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가구거리의 밤은 늘 축축했다. 롤라장 지하에서 흘러나온 팝송 소리와 담배 냄새가 골목 안에 눌어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캔콜라를 돌려 마시거나,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야, 근데 어제 진짜 쫄았잖아.”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면도칼 여깡이 물러나는 거 처음 봤다.”, “나는 민정이 니가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니까.”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민정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운동화 끝으로 바닥의 돌멩이들을 차댔다. 여전히 쇼윈도 앞에서 봤던 자기 눈빛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독기 어린 얼굴. 마치 다른 사람 같던 표정.
“근데 너네 삼촌 진짜 백악관파 맞아?” 민정이는 그냥 피식 웃다가 금세 표정을 지웠다. 사실 어제 자신도 무서웠다. 롤라장 뒷골목에서 면도칼을 들이대면 어쩌나, 정말 얼굴이 그어지면 어쩌나. 순간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이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시민회관 공사판에서 다른 무리들이 시비를 걸다가도 민정이가 가까이 오면 한 번쯤 눈치를 봤다. 롤라장에서도 슬쩍 피하는 아이들이 생겼다. “쟤 건드리지 마.” “눈 돌아가면 무서운 애래.” 소문은 아이들 세계에서 이상할 만큼 빨랐다.
민정이는 그 말들이 우스웠다.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는데, 물러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서워했다. 집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밖에서는 점점 독한 애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진짜 강한 사람보다, 잃을 게 없어 보이는 사람을 더 무서워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아이들은 시민회관 뒤 공사판에 모여 있었다. 컵라면 국물을 나눠 먹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들던 중이었다. “우리도 이름 하나 만들까?” 누군가 툭 던졌다. “무슨 이름.”, “몰라. 칠공주처럼.”, “아 씨, 촌스럽게.” 아이들이 웃었다.
그때 말랭이 친구 하나가 장난스럽게 영화음악의 리듬을 흥얼댔다. “따!단!, 따단따단 따단, 따. 단.” “뭐야! 죠스냐?”, “야, 샤크 어때.”, “상어?”, “상어 좋네”, “건드리면 무는 거지.” 아이들이 피식거리며 따라 말했다. “샤크?” “오, 좀 괜찮은데?”
누군가 장난처럼 민정이를 턱짓했다. “야, 민정이 화나면 진짜 상어 눈깔 같긴 해.” 또 웃음이 터졌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 나빴을 말인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민정이는 캔콜라를 넘겼다. 김빠진 단맛이 목 안으로 미끄러졌다.
그날 이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샤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거창한 규칙 같은 건 없었다. 누구를 압박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서로 편이 되어주는 것. 혼자 끌려가거나 맞게 두지 않는 것. 그게 전부였다.
민정이는 집보다 거리가 편했다. 집에서는 자신의 편이 하나 없는데, 문제아 취급받는 이 아이들은 서로의 등을 내주었다. 얻어먹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무리 안에서는 숨이 막히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멀리서 욕설 소리가 들렸다. “내놔. 빨리 줘.” 작은 남자아이가 붙잡혀 있었다. 키 큰 아이 둘 중 하나가 아이의 배를 툭 쳤다. “쨍그랑.” 호주머니 안의 동전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와, 부자네?”, “진작에 줄 것이지.” 남자아이는 울먹이며 동전을 주워 담으려 했다. 하지만 발이 먼저 날아왔다. 퍽 소리와 함께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샤크 아이들이 슬쩍 눈치를 봤다. “야…. 그냥 가자.”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엮이면 귀찮아진다. 다들 그런 표정이었다. 민정이는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문득 자기 모습이 겹쳐졌다. 고개 숙인 얼굴. 못 본 척 지나가던 사람들.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던 연립의 기억.
민정이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멈춰 섰다. “야! 한기석.”, “어, 민정이 웬일이냐.”, 놈이 피식 웃으며 위아래를 훓다가 눈빛을 바꾸었다. “그냥 조용히 가라.”, “니들이 가.”, “니가 무슨 상관이야? 안 꺼져!”, “병신아, 애 우리 동창이잖아.”, “꺼져.”, “너나 꺼져!”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샤크 아이들이 하나둘 민정이의 등 뒤로 모여들었다. “어쭈, 이제 무리도 만들고 다녀?”, “니들도 똑같잖아.”
기석이 얼굴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민정이 뒤에 서 있던 말랭이 친구 하나가 툭 침을 뱉으며 말했다. “건들지 마.” 잠시 조용해졌다. 민정이의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했다. 두려움도 없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기석이는 민정이의 독기 어린 눈과 그 뒤를 빽빽하게 채운 샤크 아이들을 번갈아 훑었다. 머릿수에서 밀린다는 걸 눈치챈 아이는 투덜대며 주머니에 동전을 쑤셔 넣었다. “아, 재수 없게……. 가자.” 기석이 일당이 어둠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라졌다.
“야, 김민정. 너 진짜 깡다구 장난 아니다.” 말랭이 친구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아이들이 다시 소란스럽게 거리를 활보했다. 한 줄로 무리지어 걸을 때마다 민정이의 가슴 속 어딘가가 꽉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늘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장지동 연립주택의 숨 막히는 방을 벗어나, 처음으로 발을 붙이고 설 수 있는 울타리를 다시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이들의 어깨에는 전과 다른 무거운 힘이 들어가 있었다. 걸음걸이가 거칠어졌고, 눈빛과 행동이 대담해졌다. '샤크'라는 이름 뒤에 숨으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위험한 허세에 물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미처 몰랐다. 거리에서 자라난 그 알량한 허세가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얼마나 부질없이 깨져버릴지 말이다. 진짜 폭풍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