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의 群山學 6강] 역전시장에서 옛 해양대까지(대명·평화동·죽성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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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의 群山學 6강] 역전시장에서 옛 해양대까지(대명·평화동·죽성동 일대)
  • 조종안 시민기자
  • 승인 2022.09.13 08:04
  • 기사수정 2022-09-1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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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장재시장 주변 이야기

군산의 시장(市場) 역사는 서래장터(경포)에서 출발한다. 조선 시대 경포는 서울을 비롯해 충청·전라도 각지로 물화가 오갈 정도로 큰 포구였다. 군산 개항(1899) 이후에도 번성했으나 전군도로(1908)와 군산선(1912) 개통으로 활기를 잃는다. 이후 일제가 장재시장을 개설하고 죽성포(째보선창)를 근대식 어항으로 조성하면서 경포는 장시와 포구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민족자본 유통을 차단하고 조선인들의 기업 설립을 억제하기 위해 <조선회사령>(1910년 12월)을 공포한다. 이어 전통 재래시장의 상거래 장악을 목적으로 <시장규칙>(1914)을 제정한다. 군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5년경 시행한 서래장터 현황(역사와 거래 규모, 상품 수급 지역 등) 조사 결과가 그것이다.

'시장규칙'을 제정한 일제는 본래 전통시장을 제1호 시장(상설 또는 정기 재래시장), 제2호 시장(지정된 건물 내에서 곡물 및 식료품을 파는 식료품시장), 제3호 시장(위탁이나 경매로 거래하는 농수산물 경매시장) 등으로 분류하고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조치한다. 제2호와 제3호 시장을 합해 '신식시장'이라고 했는데, 이 모두 조선인 시장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 군산 장재시장(1920년대로 추정) ⓒ 군산역사관
▲ 군산 장재시장(1920년대로 추정) ⓒ 군산역사관

일제강점기(1920년대) 군산 조선인시장(장재시장) 모습이다. 일제가 홍보용으로 만든 엽서 사진으로 '군산명소(群山名所) 선인시장(鮮人市場)'이라 소개하고 있다. 일제는 1915년 2월 장재시장을 개설하고, 부(府)에서 관리하다가 1918년 '군산시장'이라 개칭하였다. 시장개설 전 이 지역은 옥구군 미면 장재리에 속한 조선인 마을이었다.

장재리(藏財里)는 조선 시대 지명으로 1914년 둔율리 일부를 병합, '장재동'이라 하였다. 당시 장재동은 지금의 대명동·평화동·신영동·중앙로2가 일부를 아우르고 있었다(1923년 '군산시가도' 참고). 그 후 행정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1932년 일본식 지명인 장재정(藏財町)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 '정(町)'을 '동(洞)'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장재시장은 국내 최초로 개설된 신작로(전군도로)와 접하고 있었고, 기차역도 지척에 있었다. 또한, 도로를 경계로 시외버스터미널과도 마주하고 있어 유동 인구가 많았다. 조선인 동네임에도 부근에 공설목욕탕, 공설이발관, 공설질옥(공설전당포) 등이 자리하였고,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과 여인숙도 많았다.

▲ 1928년 6월15일 치 ‘동아일보’ 기사(조인현을 주범으로 표기하고 있다)
▲ 1928년 6월15일 치 ‘동아일보’ 기사(조인현을 주범으로 표기하고 있다)

숙박업소 중에는 평북 의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조인현(가명 오해룡)이 운영하던 '장재여관'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인현(趙仁賢)은 대한통의부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 모금 사명을 띠고 군산에 잠입한다. 권총과 격문을 휴대한 그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장재여관을 개업한 뒤 은밀히 활동하다가 1928년 6월 일경에 체포된다. 그해 나이 37세였다.

장재동 지역에는 조선운송조합, 농기구제작소, 철공소, 요릿집, 사진관, 군산형평사청년회관 등이 자리했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과 여관도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래시장을 낀 가난한 동네여서 그런지 강절도 및 횡령, 고소·고발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인 상점 주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벌인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08년 전군도로(군산-전주) 완공에 이어 1912년 군산선(군산-익산)이 개통되자 그동안 포구 중심으로 활동해온 군산 객주들은 타격을 받는다. 육로가 뚫리면서 화물 유통이 해상운송에서 기차와 자동차를 병행하는 육상운송으로 바뀌었던 것. 객주들은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기차역 인근(현 장재동, 대명동, 신영동 등)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다.

▲ 군산 기차역 부근 객주들 신문광고 모음(1922~1924)
▲ 군산 기차역 부근 객주들 신문광고 모음(1922~1924)

3년 동안(1922~1924) 중앙지에 광고를 낸 장재시장 인근 객주 및 업소는 영풍호(永豊號), 영창호 운수조(永昌號 運輸組), 유신운송부(畱信運送部), 백운학 객주부(白雲鶴 客主部), 공익상회(共益商會) 천임상회(天任商會), 신일상회(信一商會), 대동상회(大東商會) 김서욱(金瑞旭), 문평중(文平重), 강인묵(姜仁默), 채규현(蔡奎賢), 황호성(黃浩性), 조병희(趙炳熙) 등 20여 명으로 나타난다.

집 한 채 값보다 비쌌다는 전화기를 가진 조선인 객주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객주 이름과 상호에 운수조, 운송부 등이 따라붙는 광고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삼륜차를 포함한 짐차나 우마차 여러 대를 보유했거나 대여가 가능한 객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당시 군산에는 자동차 23대, 화물차 4대, 오토바이 10대 등이 운행되고 있었다.

군산역 부근은 광복 후에도 운수업체가 몰려 있었다. 1950년대 대명·장재동 일대는 군산운수, 삼성운수, 대한운수, 대한택시, 전북여객, 동아여객, 대령정기화물 군산영업소, 한국운수(주) 군산지점 역전취급소 등이 자리했다. 트럭 한두 대 보유한 개인업자도 많았다. 통계에 따르면 1963년 현재 군산시에 등록된 차량(승용차, 승합자, 화물차 등)은 모두 169대였다.

# 추억의 감도가(감독), 최근까지 존재

▲감도가에서 바라본 양키시장, 왼쪽 네모는 감독자리, 오른쪽 네모는 춘천주조장 자리(2009)/사진=조종안 기자
▲감도가에서 바라본 양키시장, 왼쪽 네모는 감독자리, 오른쪽 네모는 춘천주조장 자리(2009)/사진=조종안 기자

1931년 12월 군산 부청이 장재시장을 신영정 철도부지(현 공설시장 자리)로 이전할 때 한 축을 담당했던 감도가(감독)와 닭전(가축시장)은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장 기능을 유지한다. 그중 감도가는 지금의 튀밥집(뻥튀기집)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있었으며, 닭전은 양키시장 입구에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는 1970년대 이후 시나브로 사라졌다.

'감도가'는 탱크에서 우려낸 토종 감(柿)을 도산매하는 골목으로 장재시장 개설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번성기 때는 중매인도 여러 명 존재했다고 전한다. '감도가', '감독', '감뚝' 등의 연원은 산지에서 들여온 땡감(먹시)을 우려내기 위해 수십 접(한 접에 100개)씩 들어가는 큰 독(탱크)을 땅에 묻어놓은 것에서 유래한단다.

가을이 시작되면 감독은 이른 아침부터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경매했다. 길바닥에 5~10개씩 벌여놓고 손님을 부르는 행상들과 감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는 금방 우려낸 감이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계절의 전령사'이기도 했다.

스물한 살 때 감도가에서 감장수를 시작, 일흔 넘길 때까지 자리를 지켜왔다는 윤귀섭씨는 '일제강점기에는 땡감을 시멘트와 블록으로 쌓아 만든 대형 탱크에서 우려냈다'고 귀띔한다. 탱크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땡감 한 트럭도 더 들어갔다는 것. 광복 후에도 계속 탱크를 사용하다가 감 소비가 줄어드는 1970년대 이후 쓸모가 없어져 덮어버렸다고 한다.

▲ 탱크에서 우려낸 토종감(먹시)/사진=조종안 기자
▲ 탱크에서 우려낸 토종감(먹시)/사진=조종안 기자

"옛날이는 전주, 김제, 대천, 부여, 대전서도 와서 감을 사 갔고, 목포랑 군산 뱃사람들은 양키시장으로 옷을 사러 옴서 가마니 띠기로 사 갔어유. 그리고 뱃사람들은 그물에다 감물을 들여서 사용혔어유. 감물을 들이믄 줄이 찔겨진다나 어쩐다나···. 허기사 지금도 멀리서 사러 오거나 전화를 혀서 택배로 보내달라는 사람들이 있긴 있는디···."- 관련기사 : 2009년 10월 2일 "일본놈 감으로 지사 지내믄 안되쥬")

산지인 고산, 완주, 진안, 흥덕 등에서 가져와 떫은맛을 가시게 한 다음 중간도매상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팔려나갔다. 하루에 한 트럭 파는 상인도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갈 즈음이면 몰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단다. 그러한 호경기는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했던 춘천주조장을 비롯해 선술집, 해장국집, 튀밥집(뻥튀기집), 떡장수 등도 한몫 했다.

그중 춘천주조장은 문병량 보배그룹 창업주와도 인연이 깊다. 문병량은 군산시 회현면 출신으로 한국전쟁 후 옥구 미군비행장에 근무하다가 1957년 춘천주조장을 인수한다. 감도가에 거주하며 주조장을 운영하던 그는 1963년 원대한 뜻을 품고 이리(익산시)로 이사, 보배소주(보배그룹 태동)를 창업한 것으로 알려진다.

감도가는 외지 뱃사람들까지 찾아와 몇 접씩 사갈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군산을 대표하는 홍등가로 변하더니 2000년 대명동 화재 참사로 된서리를 맞는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영과 쇠락을 거듭했던 감도가. 토종감을 우려서 파는 업소가 10년 전까지 존재했으나 지금은 을씨년스런 거리에 퇴색된 술집 간판들만 덩그러니 내걸려 있다.

군산의 밀리터리 패션가 ‘양키시장’

군산은 광복(1945)과 함께 ‘수탈의 도시’란 치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 행정을 집행하는 ‘미군정’이 시작된 것이다. 거리에는 삼팔선 넘어온 월남민이 넘쳐났고, 곳곳에 하꼬방(판잣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식량과 의복을 배급받아 겨우 연명하였다.

군산에 들어온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옥구비행장(현 군산 미공군비행장)을 접수한다. 그해 10월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키문화’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미군 담요를 물들여 옷을 만들어 입었고, 청년들은 미군 작업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녔다. 양담배, 통조림, 커피, 비누, 휴지 등 미제 물건을 숨겨놓고 파는 ‘암상인’도 등장한다.

거리는 미군과 양색시,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까지 가세해 북새통을 이룬다. 평화동 ‘양키시장’은 한국전쟁 때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위 38도선(삼팔선) 이남지역에 미군이 진주, 행정을 집행하던 미군정기(1945년 9월~1948년 8월) 생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구 ‘닭전(가축시장)’ 부근에 암상인이 하나둘 자리잡기 시작해서 ‘야매시장(양키시장)’으로 확장된 것.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1월(1·4후퇴 때) 미 수송함(LST)을 타고 군산항에 발을 내디딘 피난민은 5만여 명. 그중 절반이 군산에 정착하면서 곳곳에 수용소와 피난민촌이 조성된다. 내항에는 미군 항만사령부가 주둔하고 내항선 철도 주변엔 움막집이 빽빽하게 들어선다. 생활력 강한 피난민들은 부두로, 시장으로, 거리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3만 여 피난민이 군산에 새로운 터전을 일구면서 빈대떡 전문 선술집이 등장하고, 추운 겨울에도 이 시린 냉면을 파는 냉면집도 개업한다. 시청을 중심으로 중앙로와 영화동에 미군전용 클럽과 무도장이 오픈하면서 양공주와 미군이 손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도 눈에 익숙해진다. 이때부터 미군 깡통경제가 군산 사회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한다.

# 한국전쟁(1950) 이후 더욱 확장

전쟁으로 노숙자와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한국은 원조경제 시대로 진입한다.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4개와 두 사람이 굳게 악수하는 그림, 그리고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 팔거나 바꾸지 말 것’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포대의 그림은 우정과 신뢰를 상징해서 ‘악수표 밀가루’란 이름으로 시중에 나돌았다.

미국에서 잉여농산물 원조가 시작되면서 ‘미제는 똥도 약된다’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미군 야전 재킷이나 털잠바를 염색해서 입는 것을 최고의 사치로 여기던, 가난한 때였다. 농촌 사람들은 쌀과 보리를 주고 구호물자 옷을 사 입었다. 염색 전문 세탁소가 동네마다 생겨났고, 평화동 양키시장도 더욱 확장된다. 점포수도 대폭 증가한다.

양키시장에는 ‘○○테라(tailor)’, ‘○○양복점’ 등 맞춤양복 전문점도 들어선다. 작업복, 지퍼 등을 수선하는 가게도 여러 곳 있었다. 가게를 얻지 못한 피난민들은 좌판을 벌여놓고 부대에서 흘러나온 생활용품을 팔았다.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에 보충대(논산훈련소 전신)가 주둔하고 있어 더욱 활기를 띠었다. 한국군 부대에서는 값싼 군수품이 쏟아져 나왔다.

상점에 쌓인 상품은 군복이 주종을 이뤘으며, 미공군비행장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물건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상품 조달도 미군이나 한국군 병사가 직접 가져오는 경우, 양색시를 통한 보따리장수와 미공군비행장 매점(PX)에 근무하는 한국인 종업원, 아니면 트럭을 이용해 미군부대에서 전문적으로 군수품을 빼돌리는 사람 등 루트도 다양했다.

북에서 3·8선 넘어 내려왔다고 해서 사람들은 ‘3·8따라지 인생’이라 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가난한 난민은 아니었다. 귀한 전축을 틀어놓고 출근길 걸음을 즐겁게 해주는 양복점도 있었고, 당시로는 새로운 패션 감각으로 꾸며놓은 점포도 있었다. 쟈크 수리점에서 고급 양복점까지 다양했던 것. ‘군산의 명동’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로 화려했던 영동(패션거리)에서 느낄 수 없는 멋과 낭만이 있었다.

# 보릿고개 시절(50~60년대) 양키시장 모습

50~60년대 양키시장은 ‘닭 전(가축시장)’을 끼고 있었으며 부근에 양키냄새 짙게 풍기는 빈 깡통과 종이박스, 헌 잡지, 필름 등을 취급하는 도소매점도 두세 곳 있었다. 미군들이 사용하던 침구류를 팔기도 했는데, 씨-레이션(전투식량)에서 워커(군화), 에어매트리스, 항고(밥그릇), 비누, 군용벨트, 수통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깡패들이 활개치고 다니던 시절, 놋쇠로 만든 톱니로 양쪽 끝을 고정하는 군용벨트는 중고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허리에 차고 있다가 풀어서 휘두르면 기선을 제압하는 무기가 되었고, 호신용으로도 그만이었기 때문. 군용벨트는 보기에도 위협적이어서 허리에 차고 다니면 불량학생도 함부로 시비를 걸지 못했다.

군용벨트는 사춘기 학생이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은 물건이었으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착용하다가 훈육주임에게 들키면 문제학생으로 몰려 엄한 기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밤길에 깡패와 도둑이 염려된다며 아들을 ‘양키시장’으로 데려가 구입해주는 학부모도 더러 있었다.

군용파카(스키파카), 오버, 외피 등을 취급하는 점포도 있었다. 그중 경비병들이 입는 야전파카는 방수처리까지 완벽해서 방한복으로 인기 최고였다. 단속에 걸리면 압수당하기 때문에 염색해서 입고 다녔는데, 점포 주인에게 부탁해야 겨우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귀했다. 겨울철 등산파카로 둔갑하기도 했다. 빙벽등반 마니아들이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누드 사진이 담긴 ‘플레이보이’ 잡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는 가게도 있었고, 미군비행장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필름을 파는 가게(기공사)도 있었다. 기공사는 카메라와 시계수리를 겸한 도매상점으로 가게는 2~3평에 불과했지만 거래액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주인 역시 피난민으로 북한 사투리가 유달리 강했다.

# 지금은 20여개 기성복 매장만 유지

양키시장은 충남 서천, 대천, 전북 익산, 김제 등지 단골도 많았다. 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미군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따라서 미군 헌병들이 수시로 단속을 나왔으며 불법으로 유통된 군수품을 진열했다가 압수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단속 바람이 불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상인들은 암호를 주고받으며 물건을 치우곤 하였다.

군산 지역 부모들은 명절 때면 초중고 학생 자녀들을 양키시장으로 데리고 가 새 교복을 맞춰주었다. 1960년대 중반 초등학교 졸업하고 양키 시장 맞춤옷가게에서 기술을 배웠다는 형주안 씨는 “옛날에는 설이나 추석 보름 전부터 밤새워가며 일을 했는데, 심부름을 하면서도 신이 났었다.”라고 회고한다.

군복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크고 작은 점포 100여 개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밀리터리 패션가’ 평화동 양키시장. 교복 자율화 이전이던 1980년대 초만 해도 학생들이 몰려다니며 단체로 맞출 것이니 싸게 해달라고 해서 흥정하는 재미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밀리터리 스타일 기성복 매장 20여 개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형주안 회장 이야기>(2009년 1월 인터뷰)

“경기가 좋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도 돈으로 보인다고 했어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하나씩 사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주인이고 종업원이고 길에 나가 손님을 끌었지요. 그런 걸 보면 피난민들 생활력이 남한 사람들보다 강했던 것 같아요. 하긴 나도 객지로 나가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때는 설이나 추석 보름 전부터 밤새워가며 일을 했는데, 심부름 하면서도 신이 났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뱃사람들이 옷을 사 입고, 철공소 주인들은 일꾼들에게 작업복을 맞춰줬거든요. 그런데 선박이 줄어들고 철공소도 하나씩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손님이 끊긴 상태입니다. 모두 어디로 갔는지 뱃사람들도 안 보여요.

나운동에 도시가 조성되기(1990년대) 전에는 옷을 맞춰 입는 가게가 영동과 이곳 두 군데밖에 없어서 장사가 잘되었는데, 대기업들이 의류시장에 끼어들면서 너나 나나 메이커만 찾는 바람에 시장이 죽어버렸어요. 거기다 교복 자율화까지 되니까 학생들 얼굴도 보기 힘들고···.

중동과 금암동에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때는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무척 많았는데 지금은 어쩌다 한 명씩 지나가요. 걔네들이 모두 손님이었거든요. 그리고 밤에는 술래잡기하는 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웠는데 지금은 아이들 얼굴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사람 지나가는 것도 보기 어려워요···.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식들 교육을 마친 나이이기 때문에 돈을 벌기보다는 놀고 먹기 그렇고 하니까 문을 열어놓는 겁니다. 서울이나 대도시처럼 집값이 오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먹고 살게 해준 터전이니까 지켜야지요.”

초년에 고생은 했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살아온 것 같다는 '형 회장(상우회 회장)'은 가을에 감독으로 감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길에 버린 감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청소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그래도 흥청거리던 옛날이 좋았다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려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약전골목

약전골목은 중앙초등학교 정문에서 양키시장으로 향하는 길 중간 지점-구 군청골목 사이(약 150m) 구간을 일컫는다. 좁은 골목길임에도 일제강점기 군산약방(합자회사), 수창상회약방(합자회사), 보화의원(원장 김창문) 등 유명한 한의원과 한약재료 도매상이 여러 곳 있었으며 광복 후에도 남일약업사 등이 자리하여 약전골목, 한의원골목(한약방골목) 등으로 불렸다.

약전골목은 본래 장재동에 속하였다. 장재동시장과 이웃하고 있었던 것. 그러다가 군산경찰서-구복동-대정동-장재동 등을 관통하여 군산역까지 이어지는 소화통(현 중앙로2가) 공사가 1930년대 초 마무리 되면서 ‘소화통 2정목’에 편입된다. 이 골목은 도로명도 ‘약전길’로 대부분 결혼식을 집에서 치르던 시절(50~60년대) 전주예식장과 전주여관이 있었다.

보화의원(원장 김창문) 발자취

기록에 따르면 1914년 12월 현재 군산에는 사립병원 3곳, 의원 2곳, 산파 4곳, 약종상 8곳이 있었으며 의사는 의학사 1명, 의사 6명, 의생 2명과 간호부 3명, 약제사 2명이 있었다. 당시에는 의사를 의학사, 의생 등으로 분류해서 칭하였으며 약사는 약제사, 간호사는 간호부라 하였다.

김창문(金昌文) 원장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이다. 옛날신문에 따르면 그는 유소년 시절부터 한학(漢醫學)에 뜻을 두고 10여년을 배우고 체득하였다. 그 후에도 다년간 연구에 몰두하다가 1916년 군산에 보화의원(普和醫院)을 개원한다. 그는 평소 온량겸직(溫良兼職)했으며, 부인소아병(婦人小兒病)에 신효(神效)가 있으므로 매일 환자가 답지했다고 신문은 전한다.

개원 당시 보화의원 위치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1922년 구복동(현 개복동), 1932년 대정동(중앙로 2가 부근), 1936년 소화통 2정목(중앙로 2가)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 후 보신의원(普信醫院)으로 변경했다가 1951년 한의사제도 통과 후 ‘김창문 한의원’으로 개칭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창문 원장은 1925년 4월 12일 군산부 구복동 식도원(요릿집)에서 열린 군옥의생회(群沃醫生會) 창립총회에서 박창현(朴昶鉉), 김공진(金共珍) 등과 함께 간사(幹事)로 선출된다. 당시 회장에는 강기영(姜祈永), 부회장 이긍식(李兢植), 평의원은 조홍집(趙弘集) 외 4명이었다.

<군산시한의사회 60년사>(2011)에 따르면 김창문 원장은 군산한의사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김창문 원장은 군산 영신여학원 설립 의연금(1922년 9월), 월남 이상재 선생 장례식 부의금(1927년 4월), 재만피란동포(在滿避亂同胞) 위로금(1931년 11월) 등을 전달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이는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조선인 무산아동 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며 사회 활동도 활발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1970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떡전골목

지금의 평화동에서 중앙로 2가로 이어지는 ‘우리은행 군산지점 골목’(구 군청골목) 일대를 일컫는다. 떡전골목은 주로 지게꾼, 구루마꾼 등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아낙들이 시루떡과 인절미, 흰떡, 팥떡, 콩떡 등을 팔았으며 더러는 팥죽도 팔았다. 째보선창을 비롯해 부두 화물역 광장에는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쓴 팥죽장수와 떡장수 아낙들이 진을 치고 손님을 맞았다.

# 농방골목

‘농방골목’은 목제가구 만드는 소규모 공장 10여 곳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언제 생성됐는지 기록은 없지만 장재동시장이 존재하던 일제강점기(1920년대 전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는 감도가, 양키시장, 약전골목, 떡전골목 등과 벨트를 이루며 상권을 형성했다. 농방골목은 떡전골목(현 약전안길)을 경계로 약전골목과 이웃하고 있었다.

구 영동파출소 부근 큰샘거리(대정동)와도 이웃하고 있었다. 이곳에 가면 전통기법으로 장롱 만드는 목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호마이카 가구가 대중화되기 전인 1960년대, 이곳에서는 다양한 가구(장롱, 이불장, 옷장, 책장, 탁자 등)를 만들어놓고 팔거나 주문받아 제작했으며 김제, 강경, 한산, 장항, 서천, 익산 등지 단골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동나무 재목으로 만든 장롱을 딸의 최고 혼수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오동나무는 제재목 결이 곧고 문양이 고우며 견고하면서도 가벼운데다 습기에도 강해 고급 가구에 널리 쓰였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늘거나 줄어들지 않아 고품질 가구를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오동나무 장롱은 인기가 높은 만큼 품위도 있고 값도 비쌌다.

오동나무는 목수들이 가구재목 중 으뜸으로 여겼다고 한다. 온도에 민감하여 장이나 궤의 내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고 해충과 벌레의 피해가 없어 으뜸 가구 재료로 사용됐다고 한다. 빨리 자라므로 심은 지 10년쯤 되면 목재를 이용할 수 있어 딸을 낳으면 마당에 오동나무 심었다가 장롱을 만들어줬던 것.

자녀 결혼이나 이사 앞두고 새 가구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았던 농방골목. 이 골목은 70년대 이후 소비자들 삶의 질이 높아지고 견고한 철제가구(캐비닛, 수납장, 책상 등)가 등장하면서 명성을 잃는다. 1970년대까지 한두 곳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 농방골목은 대기업들이 조립식 목제장롱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지금의 죽성동 가구점 거리에 대리점들이 하나씩 문을 열면서 모두 자취를 감췄다.

# 소아과의 태두(泰斗), 강세형 원장

▲ 세창의원 최근 모습/사진=조종안 기자
▲ 세창의원 최근 모습/사진=조종안 기자

농방골목에는 냉면으로 유명한 강경옥과 계림주조장, 조선인(강세형)이 원장인 세창병원 등이 있었다. 그중 계림주조장은 여관으로 변하였고, 세창병원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 의사들은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위생 강연회' 연사로 나서거나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의(校醫)를 맡기도 하였다.

조선인 의료 인력이 크게 부족했던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병원을 개업한 의료인은 의학전문학교 출신 의학사(醫學士)보다 다양한 의료시설에서 조수 경력을 쌓아 의사 시험에 합격한 개업의가 훨씬 많았다. 출신지도 서울을 비롯해 대구, 청주, 전북 고창, 충남 서천, 전남 목포 등 외지인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그중 강세형(姜世馨) 세창의원 원장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강 원장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의학사 출신으로 광복 후에도 군산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그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망도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강세형 원장은 군산이 고향이다. 1921년 경성세브란스의전 졸업하고 동(同)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가 1922년 의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그해(1922) 충남 강경에서 개업했다가 1924년 2월 군산으로 이전, 지금의 중앙로 2가에 세창의원(世昌醫院) 개원하였다. 그는 지역에서 드물게 군산영명학교(특별과) 출신 의학사로 알려진다.

강 원장은 1931년 4월 좌담회(주제: '지방 여론을 청함')에 참석, 중등학교 설치와 공중위생 개선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1923년 군산에 있던 농업학교를 타지로 옮기고 중학교를 설립한다. 그러나 조선인 아동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강 원장은 "언제든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는 것'이니 이번에 조선인 본위 중등학교 설치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어 강 원장은 "군산은 공중위생인 하수구가 조선인 동네에 불충분하다. 모기와 날파리 때문에 야간에는 사람이 통행할 수가 없다. 개복동 일대는 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수구 시설이 시급하다"고 지적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거주 지역은 오물을 내놓기 바쁘게 가져가지만, 조선인 동네는 며칠이고 방치되어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진찰 잘해서 '소아과의 태두'로 불렸던 강 원장은 '의(醫)는 인술(仁術)'임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빈자의 무료 진료를 자청했다 한다. 무료 시료(施療)는 광복 후에도 이어진다. 간호사를 통해 걸인에게 적은 금액이나마 돈을 전해줘 단골 걸인이 여럿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전한다. 서민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강 원장은 1977년 봄까지 진료했으며 1983년 3월 영면에 든다.

참고 문헌: 문화원형백과 한국전통가구(2004)./ 조종안 기자의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 의료인들의 활동 살펴보니>(2020. 12. 08. 오마이뉴스)

# 모시전 거리

‘모시전 거리’는 영동 입구에서 내항 쪽으로 쭉 뻗은 길(죽성로)을 일컫는다. 이 거리는 한산 세모시와 나포에서 생산되는 삼베 도·소매상이 즐비하여 ‘모시전 거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죽성로(죽성동)는 일제강점기 강호정(江戶町)이었으며 한산 모시장보다 거래량이 많아 항상 북적였었다고 전한다.

죽성동 지역은 죽성포(째보선창)를 끼고 있었으며 대숲이 울창하여 조선 시대에는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고개)’라 하였다. 산을 넘어다니는 고개가 있었던 것. 객주 거리는 샛강을 끼고 조성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죽성동과 신영동 거리에 죽세공품 업소가 밀집해 있었다. 째보선창 쪽으로 신영동이고 그 일대 골목이 싸전거리였다. 일고여관, 천안여관, 함양여관, 삼남여인숙 등 주변에 외지 지명이 들어간 여관과 여인숙이 많았던 것도 크고작은 배들이 드나들었던 째보선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제강점기 ‘모시전 거리’에는 식료품시장(청과시장)을 비롯해 <동아일보> 군산지국(1920년대 초), 옥산당약방(옥산의원), 군산좌(군산극장 전신), 동부금융조합, 옥구금융조합, 군산비료회사, 호남농구회사 등이 자리하였다. 그중 옥산당약방은 조선인 약사가 운영했으며 광복 후 1970년대까지 영업하였다.

# 싸전거리

현 국민은행에서 째보선창 방향 골목에 쌀가게가 모여 있었다. 이름하여 ‘싸전거리’. 이 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가 막바지 전쟁에 몰려 군량미 때문에 식량 통제를 강력히 펴면서 사라졌다. 이때 쌀을 팔러오는 사람들은 됫박이나 많아야 말(斗)이였으며, 어쩌다 한 가마니 정도가 거래되었다. 당시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 객주거리

객주란 포구를 중심으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창고업, 화물수송업, 수산물 위탁판매, 금융업 등의 기능을 겸했던 중간 상인을 일컫는다. 군산은 전라도 지역 세곡을 모아 서울로 올려보내는 군산창이 있어 객주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객주 거리도 싸전거리 인근에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했다. 개항 전 군산 지역에는 90여 명의 객주가 상주하였다. 그들은 일본 상인들의 횡포에 대비, 순흥사(順興社) 설립에 나섰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객주들은 1899년 궁내부 허가를 얻어 영흥사(永興社)를 설립한다. 영흥사는 군산포와 경포(서래장터) 객주들을 관할했으며, 관청과 연락을 취해 업무를 조정하고 수세 상납을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1903년 창립된 창성사에는 60여 명의 객주가 참여한다. 당시 <황성신문>은 군산지역 객주들의 활동으로 일본 상인들의 경제침투가 어려웠다고 보도하였다. 군산의 객주들은 을사늑약(1905) 이후 국채보상운동과 교육 사업을 지원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 개항 1년 전(1898) 제작된 지도를 보면 지금의 월명공원 대사산과 째보선창을 감싸고 있는 돌산 두 곳에 ‘공원예정지’ 표기가 되어있다. 이는 돌산이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1917년 지도에 해발 22.3m로 나타난다. 도시조성 전 찍은 사진에도 돌산 줄기가 지금의 신영동 사거리 너머까지 뻗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강에까지 맞닿았던 돌산이 1960년대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의 해망로 확장공사 때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샛강은 1978년 복개되어 주차장으로 사용해오고 있다. 지금의 동신영길(해망로~공설시장 서문)은 복개공사(1978) 전 샛강 물줄기였다. 따라서 50~60년대 샛강에는 다리(교량)가 다섯 개 놓여 있었다.

따라서 옛 지도에 나타나는 돌산의 지형과 복개공사 전 좌측으로 석산을 끼고 흘렀던 샛강 줄기(지금의 동신영길), 그리고 싸전거리 주변에 주막거리가 있었다는 문헌 등을 참고하면 지금의 동신영길 동쪽 지역에 객주 거리가 조성되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군산식료품시장(군산청과물시장)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민족자본 유통을 차단하고 조선인들의 기업 설립을 억제하기 위해 그해 12월 <조선회사령>을 공포한다. 이어 전통 재래시장의 상거래 장악을 목적으로 <시장규칙>(1914)을 제정한다. 군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5년경 시행한 서래장터 현황(역사와 거래 규모, 상품 수급 지역 등) 조사 결과가 그것이다.

1914년 <시장규칙>을 제정한 일제는 본래 전통시장을 제1호 시장(상설 또는 정기 재래시장), 제2호 시장(지정된 건물 내에서 곡물 및 식료품을 파는 식료품시장), 제3호 시장(위탁이나 경매로 거래하는 농수산물 경매시장) 등으로 분류하고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조치한다. 제2호와 제3호 시장을 합해 '신식시장'이라 하였다. 모두 조선인 시장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중추원 조사 자료(<군산의 시장에 대하여>)에 따르면 ‘군산시장(群山市場)’은 조선인용 상품이 주로 매매되었고, 군산어시장 및 식료품시장은 내지인(일본인)을 고객으로 운영하였다. 따라서 물자의 공급, 수용(需用) 구역은 상품 수급상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군산부 및 부근 일대 촌락에 한정되었으며, 멀리 떨어진 곳과는 거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1918년 ‘강호정(현 죽성동)’에 ‘식료품시장’ 설치

1918년 10월 14일 군산부는 강호정(현 죽성동)에 공사비 4800원을 투입해 식료품시장(채소 도매시장)을 설치한다. 운영자는 이등충효(伊藤忠孝)였다. 취급품은 주로 채소류 및 과실류였으며 1년간 거래액은 12만 5000원에 달하였다. 거래규모가 날로 증가하자 1928년 5월 4800원을 투입해 같은 장소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당시 중개인(중매인)은 일본인 7명, 조선인 15명, 중국인(화교) 10명 등 총 32명이었다.

기록(<군산부사>)에 따르면 식료품시장은 본래 일본인 석전구태랑(石田龜太郞)을 포함한 12명이 1915년 6월 17일부터 ‘군산식료품 판매조합’이란 이름으로 경영하였다. 그러나 주감(主監)인 석전구태랑이 파산하면서 경영이 어려워진다. 그 후 1916년 11월 영업인가가 취소되고 1918년 10월 14일 ‘군산부 식료품시장’으로 개칭, 이후 부(府) 경영 체제로 운영되었다.

중매인(총 32명) 중 화교가 약 30%(10명)를 차지해 눈길을 끈다. 이는 각종 채소를 전문으로 재배하는 화교(華僑) 농가가 외곽에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시내에 중화요리점이 많았기 때문으로 받아들여진다. 기록에 따르면 1918년 현재 군산 인구는 총 12,136명으로 조선인 5,990명, 일본인 5,985명, 외국인(화교 포함) 214명이었다.

군산에 화교가 들어온 시기는 19세기 후반으로 개항(1899)과 함께 화교 상인들이 시내에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분 화교들은 부두나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채소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였고, 요리점, 잡화상, 철물점, 옷감장수 등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뿌리를 내렸다.

군산 개항(1899) 이후 일제는 입출항 선박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지금의 나운동, 오룡동, 삼학동, 둔율동 일대에 채소재배 단지를 조성한다. 이 지역 채소 재배농가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고향에서 채소 재배에 종사하던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전문적인 집약 채소농업이 뿌리내리는 데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앞에서 언급한 지역(나운동, 오룡동, 삼학동, 둔율동 일대)은 1930년대에 부(府)에서 운영하는 전문 밭작물 재배지역으로 개간된다. 이 지역은 광복 후에도 밭농사가 주업인 화교가 많이 살았다. 삼학동과 오룡동 사이 산비탈에 화교들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화교 공동묘지는 1970년대 초 나운동 군경묘지 뒷산 중턱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식료품시장 공식명칭은 ‘군산부영청과물시장(群山府營靑果物市場)’이었다. 군산부에서 운영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물론 언론에서도 청과시장, 채소약간, 채소곡간, 야깡(약간) 등으로 기록하였다. 한국인 의사가 진료했던 옥산의원은 신문 광고에 병원위치를 ‘약깡 앞’이라 안내해서 눈길을 끈다.

# 50~60년대 청과시장 풍경

모두가 가난했던 보릿고개 시절(50~60년대), 가을이 깊어지면 청과시장은 김장거리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개정, 대야, 성산, 옥구, 회현 등 인근 각지에서 우마차에 바리바리 싣고 온 무와 배추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일거리를 찾아 나선 지게꾼과 구루마꾼까지 몰려들어 발디딜틈 없이 북적댔다.

청과시장 주변 골목은 공설시장과 신영시장을 끼고 있어 항상 붐볐다. 김치도 담가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집 아낙들은 청과시장 주변 바닥에 떨어진 무·배추 시래기를 주워 모아 죽을 끓여 먹거나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하였다. 군산 외곽 각지에서 입하된 무와 배추를 사람 키 높이로 바둑판 모양으로 쌓아놓으면 미로 같은 골목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가을이 시작되면 말이나 소달구지가 많이 지나다녔다. 가을이 깊어지면 달구지 행렬이 장대열차처럼 길게 이어졌다. 청과시장에 퍼놓을 자리가 없으면 주변 골목과 공설운동장 담벼락을 따라 세워놓고 기다렸다. 무거운 짐을 끌고 오느라 지친 소와 말들에게는 여물을 먹으면서 한가로이 쉬는 시간이기도 했다.

# 광복 후 ‘주식회사’ 체제로 운영

식료품시장은 광복 후 ‘주식회사’ 체제로 운영된다. 1945년 10월 중개인들이 군산 청과조합을 결성하고, 1948년 5월 군산시 위탁업체인 ‘군산청과물 주식회사’로 개칭한 것. 당시 중개인은 30명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초대 대표(사장) 기록이 없으며, 1950년대 들어 현제범(玄濟範), 송용섭(宋龍燮) 등이 사장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그중 송용섭 사장은 10년 넘게 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언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 사장에 취임한 그는 1968년 반공기금 2만 원을 기탁한 이후 언론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50~60년대에 군산상공회의소 부회장, 군산시 교육위원, 군산체육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사장 퇴임 때 자신의 주식을 상인들에게 나눠주고, 운영이 어려운 단체에 재산을 희사했으며 가난한 선수들을 후원하는 등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살았던 인물로 알려진다.

# 송용섭 사장은 누구?

송용섭(1912~1992) 사장은 전주 출신으로 1935년경 군산으로 이주한다. 미곡상 운영하는 형님 권유로 군산에 온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권남선 보건교사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광복 후(1950년대) 군산청과건어시장주식회사(청과시장) 사장으로 취임한다. 최고 경영자(CEO)로서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10년 넘게 재임하면서 회사를 반석위에 올려놓는다.

송 사장은 1992년 유명을 달리한다. 이후 애국지사로 밝혀져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전주고보 재학시절인 1929년 5월 단체(13명)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단다. 당시 나이는 열여덟. 만주로 건너가려던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핍박과 고초를 겪는다. 학교에서 퇴학당했던 그는 광복 직후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모교와 동문회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정하여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던 것.

송용섭 사장은 3·1운동 101주년이 되는 2020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 직인이 찍힌 애국지사 증서를 받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 그가 사후에야 명예를 회복한 이유는 ‘평소 재물은 공동의 것’이라는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여 권위주의 시절 몸을 사리고 지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표창증서에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표창한다”는 문구가 선명하다.

지역별 키워드

ㆍ평화동: 옥구금융조합(1948년 조선신탁은행 군산지점, KB국민은행), 태극당제과점, 삼양상회(청량음료), 대화당, 협신백화점(육정림 무용연구소), 대한미싱, 중앙전파사, 쌍성루, 진내과, 농방골목(큰샘거리), 세창의원(원장 권세형), 계림주조장, 떡전, 약전골목, 양키시장, 심약국, 영신양복점(정순문 씨), 십자의원(소아과), 평화의원(1949), 이산부인과, 평화집(60~70년대 아귀탕),

ㆍ죽성동: 옥산당약방(옥산의원), 동아일보 군산지국(초대 군산지국장 변정호), 군산청과물시장(채소약간), 모시전거리(죽성로), 군산좌(군산극장 전신), 조일정미소, 가설극장(문화관), 호남농구 주식회사(쌀가마니 짜는 기계 제조회사), 와타나베제염소(소금 만드는 회사), 신탄시장(장작거리), 군산동부금융조합, 서해방송국(KBS 군산방송국), 영신당한약방, 김제당, 완주옥, 홈런세탁소, 대동사이다,

<조종안 기자의 군산학 강좌 안내>

▲1강(08/23)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①-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2강(08/25) 군산의 도시 형성과정②-조선인 거리를 중심으로

▲3강(08/30) 우리 동네 톺아보기-궁멀에서 철길마을까지(구암동, 조촌동, 경암동 일대)

▲4강(09/01) 우리 동네 톺아보기-경포에서 째보선창까지(중동, 금암동 일대)

▲5강(09/06)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①(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6강(09/15)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군산역에서 중앙로 2가까지②(죽성동, 신영동, 영화동, 평화동, 영동, 중앙로2가)

▲7강(09/17)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①(현장탐방)

▲8강(09/20)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구복동에서 창성동까지(개복동, 창성동 일대)

▲9강(09/22) 우리 동네 톺아보기-선양동에서 둔배미까지(선양동, 오룡동, 둔율동 일대)

▲10강(09/27) 우리 동네 톺아보기-흙구데기에서 미원동까지(삼학동, 미원동 일대)

▲11강(09/29) 우리 동네 톺아보기-옛 경성고무 주식회사에서 팔마재까지(흥남동, 문화동, 경장동, 미장동 일대)

▲12강(10/08) 군산 사람들의 삶과 애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②(현장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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