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와 아이들은 롤라장에 오면 늘 디제이 부스 앞에 모여 있었다. 음악이 끝나도 떠날 줄을 몰랐다. 롤러스케이트를 탄 채 오빠들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문이 열리면 우르르 몰려갔다. "오빠, 천장지구 봤어?" "유덕화 멋있지?" "아냐, 주윤발이야." "나 첩혈쌍웅 이수현 닮지 않았냐?" 들뜬 목소리가 롤라장 안을 가득 채웠다.
"민정아." 세나가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다. "같이 가자."
민정이는 쪼그리고 앉아 롤러스케이트 끈을 다시 묶었다. "싫어." "재밌는데." "너네끼리 가."
세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아이들을 따라 뛰어갔다.
민정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트랙 안으로 들어갔다. 음악은 이미 끝났는데도 한 바퀴를 더 돌았다. 바퀴 구르는 소리만 텅 빈 롤라장을 길게 맴돌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만 되면 아이들은 둥글게 모여 앉았다. 새로 나온 홍콩 영화 이야기. 누가 멋있는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또 장국영의 당년정과 월량대표아적심을 흥얼거리다 누군가 엉터리 발음으로 따라 부르면 아이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민정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민정아, 같이 듣자“ 한 아이가 워크맨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민정이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세나가 웃으며 말했다.
"얘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아이들은 금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민정이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젓가락으로 멸치볶음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시락을 끝까지 비웠다.
며칠 뒤였다. 롤라장이 문 닫을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디제이 부스로 모였다.
"공주님." 오빠 하나가 세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놀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쉿." 무리 중 하나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아이들은 금세 입을 막고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세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민정이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내 쪼그리고 앉아 롤러스케이트를 벗었다. 이미 단단히 묶여 있는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잡아당기고 가방을 맸다.
"벌써 가?" 매표소 아주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네." 민정이는 짧게 대답하고 롤라장을 나왔다. 등 뒤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1교시 종이 울려도 세나는 오지 않았다. 늘 함께 다니던 아이들 자리도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각인가?" 담임선생님은 출석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9시가 조금 넘자 복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교무실 문이 열리고 선생님들이 급히 오갔다. 교실 안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복도에서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애들이 가출했데.”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민정이는 말없이 세나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주윤발 책받침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