조선인 음식점조합 회관, 개복동교회, 중앙초등학교, 세창병원, 계림주조장, 시외버스터미널, 신민당 당사, 뼈병원(임정골원) 골목, 농방 골목, 약전골목. 떡전 골목. 대정동(큰샘거리), 조선목재, 신흥목재주식회사 직매점, 흥아공업사(의자 제조 수리/ 농구, 가구, 건구 일절), 중앙공업사(가구 일절, 건축 건구 의자 제조 수리) 신흥건재사, 건일건재상회, 중앙유리점, 성공사, 파리악기점, 서울악기점, 영명악기점, 만원다방, 신신사진관, 군화당, 성심당, 서울당, 조화당(조화다방), 남풍당제과점(남풍당구장, 남풍다방). 아이디얼 미싱, 드레스미싱, 천일약국 옆 골목 태백캬바레, 오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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